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곤충학

기자명 김은진 기자 (eun209@skkuw.com)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 현장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마땅한 증거는 찾을 수 없었고, 시신은 방치된 지 꽤 오래돼 보였으며 주위에 파리 같은 벌레들이 꼬여 있을 뿐 사망 시각을 추정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아직 실망하기엔 이르다. 시신 주위에 모여든 이 ‘파리 같은 벌레’가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West lands police
혹자는 벌레가 사건 해결에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벌레, 즉 곤충들이 시체의 사망 시각을 추정하는 데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곤충에게 동물의 시체는 훌륭한 먹잇감이기 때문에 시체가 방치된 시간에 따라 △검정파리 유충 △검정파리 구더기 △송장벌레 △거미류 등이 순서대로 모여든다. 이런 특성을 바탕으로 시체와 관련된 곤충들을 이용해 법의학적 해결을 연구하는 분야를 법의곤충학(Forensic Entomology)이라 한다. 즉, 법의곤충학은 시체가 부패한 시간에 따라 시체에 기생하는 곤충들의 크기와 발달 상태를 관찰해 시신의 사망 시간을 역추적하는 학문을 말한다.
박규택 씨가 쓴 책 『자원곤충학』에 의하면 법의곤충학이 도입된 첫 번째 수사는 1855년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났다. 어떤 집의 석고벽에서 한 소년의 시체가 발견됐는데 수사관은 시체에 모여든 곤충들을 보고 시체가 사후 7~8년 정도가 지난 것으로 추정했다. 그 결과 범인은 당시 집주인이 아닌 전 주인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를 시작으로 최근에는 영국에서 법의곤충지침서가 출간되고 미국연방수사국에서 법의곤충전문가가 고용되는 등 법의곤충학이 활발히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국내에서는 연구가 미비하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국립생물자원관은 올해부터 실제 사건 수사에 도움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법의곤충연구를 시작했다.
현재 국립생물자원관에서는 돼지나 닭의 사체를 이용해 부패 실험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곤충연구팀 박선재 박사는 “특정 시간과 환경을 설정한 후 어떤 곤충들이 몰려드는지 조사해서 사망 시각을 추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실험이 단발성으로 끝나면 자료로서의 가치가 없기 때문에 지속적인 연구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곤충을 이용해 시체의 사후 경과 시간 외에 사망 원인이나 시신의 이동 여부도 알 수 있다. 고려대학교 법의학 연구소 신상언 박사는 “독극물로 살해된 시신의 경우 혈액을 채취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됐을 때 시신에 기생하는 곤충을 통해 독극물의 성분을 확인할 수 있다”며 “또 야외에 버려진 시체 주위에 실내에서만 사는 곤충이 발견됐다면 그 시체는 살해 후 이동됐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법의곤충학을 수사에 적용하기 위해 필요한 데이터를 구축하는 데 적어도 3~4년 정도가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연구의 어려움에 대해 신상언 박사는 “부패한 시체에서 냄새가 나다보니 적당한 실험 장소를 찾는 것이 어렵다”며 열악한 실험 환경을 지적했다.
한편 박선재 박사는 “곤충이 시체를 훼손시킨다고 생각해 살충제로 죽이는 경우가 많다”며 아직은 법의곤충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을 아쉬워했다. 이를 보완하고자 올해 현장 검시관들을 위한 안내서가 작성됐고 법의곤충학 관련된 국내 서적 또한 발간될 예정이다. 아직 불모지에 불과한 국내의 법의곤충학이 머지않아 사건의 진실을 말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