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예술가 단체 '게릴라 걸스'

기자명 서준우 기자 (sjw@skkuw.com)

“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벌거벗어야만 하는가?”
1989년, 게릴라걸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포스터의 문구다. 그들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린 당대 최고의 근대미술전에 여성 예술가의 작품은 전체의 5%수준에 불과한 반면 여성의 나체를 묘사한 작품은 85%에 달하는 상황을 비판하고 나섰다. 제작된 포스터 속에는 앵그르의 작품 <그랑 오달리스크>의 나체 여성이 고릴라 마스크를 쓴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게릴라걸스는 익명으로 활동하는 여성 예술가 단체다. 일상에서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는 성차별, 인종차별을 폭로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 미니스커트에 망사 스타킹을 신고 고릴라 마스크를 뒤집어쓴 채 공공장소에 나타나는 게릴라걸스는 문화 전반에 밴 차별 논리에 반대하는 각종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전 방위적인 예술분야에 관한 △강의 △시위 △출판 △포스터 게시 등이 바로 그것이다.
스스로를 게릴라 ‘걸스’로 칭한 것은 재미난 모순이다. ‘girl’은 남성의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이라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지만, 오히려 성적 여성성을 연상케 함으로써 성차별적 사고에 대한 보다 노골적인 비판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미니스커트와 망사 스타킹을 착용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고릴라 탈은 구성원의 익명성을 지키기 위해 착용하는데, 이는 개개인의 활동보다 공동체의 이슈에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야기한다.
여성과 소수인종 등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그들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칭한다. 게릴라걸스의 공식 홈페이지에는 “성별이나 인종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볼 때 페미니즘은 세상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방법이다”라는 글귀가 게재돼 있다. 그들은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시선을 이해하지 못한다. 지난 수세기 동안 여성들이 남성, 그중에서도 특히 백인 남성들이 가진 권리와 특권을 누리지 못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며 현재까지도 그 문제들은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깨고 사회를 비꼬기 위해 선택한 가장 유리한 무기는 단연 ‘유머’다. 그들은 현실을 비판하되 해학을 잃지 않는 방식을 취한다. 고릴라 탈을 쓴 채 곳곳에 포스터를 부착하거나 전시회, 편지 쓰기 등의 활동을 하는 그들의 모습은 너무 무겁지 않게, 그러나 날카롭게 사회를 비판하며 페미니스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털어버리는 데 일조했다.
1985년, 몇몇 뜻이 맞는 사람들이 사비를 털어 포스터를 제작한 것으로 시작된 게릴라걸스의 활동은 이제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미술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이던 그들은 차츰 △낙태 △전쟁 △정치 △헐리우드 등의 다양한 이슈에도 눈길을 돌리고 있다. 이러한 변화 이유를 묻는 홈페이지 질문에 “흥미 있는 이슈들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그것들로 계속 이동할 따름”이라는 답변이 따라 붙는다. 가벼운 흥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마스크를 벗기엔 그들의 어깨가 많이 무거워졌다. 차별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나타나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직 무궁무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