기자명 유오상 편집장 (osyoo@skkuw.com)

1938년생. 어릴 때부터 그를 키웠던 할아버지는 어느 겨울에 노루를 잡아왔다. 아이를 강하게 키우겠다는 것이었다. 노루의 피를 바가지에 받아 손자에게 억지로 떠먹이니 손자는 당연하게도 안 먹겠다 버텼다. 그러나 힘이 장사라고 소문났던 그의 할아버지는 기어코 그 피를 손자에게 다 먹이고서야 웃음을 지었다.
그 피가 예순이 가까운 나이까지 강골과 완력으로 젊은이에게 밀리지 않았던 비결이었다고 한다. 야구팬이라면 알만한 이야기. 김동엽 감독의 이야기다. 그는 성장 과정부터 한 마디로 ‘기인(奇人)’이었다.
만취 상태로 서울서 부산까지 무사고 운전을 했다는 믿어서도 안 될 일화부터 툭하면 그라운드로 나가 기이한 쇼맨쉽을 벌였던 감독으로 유명한 그였다. 하지만 13번 잘린 감독으로는 더 유명하다. 이 기록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은 야구사의 씁쓸한 장면으로 기록되어 있다.
언뜻 보면 이상하기만 한 인물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숱한 다른 기인과는 다르게 기억되고 있다. 아직까지 그가 추억되고 존경받는 것은 그가 누구보다도 야구에 충실한 ‘프로’였기 때문이다.
78년, 우리 학교 출신의 김 감독은 실업팀 감독직에서 해고당하고 우리 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는 취임 첫 해에 대통령기 야구대회 준결승에 오른다. 하지만 결승전에서 최동원이라는 불세출의 투수에게 무릎 꿇고 만다. 적장이었던 그는 경기가 끝나자마자 마운드로 올라가 승리투수를 축하해줬다. 당시 다른 감독이라면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프로 감독으로 창단 팀을 줄줄이 맡아 우승으로 이끈 그는 20년 감독 생활 중 13번 잘렸다. 12번 잘린 김성근 감독조차도 그를 걱정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항상 당당했다. 그에게는 최고의 프로구단 감독이라는 자부심과 프로정신이 있었다. 심판에게 어필할 때도 바닥에 선부터 긋고 시작할 만큼 지켜야 할 것은 확실히 지켰고 어수선한 창단팀 선수들을 다독이고 격려해 우승을 일궈냈다. 지독한 연습으로 팀을 이탈하겠다며 소동을 부린 선수도 있었지만 그만큼 그를 인정하고 존경하는 선수들도 많았다. 지금은 원로가 된 그의 후배들은 그를 뛰어난 감독으로 추억하고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프로 정신’에 몰두했기에 그는 13번을 잘리면서도 당당할 수 있었다.
“야구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이래라 저래라 간섭만 한다. 그러면 여공(女工)한테 가서 감독하라고 해라” 프론트에 의해 해임되는 순간에도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 짤라라 짤라>라는 그 다운 책을 내고 홀연히 가버린 지 십 수 년이 지났다. 그러나  지금, 주위를 보면 안타깝게도 그와 같은 리더십도 없고 ‘프로 정신’을 찾기도 힘들다. 소통하려는 의지도 없고 ‘프로 정신’까지 부재한 리더에게 어느 구성원이 지지를 표할 것인가 생각해보면 답은 자명하다. 자기 본분 보다는 잿밥에 관심 많은 ‘프로’ 정치인들만 많을 뿐이다.
10.26 재보선이 끝났다. 각자 결과를 두고 이런 저런 해석을 내놓고 있다. 어떤 이는 다른 사람의 영향이 컸다 말하고 어떤 이는 분노한 유권자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두 일리가 있는 말이다. 다만, ‘남 탓’과 ‘자기 변명’을 계속 반복하고 자신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무엇을 보여줬는지 깨닫지 못한다면 다음 선거에서 그리 좋은 소식이 나오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