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연예술기획가 고희경 인터뷰

기자명 엄보람 기자 (maneky20@skkuw.com)

지민섭 기자 jms2011@
관객은 완성된 공연만을 감상할 뿐 그 두꺼운 커튼 뒤에서 어떤 수고가 오갔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나라 공연 예술 1세대라 불리는 고희경 기획가는 젊음을 송두리째 그곳에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맘마미아>, <리골레토>, <라보엠> 등 예술의 전당에 묵직한 작품들을 성공리에 선보인 지 어언 23년. 이제는 신도림 ‘디큐브 아트센터’의 극장장이 된 그녀를 만나 공연예술의 오늘을 들어봤다.

엄보람 기자(이하 엄) 공연예술의 범주, 어디까지로 보면 좋을까
고희경 공연예술기획가(이하 고) 우선 ‘공연예술’이라고 하면 여러분들이 생각하실만한 모든 종류의 공연들이 다 들어가요. 연극이라든지 뮤지컬, 오페라나 무용, 발레, 클래식까지 모두요. 하지만 요새는 ‘퍼포밍 아트’라기보다는 ‘퍼포먼스’ 자체에 대한 연구가 많아요. 퍼포먼스는 관객에게 뭔가를 보여주는 행위, 예를 들면 강의 같은 것도 다 포함하는 거예요. 최근에 많이 하는 청춘 콘서트나 젊은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나는 꼼수다’ 이런 것도 일종의 공연으로 보기 시작한 거죠. 공연이면 공연, 대담이면 대담, 그런 경계가 많이 무너졌어요. 무대 위에 머물던 공연예술이 극장을 벗어나고 있는 것 같아요.

엄 공연 기획가로 일하게 된 계기와 경로가 궁금하다

지민섭 기자 jms2011@

고 정말 솔직하게 얘기하면 대학원에 떨어져서(웃음). 불문과 졸업 후에도 공부를 좀 더 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요. 막상 실업자가 돼서 생각해보니까 취직준비도 제대로 안했고 회사에 들어가기도 싫더라고요. 그러다가 예술의 전당이라는 데서 공채를 한다는 걸 알았어요. ‘여기가 뭐하는 데지, 그냥 회사는 아닌 거 같고, 예술적 조직인가’하면서 시험을 쳤죠. 그렇게 공채 1기로 들어가게 됐어요. 농담이 아니라 제가 그 때 얼마나 취직 준비를 안 했냐면 ‘전공 불문’이라는 말을 보고 진짜 ‘불문과’를 뽑는 줄 알고 속으로 반가웠다니까요(웃음). 그 정도로 아무것도 모르고 공연예술에 발을 들이게 됐죠.

엄 무대 뒤에서 꽃다운 나이를 다 바쳤다. 그만큼 일에 매력을 느꼈나
고 돈 얘기해야 하고, 치사한 얘기해야 하고, 굽실거려야 하는 게 바로 이 일의 현실이에요. 이번에 밥값을 줄 거야 말거야 하는 일로 다퉈야 된단 말이에요. 게다가 예술가라는 사람들은 다 현실에서 발이 떨어진 사람들이에요. 잘하는 사람은 요구사항도 엄청 많고 말도 안 들어요. 그렇게 골치를 앓는데도 사실 공연이 별로면 욕먹는 건 기획자고 박수를 받는 건 예술가들이잖아요. 억울할 법도 한데 전 그렇지가 않아요. 배우가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제대로 서비스를 하면 속 썩이던 거 다 잊어버리고, 박수를 치는 관객의 등을 객석 맨 뒤에서 보면서 그냥 너무 짜릿하고 행복해요. 그래서 계속 하나 봐요.

지민섭 기자 jms2011@
엄 공연 하나를 기획하는, 관객은 모르는 그 과정이 궁금하다
고 <맘마미아>기획을 예로 들어 볼게요. <맘마미아>처럼 외국에서 만든 작품을 우리나라에서 공연하려면 먼저 원 저작권사와 협상을 해야 해요. 그게 끝나면 전체 예산을 짜고, 극장 대관과 캐스팅을 하기 시작하죠. 연출과 음악감독, 배우, 오케스트라, 각종 무대 스탭들까지 다 같이 일정을 잡으면 진짜 연습에 돌입하고 그 때부터 공연까지는 순식간이에요. 이밖에도 언론에 보도 자료를 내고, TV 광고도 만들고 하는 홍보 작업도 병행해야 해요. 표 파는 에이전시와 계약을 하고 할인율과 가격 책정하는 일도 여기에 포함되지요. 공연이라는 게 현장성 때문에 사고도 엄청 많이 나서 중간 중간 배우관리에도 신경 쓰고 사고 수습도 해야하죠. 공연이 종료돼도 처음의 목표를 얼마만큼 달성했는지 점검까지 다해야 끝나는 거예요. 그렇게 동시에 몇 작품이 돌아가고 있죠. 한쪽에서는 다음 것을 연습하고, 3년 후에 할 작품 저작권 협상하고 있고, 이런 식으로 쉴 틈 없이 돌아가는 게 공연 기획이에요.

엄 우리나라 공연예술만의 장점이 있을까? 반대로 고질적인 단점은 무엇인가
고 우리나라는 개인 아티스트들의 기량이 특히 뛰어나요. 이미 세계적인 스타급 예술인들이 많이 나왔다는 게 강점이죠. 예전에는 아예 어린나이에 유학 가서 반짝 빛난 경우가 많았다면 요새는 한국 본토에서 배워서 세계시장에 먹히는 그런 젊은 친구들이 상당히 많이 나오고 있어요. 아쉬운 점은 공연예술이라는 건 협력 작업인데 우리나라가 이 부분이 좀 약해요. 위계질서 인정이 잘 안되기 때문이에요. 고지식하고 사회적 위계가 강한 거 같으면서도 그걸 진심으로 존중하지는 않아요. 연출자든 유명 배우든 그들이 그 자리에 있기 위해 치르는 엄청난 양의 대가로 그만한 돈과 존중을 받아야 해요. 그래야 그들도 진정한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거든요.

엄 예술의 전당을 떠나 신생 극장 ‘디큐브 아트센터’에 뛰어든 이유는

지민섭 기자 jms2011@

고 여건 좋은 곳에서 규모 있는 작품들을 여럿 하고 나니까 이젠 할 수 있는 건 다 했단 생각이 들었어요. 좀 새로운 일을 하고 싶더라고요. 그때 이쪽에서 제안이 왔어요. 지금 극장자리는 원래 연탄 공장단지였어요. 우리나라 경제 성장의 빛과 그늘이 여기 다 있다고 할 수 있죠. 근데 그 한복판에다 공연장을 짓는다는 거예요. 엉뚱하다고 생각하니까 하고 싶어졌어요. 전혀 새로운 일을 하고 싶다는 개척자 심리를 자극했던 거 같아요.
근데 막상 오니까 정말 엄청났어요. 공연 전문가가 오셨으니까 다 알아서 하시라면서 도면을 던져주시는 거예요. 어디가 앞인지 뒤인지 그런 것도 모르는 사람한테(웃음). 근데 거기서 “어우 저 이런 거 몰라요”하면서 뒷짐을 지기는 싫었어요. 일하면서 만난 경험 많은 분들을 꾀어서 도움도 많이 받았고, 현장의 목소리를 담으려고 최대한 노력을 했어요. 결과적으로 내가 20년 넘게 극장에서 근무한 모든 현장 경험의 총화가 바로 여기에 결집됐어요. 손 안 간 데 없이 정말 소중한 곳인데 외부 평가도 좋아서 다행이에요.

엄 뮤지컬 티켓 ‘10만원의 벽’을 허물었다. 부담스런 가격, 부득이한 문제일까
고 R석이 9만 원대로 떨어진 게 실로 오랜만이죠. 뉴스가 될 정도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에겐 진짜 비쌀 수 있어요. 뮤지컬의 경우 공연 한 번에 동원되는 사람이 최소 100명이에요. 영화는 필름을 계속 카피해서 돌리면 되는데 이건 그럴 수가 없죠. 공연예술은 극도로 수공업적인 산업이에요. 60년대 미국의 경제학자가 공연예술에 대해 쓴 책 제목이 『Performing Arts Economic Dilemma』예요. 관객이 늘어나도, 공연 하나를 오래해도 가격을 낮출 수 없어서 이건 그냥 국가가 지원할 수밖에 없단 게 책의 결론이에요. 저희 극장이 그나마 9만원까지 내린 건 한 작품의 공연 기간을 6개월로 늘리고 신생극장이라 대관료가 다른 데에 비해서는 조금 싼 덕분이에요. 무엇보다 제작을 맡은 신시컴퍼니 박명석 대표가 “좋은 환경에서 공연을 하게 됐으니까 관객한테 돌려줘야 된다”고 해서 이렇게 결정할 수 있었어요.

엄 공연예술 분야로 진로를 희망하는 20대가 많다. 조언을 해주신다면
고 입문에 특별한 루트가 없어요. 특별한 자격시험도 없을 뿐더러, 아주 드물게 공채를 하기도 하지만 수시로 뽑지도 않고 경쟁률도 엄청나요. 너무 시시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저는 고전을 꼭 읽었으면 좋겠어요. 세상의 얘기들은 결국 여러 스타일로 변주된 고전이거든요. 예를 들어 <라이온킹>이라는 작품의 원형은 『햄릿』이에요. 삼촌이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결국은 아들이 성장하는 드라마요. 길게 살고 보니까 젊을 때 읽어둔 고전이 언제, 어디가 되든지 반드시 힘을 발휘한단 걸 느껴요. 사실 마케팅이나 경영, 이런 건 계속 바뀌어요. 전략과 기술에 관한 거니까. 근데 기술은 품성을 이기지 못해요. 이번 아트센터 지으면서도 한 말이 “전문가? 품성 좋은 사람이 전문가다!”였어요. 매사에 열정을 가지고 하려고 덤비는 사람들이야말로 결국 자기 안에서 뭔가를 만들어요. 원론적인 작품들을 많이 접하면서 그 품성을 길렀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