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아세안 현대미디어아트전 'CROSS+SCAPE'> 스케치

기자명 엄보람 기자 (maneky20@skkuw.com)

전라북도 전주와 완주 사이 모악산 아래 자리한 한가로운 미술관. 이곳에 스물일곱가지 얼굴의 아시아가 깃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전시장을 찾았다.
전시 주제인 ‘CROSS+SCAPE’는 교차(Cross)하며 소통하고 융합하는 풍경(Scape)을 의미한다. 한국작가 7인이 아시아 10개국을 여행하며 마주친 타국의 인상과 20인의 아시아작가가 던지는 자국에 대한 문제제기가 1, 2층에 걸쳐 미술관 벽을 빼곡히 장식하고 있었다.
처음 마주한 작품은 한국작가 이원철의 <TIME (Yangon, Myanmar)>. 미얀마의 대표도시 양곤의 평범한 거리를 찍은 이 사진은 시간이 고여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국적 건물에 매달린 시계는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으며 고정된 듯 보이는 나무와 자동차, 구름은 연속성을 지닌 채 운동한다. 작가가 거리에 앉아 지켜본 만큼의 시간이 작품 안에서 무한히 재생되고 있는 것이다. 
싱가폴 도심이 담긴 <People-Singapore>은 작품 한 가운데가 뚝 잘린 채 10센티미터 가량 분리돼 있는 점이 독특하다. 호텔 옥상 풀장은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과 그 뒤로 펼쳐진 마천루를 수평으로 잘라낸 기준선이다. 두 동강난 사진 앞에 당황할 관람객을 위해 작가는 “거대한 구조요소들의 에너지 충돌과 관계맺음을 보여주려 했다”고 친절한 설명을 곁들여뒀다. 위아래가 서로 다른 생기를 지닌 사진은 도시와 인간이 팽팽한 힘의 균형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는 낯설고도 신선한 깨달음을 건넨다.
국내작가들의 ‘창의적 타국보기’는 <TEXTUS 103-1>에 이르러 정점을 찍는다. 이 작품은 카메라 필름을 직물조직(textus)처럼 엮어 만든 것이다. 수십 줄의 필름들은 간판이 빼곡한 해질녘의 어느 시장 거리를 실재인 듯 허상처럼, 허상인 듯 실재처럼 어긋나게 그려내고 있다. 작품에 다가서고 물러나기를 반복하고 있노라면, 마치 오만 군데로 분산된 여행자의 시선 조각들이 기억 속에 하나의 이미지로 자리 잡는 과정을 지켜보는 기분이다.
한편 외국작가들은 모국에 대해 좀 더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베트남 작가 티파니 청의 <Blue Lightning and Nhuc Nhich>는 빨간 세포 같은 물체에 둘러싸여 조심스레 그것을 살피는 파란머리 남자를 그리고 있다. 이 판타지적인 연출을 통해 그는 “현대의 젊은 세대와 베트남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사이의 관계를 비유하고 싶었다”고 전한다.
마니트 스리와니치품의 <Pink Man in Pradise #9>에서는 자국에의 반성을 느낄 수 있다. 핫 핑크색 공단 옷을 입고 빈 카트를 끄는 남자는 아름다운 사원을 앞에 두고도 허공만을 응시하고 있다. 사진 속 ‘핑크맨(Pink Man)’은 태국이 1997년 대대적인 경제 붕괴를 통해 ‘광적인 소비가 남긴 것은 빈 슈퍼마켓 카트’라는 교훈을 얻었음을 숨김없이 세상에 알리고 있는 것이다.
<Spray>도 베트남 농촌에 대한 강한 인상과 나지막한 염려를 남긴다. 말라죽은 경작지에 서서 공중에 농약을 흩뿌리는 성인 남자, 빈 밥그릇과 젓가락을 들고 카메라를 응시하는 아홉 명의 소년들. 사진 밖을 향한 스무 개의 눈동자는 환경과 가난에 대한 어렴풋한 암시만 줄 뿐 무슨 말을 하고픈지 가늠키 어렵다. 스스로를 진정한 농부라고 여겼다는 작가 쾅 판은 시골을 배경으로 그의 작품들을 “만화경을 보듯 스스로의 환상의 필터를 거쳐 봐 달라”고 당부할 뿐이다.
이밖에도 신문에 실린 사건, 사고를 젤라틴과 제철 음식으로 연출해 촬영하는 필리핀 작가 레나 코방방의 작품, 인도네시아 전통의상이 나란히 걸린 빨랫줄을 찍은 <Passing Under> 등 이국적 개성과 소소한 삶의 풍경을 담은 사진들이 리듬감 있게 이어졌다. 하나의 이름을 가진 대륙에서 태어나 서로 다른 나라에서 자라난 27명의 사진작가들은 저마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고, 그 나름의 가치를 골똘히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 내 나라에 던지는 문제의식, 낯선 나라를 방문한 후의 생각과 느낌. 글로 써도 모자란 이야기들이 모두 ‘사진’을 통해 전달될 수 있음이 놀랍지 않은가. 현실이되 가상을 좇는, 가상이되 재료는 현실인 사진 작품들은 마치 그 속에 무한의 레이어가 있는 듯 뜯어보고 꺼내볼수록 새로웠다.
서울에서 전주까지 두 시간 반, 전시장을 둘러보는 데에는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일단 호남선에 몸을 싣고 보자. 당신의 소중한 시간을 건넨 손바닥 위에는 10장의 아시아 여행 티켓이 차곡차곡 쌓여 돌아올 터이니 후회는 없을 것이다.

△전시 일시 : 10. 28 ~ 11. 27
△전시 장소 : 전주 전북도립미술관
△전시 가격 :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