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우수 (법04)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그 남자의 매력

수업을 잘못 선택했다. 제기랄, 수강신청 기간은 이미 끝났는데 어쩌자고 예술과 철학을 선택했을까? 돈벌이, 심지어 밥벌이도 안 되는 학문을. ‘현대예술철학의 이해’는 이해는커녕 짐작도 안 된다. 당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교수 강의가 제2외국어처럼 들린다. 예술에도 철학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기분 좋을 때 귀를 쓰면 음악이고, 손을 쓰면 회화고, 몸을 쓰면 무용 아닌가. 이렇게 간단한 것을 철학이 어렵게 만들었다. ‘현대예술의 이해’만 됐어도 들을 만했을 텐데.
나는 1시간 15분 동안 딴생각에 빠졌다. 집에서 자는 생각, 맥주를 마시며 텔레비전을 보는 생각, 여자 친구를 사귀어 데이트하는 생각 등. 행복한 생각만 하니 시간이 금방 갔다. 역시 현실이 힘들 때는 희망이 필요하다.
수업이 끝나고 교수가 중간고사에 대해 말했다. 조별과제란다. 네다섯이 한 조가 되어 철학자의 예술 사상에 대해 조사하란다. 나는 숨이 막혔다. 눈앞이 막막했다. 수업에 친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혼자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는 그나마 친분이 있는 정하에게 다갈까 생각했다. 정하도 나를 의식했는지 주위를 둘러보는 척하며 힐끔했다. 먼저 다가가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같이할 사람이 없어 굽실대는 모습이 창피했다.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사람이 없으면 혼자 하면 된다.
나는 혼자 있는 모습이 싫어서 엎드렸다. 사방은 조를 짜는 학생들 탓에 시끄러웠다.
누가 어깨를 두드렸다. 일어나 보니 정하였다.
“선배, 같이하실래요?”
뜻밖의 행운.
“그, 그래? 나야 좋지 뭐. 근데 나 혼잔데.”
“괜찮아요. 저도 혼자예요.”
몇 달 만에 나눈 대화였다. 같은 과, 같은 학회 후배지만 대화한 적이 드물었다. MT를 가도, 술자리를 가져도 정하와 나는 사이가 멀었다. 내가 대한민국이라면 정하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르헨티나, 내가 북극곰이라면 정하는 남극펭귄이었다. 서로 존재는 알지만 어떤 교류도 갖지 않은 사이. 이번 수업에서도 그랬다. 나는 정하와 몇 번 눈이 마주쳤지만 인사하지 않았다. 인사할 만큼 친하지 않았고, 인사를 해야 한다면 선배인 내가 아니라 후배인 정하가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예의고 도리 아닌가. 나는 평소 나를 모른 체하던 정하가 괘씸했지만 이번만큼은 반가웠다. 정하가 없었다면 나는 과제를 혼자 했을지도 모른다. 정하는 나의 구세주였다.
강의실은 조용해질 줄을 몰랐다. 여기저기서 인사가 오갔고, 핸드폰 번호가 교환됐고, 과제 회의가 시작됐다. 정하와 나만 단 둘이었다. 정하는 남은 사람이 없나 둘러보며 발만 굴렀다. 몇몇 학생이 혼자 멀뚱댔지만 정하는 다가가지 않았고 그쪽도 다가오지 않았다. 같이할 사람이 없으면 먼저 다가오면 될 것을, 모두 눈치만 보았다. 저렇게 용기가 없고 줏대가 없다니. 나는 혼자 있는 사람들이 듣도록 말했다.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좀 그렇다. 두세 명만 더 있으면 좋을 텐데.”
의도적으로 크게 말했다.
“예. 그러게요.”
정하가 말했다.
내 말을 들었는지 한 여학생이 다가왔다. 기왕이면 예쁘기를 바랐는데 못생긴 얼굴이었다. 옷차림은 80년대 수준. 접어 올린 청바지가 우스꽝스러웠다.
“저, 사람 없으면 같이해도 될까요?”
여학생은 정하와 내게 동시에 말했다. 눈은 나를 향했으나 말은 정하를 향했다. 정하와 나는 누가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내가 가만있으니 정하가 말했다.
“예, 그러세요. 저희도 사람 찾고 있었거든요.”
나는 여학생의 눈초리가 따가워서 시선을 피했다. 여학생은 나를 경계하는 듯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부탁하는 처지에 태도가 불순해서 기분 나빴지만 내칠 수는 없었다. 원래 여자는 남자를 경계하는 법이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남학생 한 명이 더 붙어서 총 네 명이 되었다. 예쁜 여학생이 없어서 아쉬웠지만 조를 만든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면식 있는 정하까지 함께하니 만족스러웠다. 왠지 과제 수행을 잘해서 높은 점수를 받을 것 같았다. 예감이 좋았다. 정하야 꼼꼼하니까 문제없고, 여학생은 첫인상이 나빴지만 덜렁대지 않을 듯했다. 늦게 합류한 남학생도 성실해 보였다.
“그럼 저희 뭐 할지 일단 정할까요?”
여학생이 말했다. 모두 첫 만남에 어색해하다가 그 말에 분위기가 잡혔다.
“네, 그래요. 여기 교수님이 말한 철학자 중에 한 명을 골라야 하니까….”
정하가 공책에 적은 철학자 명단을 보였다. 역시 꼼꼼한 정하. 모두 공책을 보며 열심인 척하길래 나도 고개를 빼고 명단을 살폈다. 하이데거, 들뢰즈, 벤야민, 보드리야르 등 처음 듣는 이름만 수두룩했다. 남학생이 말했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에 대해 조사하는 게 어떨까요? 현대 사회에서 많이 이슈화되고 있고 자료 찾기도 쉬울 것 같은데.”
여학생이 말했다.
“제가 시뮬라시옹 책 읽어봤는데 내용도 좀 모호하고 우리 수업이랑 관련된 점을 찾기 힘들 것 같아요. 또 시뮬라크르랑 시뮬라시옹 이론은 이제 흔하잖아요. 아까 다른 조 얘기하는 거 들어보니까 이거 하는 거 같던데. 저희는 좀 특별한 거 하면 안 될까요?”
정하가 말했다.
“뭐가 특별할까요?”
여학생이 말했다.
“음. 들뢰즈 어때요? 들뢰즈 미학이 좀 파격적인 측면도 있고 관련된 분야가 많잖아요. 이 사람이 영화도 공부했었고, 또 프랑스 어디 경매에서 베이컨 그림이 최고 가격에 낙찰됐다고 하더라구요.”
모두 말이 없었다. 침묵. 여학생이 말했다.
“베이컨 아시죠? 현대회화의 괴물이라 불리는….”
남학생이 말했다.“영국 철학자?”
“아뇨. 프란시스 베이컨이요.”
“아하. 그 베이컨.”
남학생이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베이컨’이라고 하길래 먹는 베이컨인 줄 알았다.
의견 개진이 없자 여학생이 계속 말했다.
“아니면 리오타르 어떨까요? 제가 평소 관심도 있었고 교수님도 수업 때 리오타르 얘기 많이 하셨잖아요.”
정하가 말했다.
“숭고의 미학이라는….”
여학생이 말을 가로챘다.
“네! 저도 예술은 숭고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뭐다 해서 다양성이 극단으로 치달았잖아요. 변기통에 이름만 붙이면 예술이 되는 세상에…. 이럴 때일수록 숭고함이 더더욱 필요하죠.”
모두 여학생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괴물보다 숭고가 학점 받기에 유리할 듯했다. 숭고함은 진지함을 유발하니까. 진지한데 낮은 점수를 받을 리 없다.
남학생이 말했다.
“저도 리오타르 괜찮을 것 같아요. 형은 어떠세요?”
남학생은 초면인 나를 형이라고 불렀다. 내가 나이가 들어 보인 탓일까. 자기가 어리다고 장담한 덕분일까.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 ‘그쪽’ ‘당신’ ‘누구 씨’보다 ‘형’이 친근감 있으니까. 남학생은 예의와 도리가 무엇인지 아는 듯했다. 나는 들뢰즈가 누구고 리오타르가 뭐 하는지도 몰랐지만 아는 척했다.
“들뢰즈보다는 리오타르가 낫죠. 현 시점에서, 음 그러니까 예술사에서 그 숭고의 미학이 시사하는 바가 많잖아요.”
“그쵸. 많죠.”
남학생이 맞장구치는 바람에 말을 그칠 수 없었다.
“그래서 뭐 하이데거의 작품 속 진리에 대한 존재성이나 보드리야르의 시뮬라르크 같은 거는….”
“라르크 아닌데 시뮬라크르인데.”
여학생이 말했다. 나는 내가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줄 알았다. 명칭 하나 틀린 것 가지고 지적하니까 머쓱하면서 불쾌했다.
“예. 시뮬라르, 아니 시뮬라크르. 어쨌든 제 말은 리오타르가 가장 좋을….”
“그럼 반대 의견은 없으시죠?”
여학생이 내 말을 끊었다. 지적한 마당에 발언권까지 중단하다니. 나는 불쾌했다. 아는 후배였다면 혼을 내주고 예절 교육을 했을 테다. 정하가 내 기분을 알아챘는지 말했다.
“그니까 선배도 리오타르가 좋다는 거죠?”
“그렇지.”
나는 대인배(大人輩)처럼 미소 지으며 답했다.
회의가 끝나고 각자 흩어졌다. 여학생은 바쁜 일이 있는지 인사도 안 하고 갔다. 남학생은 만나서 반가웠고 다음에 보자며 인사하고 갔다. 나도 공손하게 인사해주었다.
정하와 나만 남았다. 강의실을 나오며 정하가 말했다.
“수업 있으세요?”
“아니, 없는데. 왜?”
“점심은요?”
같이 먹자고 할 기세였다. 나는 같이 먹기 싫어서 약속 있다고 둘러댔다. 정하랑 먹으면 관습상 선배인 내가 계산해야 하는데, 관심도 없는 정하에게 돈 쓰고 싶지 않았다. 정하는 연애 충동을 일으킬 만한 후배가 아니었다. 여자로 보고 싶어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말 하기 뭣한데 여자를 예쁜 쪽과 못생긴 쪽으로 나누면 정하는 후자에 속한다. 누가 봐도 동의할 것이다. 남자는 보는 눈이 똑같으니까. 내가 봐서 예쁘면 쟤가 봐도 예쁘고, 내가 봐서 못생기면 쟤가 봐도 못생기다. 나는 정하 얼굴을 보며 정하에게 왜 남자 친구가 없는지 알 것 같았다. 사실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알기 위해 물을 필요도 없다. 없다는 데 확신한다. 남자 눈은 똑같으니까.
뒤에서 누가 불렀다.
“쩌기요.”
돌아보니 뚱뚱한 남학생이 서 있었다. 키가 작고 얼굴에 여드름이 많았다. 운동을 했는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정하와 내가 말없이 쳐다보자 그는 몸을 떨면서 말을 더듬었다.
“저는 주, 중국 학생인데요. 효, 횬대예쓸초락 가치 해도 돼요?”
발음은 엉성했으나 뜻은 명확했다. 자기는 중국 학생이라서 친구가 없으니 껴 달라는 말이었다. 그는 정하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 눈빛은 아까 여학생과 다르게 정겨웠다. 맹한 듯하면서 호소력 있었다. 나는 그에게 연민을 느꼈다. 거절하면 천하의 나쁜 놈이 될 것 같았다. 정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나를 봤다. 나는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가여운가. 조국을 떠나 이방인의 신분으로 힘들게 공부하는 학생이다. 비교는 안 되지만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 생활 하는 나는 그와 동병상련이었다.
“그럼요. 같이해요.”
내가 말했다. 그의 표정이 밝아지더니 초초해하던 모습이 온데간데없어졌다.
“고맙습니다. 캄사합니다.”
그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정하와 나는 부담스러워서 그를 말렸다.
우리는 승강기를 탔고 중국 학생은 계단으로 내려갔다. 헤어지기 전에 그는 몇 번 더 인사했다. 우리를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부른 조상의 후예가 동방예의지국에 건너와 동방예의지국의 자손에게 예의를 표하다니. 이제 우리가 그들을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러야 할 판이었다. 나는 뿌듯했다. 내가 아니었다면 그는 과제를 혼자 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사귀지 못하고 수업을 겉돌다 중간에 철회했을지도 모른다. 한국에 적응하지 못해 인생을 비관하고 자살했을지도 모른다. 억측이 아니다. 실제 그런 일이 있었다. 한 유학생이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서관 옥상에서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경찰 구조 끝에 목숨은 건졌으나 파장은 컸다. 학교 측은 그를 징계했고, 중국 학생을 차별하지 말자는 대자보가 곳곳에 붙었다.
내가 그의 목숨을 살렸다. 내 호의와 결정이 한 인생을 바꾼 것이다. 나는 아까 여학생 때문에 언짢았던 마음에서 해방되었다.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고 느꼈다.
정하가 말했다.
“저희 마음대로 결정해도 돼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데….”
“괜찮아. 내가 다 말할 테니까. 우리가 뭐 나쁜 짓 한 건 아니잖아. 안 그래?”
“나쁜 짓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 의견도 들어봐야….”
“에이. 듣긴 뭘 들어. 인원 초과한 것도 아니고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우리한테 이득인데 누가 반대해?”
정하는 듣기만 했다.
“그리고 저런 유학생들 우리라도 잘 대해주지 않으면 안 돼. 타국에서 외롭게 공부하는 학생들이잖아. 그런데 무시하고 깔보면 되겠어? 엉?”
“무시하고 깔보는 게 아니라….”
“우리는 안 그런다 해도 쟤들은 그렇게 느낀다니까. 어, 이건 마치 뭐랄까. 성희롱 같은 거지. 당사자는 그냥 던진 농담이라도 듣는 사람, 피해자 입장에서는 그게 상처가 될 수 있다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네.”
정하도 내 말에 공감하는 듯했다.
승강기가 1층에 도착했다. 정하는 식당으로, 나는 학회실로 향했다. 정하 말고 괜찮은 여후배가 있으면 같이 밥 먹을 생각이었다. 없으면 아무 남자나 붙잡으면 되고.
헤어지고 가는데 멀리서 정하가 말했다.
“선배, 이따 올 거죠?”
무슨 말인지 몰라서 물었다.
“어딜?”
“개강 파티요. 오늘 하잖아요.”
“개강 파티? 무슨?”
“저희 학회요. 연락 못 받았어요? 며칠 전에 학회장한테 문자 왔는데.”
“문자? 난 못 받았는데. 학회장이 누구였더라?”
“용희요.”
“용희? 걔가 누구지?”
“07학번 권용희요.”
“아, 용대가리! 뭐야 근데 왜 나한테는 연락 안 했지?”
“깜박했나 봐요. 실수인지도….”
“실수는 개뿔. 학회 사람이 몇 명이나 된다고.”
“암튼 오실 거죠?”
나만 연락 못 받았다니 심술이 났다. 자존심 상해서 간다고는 하지 않았다. 생각해본다고 했다.
학회실에 가니 낯선 얼굴이 많았다. 신입생인 듯했다. 남자와 여자가 짝을 지어 소파에 앉아 떠들고 있었다. 선배가 왔는데도 쳐다볼 뿐 인사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는 누구인데 학회실에 맘대로 들어오느냐는 눈빛이었다. 나는 기분 나빠서 인상을 쓰고 구석에 놓인 간이 의자에 앉아 잡지를 보았다. 떠들썩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남자애들은 침묵했고 여자애들은 속닥거렸다. 이쯤 되면 선배인 줄 알고 인사할 법한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개강 파티 때 학회장을 조지고 신입생 예절교육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학회장 용대가리였다.
“많이 기다렸지? 빨리 밥 먹으러 가자.”
용대가리는 내가 보이지 않는지 신입생만 챙겼다. 개중 한 여자애가 말했다.
“선배님이 쏘시는 거죠?”
목소리에 비음이 가득했다. 자기한테는 귀여울지 몰라도 남한테는 거북한 목소리였다. 면상을 보니 더 거북했다. 돼지 같은 얼굴에서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오지? 생존을 위한 본능인가? 나는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럼. 근데 너희 다 사주면 돈이 많이 드니까 그냥 싼 거, 오늘은 학식 먹자. 다음에 맛있는 거 사줄게.”
여기저기서 아쉬움이 들렸다. 신이 나서 비음을 선보이던 여자애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돼지의 본색이 드러나는 듯했다. 하기야 학식은 네 위장을 채우기에 부족하지. 내가 잡지를 내려놓고 헛기침하자 용대가리가 나를 알아보았다.
“어, 선배님. 어쩐 일로….”
“왜? 나는 학교 오면 안 되냐?”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너무 오랜만이라서…. 복학하셨어요?”
“그래.”
“아 그렇구나. 저는 워낙 연락이 없으셔서 졸업하신 줄 알았어요.”
“연락은 니가 없었지.”
“네? 무슨….”
“오늘 개강 파티 한다매?”
“네. 오늘 여섯 시에 할매에서…. 혹시 제가 연락 안 드렸나요?”
“어.”
“이상하네. 전체 문자 돌렸는데.”
“너 나한테만 안 보냈어.”
“정말요? 잠시만요.”
용대가리가 핸드폰을 꺼내 문자 내역을 살폈다.
“아, 죄송해요. 진짜 죄송해요. 제가 모르고 선배님 번호를 학회 그룹에다 저장 안 해놨어요. 아, 왜 이랬지?”
번호를 삭제한 것은 아니냐고 물으려다가 신입생도 보고 있기에 참았다. 용대가리는 넉살로 상황을 무마했다.
“헤헤. 저희 지금 밥 먹으러 가는데 선배님도 함께하실래요?”
“쟤넨 누군데?”
내가 턱짓으로 신입생들을 가리켰다.
“얘네 11학번들….”
용대가리가 말을 흐리며 눈치를 보았다. 내가 인상을 쓰고 헛기침하자 용대가리가 상황을 파악했다. 인사하지 않은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용대가리가 군기를 잡았다.
“야, 니들 선배님한테 인사 안 했어?”
신입생들이 졸아서 가만있었다. 발광하던 돼지도 숙연해졌다.
“빨리 인사 드려. 여기는 03학번 유성민 선배님.”
신입생들이 줄을 서서 한 명씩 인사했다. 하나가 인사 끝내고 뒤로 가면 다음이 나와서 인사했다. 나는 인사 받기 귀찮다고 손짓했다. 돼지가 가장 열심히 인사했다. 서열과 식생활의 연관성을 생각한 모양이다.
용대가리가 말했다.
“선배님, 그럼 같이 식사하시러….”
“됐어. 니들끼리 가, 인마.”
가고 싶었으나 가지 않았다. 예쁜 신입생을 발견해서 가고 싶었으나 눈치 없다는 소리 들을까봐 가지 않았다. 이름이라도 물어볼걸. 그 애는 보슬이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용대가리가 신입생들과 나가고 나 혼자 남았다. 학회실은 썰렁했다. 배는 고프고 밥 먹을 사람은 없었다. 몇 년 전만 해도 흔했던 고학번이 증발했다. 직장으로, 대학원으로, 해외로 날아간 것이다. 나는 절망과 고독을 느꼈다. 실존적으로 혼자가 된다는 것이 이런 기분인가? 씁쓸하면서도 내가 대단한 인간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라는 존재가 인생의 무게를 홀로 감당하고 있는 느낌. 나는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떠올렸다. 신 앞에 선 단독자.
고독은 길고 착각은 짧았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밥 먹을 사람을 찾아보았다. 신이고 나발이고 나는 배고픔 앞에 선 단독자였다.
밥 먹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인간관계가 이렇게 협소할 줄은 몰랐다. 행정고시 본다고 반년 휴학했으니 연락할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동기는 모두 학교를 떠났고. 정하에게 연락했다. 자존심 상했지만 정하밖에 없었다.
정하가 전화를 받았다.
“어, 선배. 웬일이세요?”
“너 지금 밥 먹고 있니?”
“예. 막 식당 도착했는데. 왜요?”
“먹고 있어? 밥 탔어?”
“아뇨. 이제 식권 뽑으려구요. 오게요?”
“아니, 그건 아닌데. 혹시 너 혼자 먹니?”
“예.”
“그래? 그럼 잘됐다. 나랑 같이 먹자.”
용대가리와 신입생들이 교내 식당에 갔으므로 정하를 꼬드겨 학교 밖으로 나갔다. 안 간다고 했는데 마주치면 창피하니까.
잘하는 찌갯집에 갔다. 정하는 김치찌개를, 나는 된장찌개를 시켰다. 막상 마주보고 앉으니 할 말이 없었다. 원래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정하도 어색한지 물만 마셔댔다. 내가 말 걸지 않으면 끝까지 침묵할 기세였다. 나는 딴 데 보는 척하며 정하 얼굴을 살폈다. 찢어진 눈, 납작한 코, 돌출한 광대. 어디 하나 예쁜 구석이 없었다. 괜찮은 곳을 집는다면 피부 정도. 피부만큼은 누구보다 우월했다. 관리 받는 연예인의 피부처럼 환하고 투명했다. 못생긴 얼굴이 피부 덕분에 비호감(非好感)을 면하는 듯했다.
누가 데려갈까? 결혼은 할 수 있을까? 내 걱정 하기도 바쁜데 정하 앞날이 걱정됐다. 좋은 집안에서 자라도, 좋은 대학을 나와도, 좋은 직업을 가져도 여자는 못생기면 꽝이다. 차라리 고졸에 가난한 백수이더라도 미인이 낫다. 여자의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얼굴 한 방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선배는 앞으로 뭐 할 거예요?”
난데없는 질문에 놀랐다. 얘가 독심술이라도 쓰나? 그럼 너는 얼마나 잘났는지 들어보자, 라는 말로 들렸다.
“나? 그냥 뭐 취직해야지.”
“어디요? 일반 회사?”
“아니. 사실 나 금감원 준비하고 있어.”
“와. 거기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던데.”
“뭐 세상에 안 어려운 게 어딨겠어. 쉬우면 개나 소나 다 들어가지.”
“제 친구도 거기 준비하고 있거든요. 전에 시험 봤다가 떨어졌는데 지금은 약간 포기 상태예요. 경제학 전공하는 앤데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많으니까 자기도 힘들다고 하더라구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지. 그리고 꼭 경제 전공했다고 유리한 건 아니야. 우리 학교에도 작년에 들어간 사람 있잖아, 신방과 학생.”
“으음. 그럼 선배 휴학하는 동안 그거 공부한 거예요?”
휴학 얘기는 하지 말기를 바랐다.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다른 사정도 있었고.”
실은 행정고시를 준비했다. 힘들어서 포기했지만.
“아, 그랬구나. 전 갑자기 학교에서 안 보이길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넌 뭐 할 건데?”
“저는 대학원 생각하고 있어요.”
“대학원? 교수 되게?”
“아뇨. 꼭 교수 하고 싶다기보다 공부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무슨 공부?”
“미학이요.”
“미학? 그거 예술 뭐 그런 거지?”
“네. 저희 듣는 수업이랑 비슷한 거예요.”
“근데 그거 공부해서 뭐 하게?”
“뭘 한다뇨?”
“아니, 내 말은 공부하는 목적이 있어야 될 거 아니야. 대부분 교수 되려고 대학원 가지 않나?”
“그렇긴 하죠. 근데 전 아직 직업적인 건 생각 안 해봐서. 일단 더 공부하고 싶을 뿐이에요.”
정하의 전망을 들으니 갑갑했다. 내 걱정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얼굴도 못생긴 애가 미래도 불투명하다니. 교수될 마음도 없이 충동적으로 공부하겠다고? 내가 정하 아빠였다면 당장 말렸을 것이다. 남의 집 딸은 대기업 취업해서 돈 잘 벌고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하는데 내 딸은 자기 주제도 생각 못 하고 공부만 하겠다니 어떤 아버지가 분통 터지지 않겠는가. 나는 선배로서 충고하려다가 말았다. 음식이 나왔기 때문이다.
양은에 담긴 찌개가 끓었다. 뜨거워서 바로 먹지 못했다.
“넌 김치찌개 좋아하나 보네?”
내가 물었다.
“아뇨. 뭐 좋아한다기보다….”
“이 집은 원래 된장찌개가 유명한데.”
“실은 된장 잘 못 먹어요.”
“엥. 왜?”
“어렸을 때 먹다 체한 적이 있어서 그 뒤론….”
“오홍. 가슴 아픈 추억이구나. 여기 된장 맛을 느끼지 못한다니 내가 다 슬프다.”
한동안 말없이 먹었다. 나는 정하 앞이라서 체면 차리지 않고 먹었다. 쩝쩝 소리도 내고, 훌쩍 콧물도 마시고, 꺼억 트림도 했다. 보슬이 앞이었다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 03 애들 많이 오려나?”
휴지로 코를 닦으며 말했다.
“정욱 오빠랑 용섭, 진표 선배 올걸요.”
정욱 오빠? 얘가 언제부터 정욱을 오빠라고 불렀지? 나한테는 선배라고만 하면서. 별것도 아닌데 심술이 났다. 솔직히 선배보다 오빠 소리 듣는 편이 좋다. ‘선배’는 딱딱하고 형식적이니까.
“03이라고 해봤자 몇 명 없으니. 근데 정욱이 온대?”
“네. 올 거예요.”
정욱만큼은 오지 않기를 바랐다. 정욱은 내 동기인데 작년에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겨서 여자한테 인기가 많다. 학교에 합격 축하 현수막이 걸린 날 나는 학회실을 들르지 않고 집에 왔다. 정욱이 축하 받으며 즐거워하는 꼴을 볼 수 없었다. 나보다 입학 점수도 낮고 학점도 낮은 녀석이 고시에 합격했다는 사실이 아니꼽고 버거웠다. 무엇보다 정욱은 사무관이 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그릇이 있는데 내가 보기에 정욱의 그릇은 작았다. 작은 그릇이 어찌 국가 행정을 담당하는 관리가 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때부터 정욱을 피하기 시작했다. 정욱이 있는 모임이나 자리는 되도록 불참했다. 내가 휴학하고 행정고시를 준비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정욱이 합격했다면 나도 합격하리라 생각했다. 나는 정욱보다 그릇이 크니까.
밥을 먹고 정하와 헤어졌다. 계산이 걱정이었는데 각자 계산했다. 더치페이(dutch pay)한 셈이다. 나는 정하가 사 달라고 할까봐 조마조마했다. 정하는 계산대 앞에서 카드를 꺼내더니 자기 것은 자기가 계산하겠다고 말했다. 카드 긁는 모습을 보며 나는 정하가 착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여자들은 남자한테 얻어먹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정하는 그들과 달랐다. 얼굴만 좀 예쁘면 괜찮았을 텐데. 나는 아쉬움이 들었다.
도서관은 한산했다. 학기 초라서 그런지 공석이 많았다. 나는 도서관을 한 바퀴 돌며 예쁜 여자를 찾았다. 기왕이면 남학생보다 여학생 근처에 앉고 싶었다. 구석에 자리한 넓은 책상에 한 여학생이 앉아 있었다. 살색 스타킹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다리를 꼬고 앉은 모습이 요염했다. 옆이나 맞은편에 앉고 싶었지만 속 보일까봐 떨어져 앉았다. 가방을 내려놓으며 책상 밑으로 다리를 훔쳐봤다. 가느다란 발목과 탱탱한 허벅지가 예뻤다. 다리를 떠는데 그에 따라 내 심장도 쿵쾅거렸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는 척하며 또 봤다. 여학생이 알아챘는지 나를 째려보며 다리를 모았다. 나는 무안해서 책 읽는 시늉을 했다.
10분 앉아 있는데 졸음이 왔다. 배가 부르고 몸이 따뜻했던 탓이었다. 창밖을 보니 햇살이 창을 투과해 내 등에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책을 덮고 엎드렸다. 잠깐 눈 붙일 생각이었다.
자는데 누가 나를 깨웠다. 고개를 드니 웬 남학생이 인상을 쓰고 있었다.
“저기요.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집중을 못 하겠어요.”
주변에 있는 학생들이 키득거렸다. 나는 창피해서 도서관을 나왔다. 개강 파티까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전산실에 가서 컴퓨터를 하며 소일했다. 인터넷 뉴스를 1시간 정도 보니 지겨웠다. 할 일 없을까 생각하다 클럽 만드는 일이 떠올랐다. ‘현대예술철학의 이해’ 조 모임 클럽을 내가 만든다고 했었다. 인터넷에 클럽을 개설하고 조원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중국 학생이 가장 빨리 답문을 보냈다. 다음은 나를 형이라고 부른 남학생, 그 다음은 정하. 나를 경계하고 내 말을 끊은 여학생은 답문을 보내지 않았다. 클럽 회원 명단을 확인하니 가입은 한 상태였다. 답문은 안 하고 가입만 한 것이다. 짜증이 났다. 클럽에서 탈퇴시키고 싶었다. 클럽장이 나니까 맘만 먹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 하고 사는 년인지 궁금해서 홈피에 들어가 봤다. 배경 음악이 우울하고 홈피 색조가 어두웠다. 공포영화 사이트 같았다. 일기장이 있길래 클릭해서 들어갔다. 하루하루마다 일기를 적고 있었다. 책이나 영화에서 퍼온 글귀가 가득했다. 읽는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감수성이 깊었다. 어느 날에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자!’ 나는 가소로워서 콧방귀를 뀌었다. 어디서 주워들은 것은 있어 가지고. 사진첩도 구경했다. 여느 여자와 다르게 사진이 적었다. 얼굴에 자신 없기 때문일까. 독사진은 없고 친구들과 찍은 사진밖에 없었다. 대개가 멀리서 찍은 것이었다. 미모 과시용이 아니라 추억 간직용. 친구도 많지 않았다. 그년이 그년이었다. 한 단체 사진 밑에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SFC. 영원히 함께하길.’ 에스 에프 씨가 뭐지? 아무리 궁리해도 아리송했다. 자기들끼리 만든 여고 동창 모임 같았다.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며 운동장을 내려다봤다. 유니폼 입은 학생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문득 내가 싫어졌다. 누구는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누구는 운동장에서 운동하는데 나는 옥상에서 담배나 피우다니. 세상이 싫어졌다. 맘껏 소리 지르고 싶었다. 야 이 씨발놈들아 유성민이 나중에 성공해서 존나 잘나갈 거다, 라고. 어디서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들렸다. 한 여학생이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신발 굽이 높아서 소리가 옥상까지 들렸다. 나는 여학생을 관찰했다. 치마가 짧고 엉덩이에 달라붙어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엉덩이가 실룩거려 팬티가 보일 듯 말 듯했다. 성욕이 오글거렸다. 나는 옥상에 있는 것이 후회됐다. 여학생은 주차장으로 이동해 차를 타고 학교를 나갔다. 차가 학교를 빠져나가는 동시에 성욕이 열등감으로 전이했다. 저렇게 관능적인 여학생이 차까지 있다니. 나는 못생기고 키도 작고 차도 없는데. 세상이 또 싫어졌다. 무언가 불공평하고 부조리하다는 것을 느꼈다. 짝짓기와 생존 경쟁에 실패해 밀려난 기분이었다. 내게 남은 일은 퇴화뿐. 나는 옥상에서 떨어져 죽고 싶었다.
여섯 시께 개강 파티에 참석하려고 학교를 나섰다. 일찍 가면 사람도 없고 주목도 못 받으니까 늦게 출발했다. 본래 대학생은 시간 약속을 안 지킨다. 그것이 대학 문화다. 여섯 시에 모이면 여섯 시에 출발하기. 정문에 학회 애들이 몰려 있었다. 정문에서 모였다 맥줏집으로 갈 모양이었다. 용대가리가 나를 맞이했다.
“선배님, 오셨어요?”
모두 내게 인사했다. 신입생 빼고는 낯익은 얼굴이 많았다. 몇 년 만에 보는 후배도 있었다. 03학번이 최고학번이니 내가 제일 연장자였다.
용대가리가 말했다.
“선배님, 지금 장소로 이동할까요? 거의 다 왔는데.”
“그건 학회장인 니가 결정해야지.”
물어봐줘서 고마웠다. 용대가리가 실수는 잦아도 예의와 도리는 아는 녀석이다.
학회 단골인 맥줏집에 갔다. 비어할매(Beer Grandmother)라고 내가 신입생 때부터 드나들던 가게였다. 벌써 11년 가까이 되었다. 사장 할머니는 몇 년 전 돌아가셨다. 군대 갔다 오니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새 주인에게 물어보니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자기가 가게를 인수했다고 했다. 새 주인은 실내 장식을 바꿨지만 가게 이름은 바꾸지 않았다. 이미 학생들에게 익숙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이곳을 ‘할매’라고 불렀다.
모인 인원은 총 10명이었다. 나중에 올 03학번 동기까지 합하면 13명. 말이 개강 파티지 실제는 조촐한 회식이었다. 본래 프랑스어문학과 인원은 100명이 넘는다. 학회 활동하는 인원은 그 3분의 1 정도. 우리 실존주의문학회는 인기가 많았다. 어디까지나 과거형. 현재는 10명 남짓한 인원이 꾸려 나간다. 항상 연초에는 사람이 들끓는다. 모두 외로운 탓인지 학회 활동을 열심히 한다. 학기가 지나고 학년이 올라가면 발길이 뜸해진다. 괴롭히거나 싸운 것도 아닌데 사람이 하나둘씩 빠진다. 실존주의가 취업에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실존주의를, 그것도 문학을 연구해서 뭐하겠는가. 대기업에서 카뮈를 안다고 좋아할까? 국가고시에 사르트르에 관한 문제라도 나오나? 학회뿐 아니다. 학과도 위험하다. 프랑스어문학과생 80%가 복수전공을 한다. 전공에 관심 있는 학생은 드물다.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모두 대기업에 취직하려고 경영학 혹은 경제학 수업을 듣거나 혼자 학원을 다니며 고시를 준비한다. 프랑스어문학과는 유령학과나 다름없다. 학과가 이러한데 학회는 오죽할까. 나는 학회의 존망을 걱정하며 상심에 빠졌다. 후배 녀석들은 깔깔대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나는 그들을 보며 한국 대학생의 수준을 개탄했다. 누가 내게 술잔을 건넸다.
“선배님, 이거 드시고 기분 푸세요. 아깐 죄송했어염.”
신입생 돼지였다. 후배가 선배에게 잔을 건네는 꼴이 못마땅했지만 딴에 선배를 챙겨준다고 한 짓이니 고마웠다. 나는 돼지가 마셨던 잔으로 한입털이를 했다. 여자가 마셨던 잔이라서 맛이 좋았다. 나는 돼지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돼지는 사양하지 않았다. 그녀는 애주가였다. 소주를 물처럼 마셔댔다. 서로 마주보는 자리에 앉아서 어쩔 수 없이 돼지와 놀았다. 나는 학회실에서 봤던 예쁜이와 놀고 싶었다. 그 애의 이름이 궁금했다. 남자 친구가 있는지도 궁금했다. 용대가리를 시켜서 신입생 자기소개를 시켰다. 돼지가 먼저 나섰다. 얘는 빼거나 사양하지 않아서 좋았지만 부담스러웠다. 나는 돼지의 자기소개를 듣지 않고 예쁜이만 보았다. 돼지의 이름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돼지는 그냥 돼지인 것이다. 예쁜이의 차례가 돌아왔다.
“안녕하세요. 프랑스어문학과 11학번 임예진입니다.”
이름도 예뻤다. 예진이라니. 얼굴과 이름이 어울렸다. 랑그(langue)와 파롤(parole)의 완벽한 조화랄까. 나는 예진이 앞에 앉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예진이는 구석에 있었다. 내가 그쪽으로 가려면 무리하게 자리를 이동해야 했다. 나는 돼지와 얘기하면서도 눈으로 예진이를 살폈다. 예진이는 용대가리와 놀았다.
“니들 인마 나 때는 선배 볼 때마다 인사했어.”
술기운이 올라 말이 헛나갔다.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혼자 내뱉은 것이다. 기왕 뱉은 말 끊을 수 없었다.
“아침에 학교에서 보면 인사하고, 점심에 식당에서 보면 인사하고, 화장실 갔다 보면 인사하고, 저녁에 도서관에서 인사하고. 엉? 알아?”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목소리를 높이자 신입생들이 고개를 숙였다. 용대가리가 내 비위를 맞추며 상황을 무마했다.
“아 그럼요. 요즘 애들이 잘 몰라서 그래요. 제가 철저히 가르치겠습니다. 선배님, 좀 과음하신 것 같네요. 쉬세요. 여기 얼음물 좀 갖다 주세요!”
“야! 썅 무슨 얼음물이야. 지금 얼음물이 중요해? 대학이 말이야, 학과가 위긴데 물이 넘어가? 엉? 세상에 문학의 가치가 실추되고, 진보가 위협받는 상황에 깔깔거리고 농담이나 하면 되겠어? 우리가 지금, 응? 우리 대학생이 왜 이렇게 됐는데. 학생운동도 안 겪고 부모님이 대주는 돈으로 편하게 대학 다니니까 뭐가 문제고 뭐가 심각한지 전혀 모르잖아. 실존주의학회가 설립된 이유가 뭐야, 응? 용대가리 말해봐.”
“이유라면 문학을 공부해서 인간이 사는 목적을 규명하고 어떻게 하면 삶을 좀 더 아름답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궁극적인 이치를….”
“그래. 잘 아네. 근데 지금 이게 아름다운 삶이야? 엉? 선배면 선배답고 후배면 후배다워야지. 후배가 선배를 그냥 무시해도 돼? 글구 학회가 말이야 학구적이고 뭔가 생산적인 얘기를 해야지.”
“맞습니다. 학회는 공부하는 곳이죠.”
“나 때는 마르크스랑 그 뭐시기 사회주의 같은 거 공부하고 논어 읽구 다녔다고. 근데 지금은 그런 책 한 권이라도 읽나? 다들 토익이다 토플이다 뭐다 죄다 상업적인 공부만 하고 있잖아.”
“큰일이죠.”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후배들은 침묵했고 용대가리는 안절부절못했다. 내가 술자리를 망쳐 놓은 것 같았다. 이 와중에 돼지가 말했다.
“그럼 어떤 공부를 해야 돼요?”
돼지는 빼지 않아서 좋다. 언제든지 일단 지르고 본다. 나는 돼지 덕분에 말을 계속할 수 있었다.
“내가 먹고 사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니야. 헌데 우린 인간이잖아. 그리고 학생이고. 대학생이 뭐야. 큰 학문을 공부하는 학생 아니야? 그럼 큰 학문이 뭐냐는 거지. 결국 인간적인, 휴머니즘적인 공부를 하는 거라고.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존재란 어떻게 확립되는가, 우주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나. 뭐 이런 것들. 이게 다 철학이고, 정치고, 경제고, 문학이고, 과학이라고. 학문이란 게 별게 아니야. 인간적인 호기심이 다 학문이라고. 결국엔 이런 것들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거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돼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뭔지 알 것 같아요.”
“근데 이 대학이라는 게 요즘 미쳐서 장사하는 데 바빠. 학문을 이용해서 등록금 장사를 하고 있다고. 학생들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 간판 따려고 대학 오는 거고. 미쳤지. 한 학기에 사오백이나 하는 돈을 내고 학교를 다니니. 그래서 얻는 게 뭔데? 고작 A+ 같은 점수 아니야? 영어로 된 점수 하나 얻으려고 몇 백을 쓰나? 이건 잘못돼도 뭔가 크게 잘못됐어. 대학평가도 존나 웃기지. 대기업에 취업 잘했다고 학교 등급이 올라가고, 고시 합격자 많다고 서열이 올라가고. 그럼 순수 학문만 공부하는 학생들은 낙오자라는 건가? 대학이 학문에만 전념해야지 왜 그런 유치한 서열 싸움에 목을 매냐고 내 말은. 내가 총장이라면 씨바 학교 올라오는 길에 붙어 있는 그 현수막 같은 거 있지? 취업 박람회 같은 거. 그거 다 떼버린다.”
“그럼 취업도 하지 말고 공부만 해야 돼요? 그건 아니잖아요.”
“물론 아니지. 내가 말했잖아. 나는 먹고 사는 걸 부정하지 않는다니까. 근데 그거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우리 역사가, 인류의 역사가 사실은 약육강식의 전쟁터라고. 엉? 약육강식이 뭔지 알지?”
“약한 자는 먹히고 강한 자는 먹는다.”
“그래. 이 지구가 실은 굉장히 더러운 곳이야. 살 만한 곳이 아니라고. 정의가 없고, 진실이 없고, 진리가 없다고. 왜 그런지 알아? 인간들이 다 개판이라서 그래. 자기 욕망, 탐욕, 돈 뭐 이런 거에만 관심 있지 어떻게 하면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인류가 진보할 수 있을까 하는 거에는 관심 없다고. 사람들이 겉으로 말하는 거, 그거 다 개구라야. 역사의 위인들도 사실은 다 양아치들이지. 그게 어디 위인이야. 알렉산더나 칭기즈 칸이 위인인가? 씨발, 무고한 사람 다 죽이고 전쟁 일으킨 게 잘한 짓인가? 칭기즈 칸이 땅 정복해서 가장 먼저 한 게 뭔지 알아?”
“뭔데요?”
돼지가 물었다. 침묵하던 후배들도 궁금한 듯 귀를 기울였다.
“여자들 강간했어. 엄마 딸 가리지 않고 막 해댔다고. 부하들이랑 여자 나눠 먹고. 완전 미친 또라이지. 위인이 아니라 강간범이라니까. 이 세상이, 우리가 사는 이 지구가 사실은 강간의 왕국이라고. 남자들은 출세해서 여자의 몸을 갈취하고, 여자는 생존을 보장받는 대가로 몸을 팔고. 이게 역사의 흐름이야.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래. 이런 미친놈들이 세상에 너무 많아.”
우울했던 분위기가 진지해졌다. 모두의 눈빛에서 학구적인 열망이 타올랐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돼지는 진짜 궁금한 듯했다.
“그래서 학문이 필요한 거야. 그래서 철학이 필요하고, 과학이 필요하고, 정치가 필요하고, 경제가 필요하고, 문학이 필요한 거지. 왜? 배우면 달라지거든. 의식이 변하거든. 책을 읽으면 사람 뇌가 바뀌어. 동물에서 인간으로 진화한다고. 그래서 대학생들이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 돼. 그냥 취업 잘하면 장땡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사회가 좀 더 공정하게 돌아가고, 어떻게 하면 내가 바르게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된다고. 약육강식을 막을 수 있는 건 지성과 깨달음밖에 없어. 우리 학회가 만들어진 이유도 거기에 있구.”
침묵이 흘렀다. 모두 내 연설에 감탄한 것 같았다. 돼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고, 용대가리는 존경의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쑥스러워서 헛기침했다.
“으흠! 미안, 내가 너무 말이 많았네.”
“아녜요. 저 좀 감동 먹었어요. 대학 와서 이런 얘기 처음 들어보거든요.”
돼지가 말했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그래? 뭐 요즘 이런 얘기 하는 사람이 드물지. 나는 니들 나이 때 선배들한테 항상 들었거든. 그때도 지금 이런 자리였어. 장소도 똑같애. 바로 여기서 너희 선배들이 나한테 똑같이 얘기해줬다고. 선배가 하는 게 뭐야. 후배들한테 이런 거 가르쳐주고 올바르게 인도하는 거잖아. 나는 진짜 누군가는 꼭 이런 얘기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 그럼 나도 좋고 너희도 좋은 거지. 너희도 나중에 후배들한테 이런 얘기 해줄 거고. 그럼 언젠가는 많은 사람들이 변하겠지.”
“선배님, 한 잔 하세요.”
용대가리가 무릎을 꿇고 술을 따랐다. 나는 잔을 들이켜며 예진이를 힐끔했다. 예진이와 눈이 마주쳤다. 예진이는 뭐가 궁금한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예진이가 말했다.
“전 어떻게 살아야 해요?”
질문이 추상적이고 철학적이라서 놀랐다. 얼굴도 예쁜 애가 생각도 깊었다.
“그건 성철 스님한테나 물어봐야지. 나는 몰라. 하하.”
모두 웃었다. 예진이도 엉뚱한 질문이 부끄러웠는지 볼을 붉히며 웃었다.
담배를 피우러 나간 사이 내 동기들이 왔다. 용섭과 진표와 정욱. 자리에 돌아왔는데 후배들이 세 사람을 둘러싸고 얘기를 듣고 있었다. 나도 구석에 앉아 얘기를 들었다.
“선배님은 그럼 얼마나 공부하신 거예요?”
돼지가 정욱에게 물었다. 행정고시 합격했다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정욱이 말했다.
“2년 정도 한 거 같은데. 쫌 빡세게 했어.”
“우와! 2년. 진짜 짱 부럽다. 졸업하면 바로 5급 공무원 되는 거잖아요.”
“연수원 갔다 와야 해. 앞으로 첩첩산중이다.”
“저희 학회에 선배님 같은 분이 있다는 게 자랑스러워요.”
후배들이 맞장구쳤다. 용섭과 진표도 정욱이 자기 동기라며 자랑했다.
“저도 할 수 있을까요?”
얌전히 듣고 있던 예진이가 물었다. 정욱이 예진에게 각별한 눈빛을 보냈다.
“왜? 여기에 관심 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음. 하려면 진짜 죽을 각오로 해야 돼. 설렁설렁 하는 건 없어. 그러면 바로 낙방이야. 진짜 자기 인생에 시험공부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해. 친구도 애인도 심지어 가족까지 버릴 줄 알아야 돼. 이 길 위에 오롯이 홀로 섰을 때, 그때만이 합격의 가능성이 열린다구. 공부한답시고 여기저기 쏘다니고, 도서관에서 잠이나 자고, 여자 남자 만나러 다니면 안 하느니만 못하지. 목숨 걸고 하면 돼.”
분위기가 아까보다 진지해졌다. 모든 눈이 정욱에게 쏠렸다. 나는 단박에 찬밥 신세로 전락했다.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고 내 얘기를 듣지 않을 분위기였다.
“저 진짜 감동 받았어요. 저한테 이런 얘기해준 사람은 선배님이 처음이에요.”
돼지가 말했다. 얘는 뺄 줄 모르는 성격이 단점이다. 아무한테나 들이댄다. 나는 돼지에게 실망했다. 구석에 밀려난 나는 예진이 앞에 앉았지만 말을 나눌 수 없었다. 예진이는 정욱에게 홀려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다시 묻는다면 대답해줄 수 있는데. 나는 술만 마셨다.
다음은 용섭과 진표가 주목받았다. 둘은 후배들에게 대기업 취업 전략을 설명했다. 후배들은 어느 때보다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직장인인 두 녀석은 경영 복수전공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전공만 하면 안 돼. 기업에서 경영 전공자 아니면 다 걸러내거든. 니들 꼭 복수전공 신청해라. 아니면 나중에 후회한다.”
“선배님,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용대가리가 무릎을 꿇고 정욱과 용섭과 진표에게 술을 따랐다. 나는 허탈했다.
술자리 끝날 때까지 아무도 내게 말 걸지 않았다. 내 얘기를 경청하던 후배들은 나한테 무관심했다. 모두 정욱과 용섭과 진표를 둘러싸고 희희낙락했다. 정하까지도 나를 외면했다. 정하는 정욱 옆에 붙어서 둘이서만 속닥거렸다. 나는 혼자 술을 따라 마시다 예진에게 말했다.
“행시 보게?”
“아뇨.”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예진은 고개를 돌려 다른 얘기에 집중했다. 나는 또 한 번 죽고 싶었다. 짧은 대답이 미안했는지 예진이 물었다.
“선배님은 뭐 하시게요?”
그 말이 눈물겹게 고마웠다. 이목을 집중시킬 기회였다.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금감원 준비하고 있어.”
금감원이라는 말에 모두 고개를 돌렸다 다시 외면했다. 예진이도 놀라지 않은 눈치였다.
“의외네요.”
예진이 말했다.
“뭐가?”
“전 선배님이 운동권 같은 건 줄 알았거든요.”
비꼬는 듯한 말투에 화가 났지만 할 말이 없었다. 운동권 같아서 좋았다는 뜻일까, 운동권인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실망했다는 뜻일까? 술자리 끝날 때까지 그 생각만 했다.
후배들은 2차를 갔고 03학번도 자기들끼리 2차를 갔다. 나는 후배들과 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03과 11 사이에는 무수한 역사와 세월이 존재했다. 그 간격은 메우는 일이 불가능했다. 내가 금감원에 합격해도 마찬가지다. 예진의 대답은 역시나 간단명료할 것이고, 돼지는 역시나 돼지일 것이다.
03학번끼리 횟집에 갔다. 학교 근처에 있는 싼 횟집이었다. 거기서 엄청난 얘기를 들었다. 정욱과 정하가 사귄다는 것이었다. 씹고 있던 회가 목에 걸릴 뻔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키도 크고 얼굴도 반반하고 행정고시까지 합격한 녀석이 왜 볼품없는 정하랑 사귀는 것일까?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했다. 용섭과 진표는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했다. 정욱이 둘에게만 알려준 것이었다. 나는 섭섭했다. 왠지 속은 느낌도 들었고, 동기에게 배신당했다는 절망감도 들었다. 정하도 미워졌다.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연애 사실을 숨기다니. 정하에게 남자 친구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깨지자 자괴감도 들었다. 나는 복합적인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정하 진짜 괜찮은 애야. 착하고 성실하고 언행도 바르고.”
정욱이 말했다. 용섭과 진표가 맞장구쳤다.
“맞아. 요즘 그런 여자애 보기 힘들지. 죄다 외모만 가꾸고 허영심만 가득하잖아.”
“정욱이가 여자를 잘 만났네. 둘이 어울린다, 야.”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맘에 없는 소리는 하기 싫었다. 정하가 괜찮은 애라는 말에 동의해도 정욱이 여자를 잘 만났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정하는 괜찮은 애지 괜찮은 여자가 아니다. 나는 용섭과 진표의 가식이 우스웠다. 외모가 어쩌고 허영심이 어째? 자기들도 예쁜 여자 좋아하면서 도덕성 타령하기는. 언제부터 여자를 품성으로 판단했다고. 나는 정욱과 정하가 사귀는 데도 의혹을 품었다. 행시 합격자가 별 볼 일 없는 여자를 사귈 이유가 없었다. 정하한테 빚졌나? 나는 정욱을 떠보았다.
“정하랑 결혼할 거냐?”
“어? 결혼?”
정욱은 대답을 망설였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말했다.
“그래, 결혼. 우리 나이면 결혼 생각할 때도 됐지. 너도 아무나 사귀진 않았을 테고.”
용섭과 진표도 궁금한지 정욱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직 사귄 지 얼마 안 돼서 결혼은 잘 모르겠다. 근데 아마 계속 사귄다면 언젠가 하겠지.”
안 한다는 말이었다. 부정의 뜻을 순화한 말이었다. 나는 정욱의 본심을 파악했다.
술이 들어가자 몸이 풀리고 혀가 꼬였다. 정욱도, 용섭도, 진표도 마찬가지였다. 동기끼리 술을 마시니까 취기가 빨리 왔다. 회도 바닥나고 없었다. 술은 남았는데 아무도 안주를 안 시켰다. 용섭이 말했다.
“아, 북창동 가고 싶다.”
모두 키득거렸다.
“지금 몇 시냐?”
용섭이 진짜 가고 싶은지 시간을 물었다. 진표가 답했다.
“아직 11시밖에 안 됐어.”
“11시면 황금 타임이네. 야, 우리 다 마셨으니까 지금 택시 타고 가자.”
아무도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용섭이 자기라도 혼자 가겠다고 하자 진표가 따랐다.
“너흰 안 갈 거야?”
나는 가만있었고 정욱은 갈등했다. 정확히 말하면, 갈등하는 듯했다. 정욱이 말했다.
“야, 여자 친구 있는데 내가 거길 왜 가. 니들끼리 가서 놀아.”
말에 아쉬움이 있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성민이 너는?”
용섭이 물었다.
오만 감정이 스쳐갔다. 갈까 말까? 실은 처음이 아니라서 양심의 가책은 덜했다. 군인이었을 때 선임과 함께 간 적이 있다. 함께 갔다기보다 내가 끌려갔다. 휴가 나와서 만날 사람이 없던 탓에 선임을 만났는데 선임이 용섭과 같은 말을 했다. 아 북창동 가고 싶다, 라고. 토씨와 발음 모두 일치했다. 나는 북창동이 뭐 하는 곳인지 몰라 물었다. 처음에는 2차 가자는 말인 줄 알았다.
“북창동? 아주 좋은 곳이지. 내가 오늘 너한테 신세계를 경험시켜줄게.”
나는 불안한 기운을 느꼈다. 어렸을 적 낯선 아저씨가 과자 사준다고 했던 말과 비슷했다.
“왜? 신세계가 펼쳐지는 게 두려워?”
“아, 아닙니다.”
“내가 설마 밖에 나와서까지 너한테 이상한 거 시키겠냐?”
“절대 그러시지 않을 것이지 말입니다.”
네온등을 단 간판이 눈부셨다. 길목 양옆으로 건물이 도열해 있었다. 죄다 안마방이었다. 대한민국에 안마방이 이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다. 선임은 ‘체리 안마’라는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내부가 온통 붉었다. 카운터에 있는 여직원 가슴에 체리 모양 배지가 달려 있었다. 요금은 시간제였다. 30분에 10만 원. 나는 군인 월급을 털었다. 카드로 계산하면 안 된다는 선임의 말을 듣고 근처 편의점에 가서 돈을 뽑고 왔다. 대기실 같은 곳에 앉아 있는데 여직원이 5번 방으로 안내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첫 경험 상대를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방은 좁고 어두웠다. 한쪽에는 침대 같은 매트가, 다른 쪽에는 목욕간이 있었다. 샤워부터 먼저 해야 하나? 나는 어찌할 줄 몰라 매트에 앉아 있었다. 누가 들어왔다. 내 첫 경험을 책임질 여자였다. 얼굴이 예뻐서 다행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많아 보였다.
“어? 어린 손님이네. 몇 살이에요?”
그녀가 옷을 벗으며 물었다. 나는 그녀의 알몸을 보고 숨이 멎어 대답하지 못했다.
“응? 몇 살?”
“스물넷이요.”
“그렇게 어린 것도 아니네. 아저씬 아니라서 다행이다.”
내가 멀뚱거리자 그녀가 무릎을 꿇고 내 허리띠를 풀었다.
“처음 왔나 봐?”
“네. 처음이에요.”
“진짜? 아예 처음? 원래 옷 같은 거 안 벗겨주는데 처음이라니까. 히히.”
그녀는 옷을 벗기고 매트에 눕힌 뒤 오일을 발라주었다. 나는 몸을 뒤틀었다.
“왜?”
“차가워서.”
“하하. 엄살은.”
그녀가 내 위에 몸을 포개고 젖꼭지를 빨았다. 그 순간 신세계가 펼쳐졌다.
선임과 헤어진 뒤 택시를 타고 집에 갔다. 택시 안에서 다짐했다. 앞으로 절대 가지 않겠다고.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그날,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다.
“유성민! 갈 거야, 말 거야?”
용섭이 보챘다.
“난 그런 데 안 가.”
실은 가고 싶었다.
“새끼. 깨끗한 척하기는. 니도 나중에 사회 나가면 가게 돼 있어. 미리 경험시켜주는 건데.”
횟집에서 나와 정류장으로 향했다. 용섭과 진표가 버스를 탄다고 했고, 나도 버스를 타고 집에 갈 생각이었다. 정욱은 만날 사람이 있다며 우리와 헤어졌다.
진표가 말했다.
“저 새끼 북창동 말 나오니까 정하 만나러 가네. 키키.”
용섭이 말했다.
“아 시발 부럽다. 누구는 돈 내고 하고 누구는 공짜로 하고.”
정말 그랬다. 누구는 돈 내고 하는데 누구는 공짜로 한다. 불공평하고 부조리하다. 정류장까지 가는 길에 수많은 여자를 보았다. 옆에 남자를 끼우고 다니는 여자도 있었고 혼자 다니는 여자도 있었다. 모두 화장을 하고 옷차림을 뽐내었다. 저것들은 다 무엇인가? 남자의 눈길을 기다리는 요사스러운 생명체 아닌가. 어디서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후각과 시각이 교차되어 여자에 대한 불쾌감을 일으켰다. 나는 사르트르의 로캉탱처럼 구토를 느꼈다. 북창동 가고픈 마음이 사라졌다. 여자의 음부에서 더러운 촉수가 나오는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길 가는 낯선 사람에게 헛구역질할 뻔했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문자가 왔다.
『오빠 뭐해염? 잘지내세요? ☞(*⌒▽⌒*)☜』
보슬이였다. 뭐라고 답하지? 밖에 있다고 할까? 만나자고 연락한 것인가? 밖에 있다고 하면 못 만난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집에 있다고 할까? 길에서 마주치면 어쩌지? 거짓말인 것이 탄로 나면 실망할 텐데. 생각할 겨를이 없다. 빨리 답문해야 한다.
나는 가장 적절한 답을 찾아냈다.
『보슬아 잘지냈어? 오빠 집에 들어가는길이야 학교잘다니구?』
최대한 길게 쓰려고 했는데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늦게 보내면 보슬이가 삐칠지도 몰랐다. 5분께 있다가 답문이 왔다.
『큭큭 학교잘다니고있답니다 (ㅜ.ㅜ)오빠혹시지금 시간있으세여?』
택시를 타고 도곡동까지 갔다. 보슬이가 자기 동네에서 보자고 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용섭과 진표가 어디 가느냐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녀석들의 질문에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보슬이를 보고 싶었다. 택시 안에서 별별 생각이 들었다. 이 밤에 나를 왜 불렀지? 사귀자고 말하면 어떡하지? 문자에 적힌 울고 있는 이모티콘이 마음에 걸렸다. 안 좋은 일 있나? 보슬이가 걱정됐다. 생각해보니 안 좋은 일 있는 편이 내게 좋았다. 안 좋은 일 있는데 나를 불렀다는 것은 내게 의지한다는 뜻이니까.
보슬이를 만나 동네 호프집에 들어갔다. 맥주를 먹고 싶어서 불렀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보슬이와 술 마셔보기는 처음이었다. 프라이드치킨 한 마리와 맥주500 두 잔을 시켰다. 보슬이는 겉으로 웃지만 속으로 우는 듯했다. 얼굴도 수척해서 걱정이 들었다.
“무슨 고민 있어?”
내가 물었다.
“아뇨. 그냥…. 오빠한테 이런 얘기해도 되나?”
“뭔데? 얘기해봐. 내가 도움 줄 수 있는 거면 도와줄게.”
“아, 전 되는 게 없나 봐요. 이번에 또 떨어졌어요.”
아나운서 시험 얘기였다.
“괜찮아. 이번이 끝이 아니잖아.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다음엔 꼭 붙을 거야. 힘내.”
“힘내고 싶어도 낼 수가 없어요.”
“왜?”
“오빠가 보기에, 진짜 솔직히 말해주세요.”
“응. 뭔데?”
“오빠가 보기에 제가 별로예요? 제가 아나운서 될 만한 얼굴이 아닌가요?”
“무슨 소리야. 너 예뻐. 진짜 정말 예뻐.”
“에이, 거짓말.”
“아니, 진짜! 내가 지금까지 본 여자 중에서 네가, 손에 꼽을 만큼! 아나운서가 뭐야 영화배우 해도 되겠다.”
“그래두 1차는 붙을 줄 알았는데 카메라 테스트에서 떨어지니까 기분 팍 상했어요. 최종면접이었다면 이렇게 슬프진 않을 텐데.”
“그 어디야? 너 떨어뜨린 데가. 진짜 안목 없네. 보나 마나 이상한 애들 뽑았을 거야. 신경 쓰지 마.”
“그냥 지방TV 방송국인데….”
“그래? 차라리 잘됐어. 너 정도 미모면 큰물에서 놀아야지. 보슬이는 공중파에서 9시 뉴스 진행하는 게 딱 어울려.”
“하하. 오빠 맨날, 아니 만날 나한테 좋은 말만 해주구.”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보슬이는 많이 먹었다. 치킨 한 마리가 금방 사라졌다. 나는 배가 부른 탓에 맥주를 남겼다. 계산은 내가 했다. 보슬이는 화장실에 갔고, 나는 보슬이를 위하는 마음에 오빠로서 계산했다. 상처받은 애한테 돈까지 내라고 할 수 없었다.
보슬이가 내게 팔짱을 끼었다.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했다. 나는 보슬이를 부축하고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오빠, 미안해요.”
보슬이가 말했다.
“아냐. 괜찮아. 집에 거의 다 왔어.”
보슬이가 사는 아파트 단지는 으리으리했다. 강남 아파트라 달라도 뭔가 달랐다. 입구에 들어서는데 누가 막아섰다. 웬 군바리였다.
“보슬아.”
군바리가 말했다. 보슬이가 고개를 들어 군바리를 보았다.
“헉!”
보슬이가 놀랐다. 군바리가 나를 밀치고 보슬이를 부축했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내가 말했다. 군바리는 나를 무시하고 보슬이만 챙겼다. 보슬이는 술에 언제 취했냐는 듯 맨 정신으로 군바리를 뿌리쳤다.
“아 좀 놔!”
“도대체 왜 그래?! 이유라도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군바리가 말했다. 남자 친구인 듯했다. 나는 졸지에 제삼자가 되었다.
“다 말했잖아. 쪽팔리게 여기까지 와서 이게 뭐야.”
“내가 쪽팔려? 엉? 군인인 게 쪽팔리냐구! 나는 뭐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됐어. 얘기 다 끝났으니까 그냥 가.”
보슬이가 지나가자 군바리가 팔을 잡았다.
“난 안 끝났어. 가자! 가서 얘기해.”
군바리가 보슬이를 끌고 갔다.
“저기요. 이러시면 안 되죠.”
내가 막아섰다. 군바리가 나를 노려봤다.
“상관없는 사람은 꺼져.”
“아니 이 사람이.”
나는 군바리와 몸싸움했다. 남자 친구든 뭐든 간에 보슬이를 지켜야 했다. 군바리는 멱살을 잡은 채 주먹으로 위협했고, 나는 때릴 테면 때려보라는 식으로 얼굴을 들이댔다. 보슬이는 내 뒤로 몸을 피했다. 군바리는 폭력을 행사하지 못해 답답해했다. 싸움에서는 민간인인 내가 유리했다. 군바리는 모자를 땅에 던지며 분풀이했다. 나는 보슬이를 먼 곳으로 대피시켰다. 군바리가 잡으려고 달려들었지만 내가 몸을 던져 막았다.
“야이 씨발! 최보슬 이리 안 와? 이 씨발년아!”
보슬이가 욕을 듣고 멈춰 섰다.
“뭐라고?”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이 씨발 너 분명히 나 기다린다고 했잖아. 했어, 안 했어?”
나를 사이에 두고 보슬이와 군바리가 대화했다.
“그래. 했어.”
“근데 씨발 이게 뭐야? 이 새낀 또 뭐고!”
보슬이가 굳은 표정으로 군바리에게 다가갔다. 분위기가 진중해졌다. 군바리가 긴장했는지 침을 삼켰다. 보슬이가 말했다.
“나 이제 너 싫어. 니가 뭘 하든 관심 없다고. 이거 진짜 미안한 말인데, 나 좀 귀찮게 하지 말아줄래? 내가 힘들어! 내가 짜증난다고!”
군바리가 무릎을 꿇고 빌었다.
“보슬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우리 한 번만 다시 생각하자. 나 땜에 힘들면 내가 다시 안 찾아올게. 전화도 니가 하지 말라 그러면 안 할게. 응? 그니까 좀만 시간을 갖자.”
“휴. 진짜 싫다. 쫌 떨어져라.”
보슬이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군바리도 놀랐고 나도 놀랐다. 말에서 싫은 티가 절실했다. 군바리는 충격에 빠졌다.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든 듯했다.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땅에 던져진 모자를 집어 쓴 뒤 일어섰다. 군바리는 보슬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나를 보더니 피식하고 가버렸다. 의미가 모호한 웃음이었다. 그의 눈은 슬픔에 붉어져 있었다. 나는 그 눈동자에서 패배감을 보았다. 나쁜 의미의 패배감이 아니었다. 체념의 승리와 비슷한 패배감이었다. 보슬이는 군바리에게 미안한지 고개를 숙였고, 나는 군바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군바리는 밤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아무 말도,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한 주민이 아파트 위에서 내려다보다가 집으로 들어갔다.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보슬이가 말했다.
“아니야. 괜찮아.”
“시간 많이 늦었는데 집에 어떻게….”
“택시 타고 가면 돼. 나 돈 있어.”
“저 들어가 볼게요.”
보슬이의 뒷모습은 힘겨웠다. 어깨가 늘어지고 발이 무거웠다. 나는 보슬이가 승강기 타는 모습까지 보고 발걸음을 돌렸다. 택시비가 없어 근처 PC방에서 밤새웠다. 아침 7시께 출근하는 사람들 틈에 껴 귀가했다.
주말을 허송했다. 늦게 일어나고 늦게 잤다. 게으름을 피하려고 학교 도서관에 갔지만 거기서도 자고 왔다. 집에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맥주와 과자와 라면을 샀다. 인터넷에서 내려받은 영화를 보며 먹고 마셨다. 취기와 포만감에 젖어 침대에 누웠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다. 벨 소리에 눈을 뜨니 햇살이 환했다. 멍한 상태로 전화를 받았다.
“선배, 안 오세요?”
정하였다.
“뭘?”
“오늘 조 모임 있잖아요.”
“조? 무슨 조? 아, 현대예술.”
“잔 거예요?”
“아니. 어. 응. 그니까… 금방 갈게.”
시계를 보니 12시 40분이었다. 12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어차피 늦었으니 빨리 갈 필요 없었다. 면도하고,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머리는 감고 말리기 귀찮아서 모자를 썼다. 자취방이 학교와 가까워서 가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문을 열고 세미나실에 들어갔다. 회의 중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 빈자리에 앉았다. 이목이 내게 집중됐다. 나는 미안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따가운 시선이 감지됐다. 일전에 나를 지적하고 내 말을 끊었던 여학생이 노려보고 있었다. 지각 한 번 했다고 사람을 죽일 기세였다. 나는 무시하고 시선을 피했다.
“저희 아까 자기소개 다 했어요. 선배도 하세요.”
정하가 말했다.
“아 그래? 예. 저는 프랑스어문학과 03학번 유성민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늘 늦어서 정말 미안하고요.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12시에 모이기로 하지 않았나요?”
그 재수 없는 여학생이 말했다.
“네. 제가 깜박하고….”
“깜박할 게 따로 있죠. 이거 성민 씨 혼자 하는 과제 아니잖아요. 모두가 같이하는 건데 혼자 이렇게 지각하고 그러면 저희도 힘들어지는 거 모르세요?”
미친년이 지랄했다. 한 대 갈기고 싶었다. 그녀는 나를 중죄인 취급 했다.
“네. 다음부터는 일찍 올게요.”
정하가 분위기를 수습했다.
“이제 사람도 다 모였으니까 자기소개 하고 회의 재개하죠. 오늘 첫날이잖아요.”
내 편은 정하밖에 없었다. 아니, 내 적은 그 미친년밖에 없었다.
나를 형이라고 불렀던 남학생이 자기소개를 했다.
“07학번 최형익이라고 해요. 국문학과구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중국 학생이 자기소개를 했다.
“앙녕하세요. 사하콰 09학본 리밍보입니다. 만나서 방갑습니다.”
마지막은 미친년 차례. 이름이 무엇일지, 어느 학과일지 궁금했다.
“미술학과 06학번 조민지예요.”
미친년답게 소개가 간단명료했다.
“저희 앞으로 한 학기 동안 계속 볼 건데 그냥 말 편하게 하는 게 어때요? 전 학생끼리 ‘요’자 쓰는 거 불편하거든요.”
형익이 제안했다. 훌륭한 생각이었다. 모두 동의하는데 조민지만 반대했다.
“죄송해요. 전 원래 남자한테 말 안 놓거든요.”
당돌한 발언에 모두 당황했다. 남자라는 점과 말 놓는 점이 무슨 상관인가. 미친년답게 논리가 괴상했다. 정하가 살려 놓은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조민지는 남자에게 말 놓지 않는 것이 정치적 신념이라도 되는 듯 행동했다. 별 꼴같잖은 신념이었다. 나는 조민지의 사상과 철학이 궁금했다. 이성적으로 호감을 느낀 것은 아니다. 미친년을 탐구해보고 싶을 뿐이었다. 남자 친구 있느냐고 물어보려다 말았다. 없을 것이 뻔했다.
조민지가 회의를 이끌었다. 조민지는 아는 것이 많고 언변이 좋았다. 그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조민지가 하자는 대로 끌려갔다.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사람은 없었다. 반론을 제시하면 반박당할 것 같았다. 조민지의 말은 빠르고 날카로워서 청자의 입을 막는 유형이었다. 조민지는 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말과 말 사이에 침묵이 생기면 그 찰나를 파고들었다. 상대가 말을 쉬는 순간도 조민지에게는 공격의 기회였다.
암묵적으로 조민지가 조장으로 정해졌다. 나의 연배는 조민지의 언변에 밀렸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조민지는 조원에게 역할을 분담했다. 나는 리오타르의 생애를 조사하는 임무를 맡았다. 쉬운 일이라 불만은 없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붙여 넣으면 그만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조민지가 말했다.
“성민 씨, 인터넷에서 베끼면 안 돼요. 좀 심도 있게 조사해주세요.”
말 전체가 거슬렸다. ‘성민 씨’도 거슬렸고, ‘베끼면’도 거슬렸고, ‘심도’도 거슬렸다. 심도 있는 조사란 무엇일까? 인터넷은 심도가 없나? 미친년, 자기도 인터넷에 어쭙잖은 일기나 올리면서. 나는 대답하기 싫어서 고개만 끄덕였다.
조민지는 바쁘다며 세미나실을 먼저 나갔다. 조원들은 인사를 나누고 흩어졌다. 나는 정하와 하교했다. 밥을 안 먹고 나와서 배가 고팠다. 정하에게 밥 먹자고 말했다. 정하는 미안하다며 약속이 있다고 했다.
“정욱이 만나는구나?”
정하는 놀랐다.
“어?! 선배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눈치 백 단인 거 몰라? 어쩐지 좀 수상하더라.”
“나중에 말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다 알게 되네….”
“근데 너 혹시 정욱이한테 돈 빌려줬니?”
“돈이요? 갑자기 웬….”
“아, 아니다.”
“혹시 오빠가 선배한테 돈 꾼 거 있어요?”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신경 꺼.”
“만약에 그런 거라면 제가 갚을게요. 얘기하세요.”
“에이, 아니라니까.”
멀리서 조민지가 보였다. 급한지 허둥대며 정문을 나가고 있었다. 나는 조민지를 보다 SFC가 생각났다. 정하는 조민지랑 같은 여자니까 SFC를 알지도 몰랐다.
“정하야, 너 SFC가 뭔지 알아?”
“네? 에스 에프 씨요?”
“응.”
“케이 에프 씨 아니에요?”
“아니, 그거 말고 에쓰! 에프! 씨! 무슨 모임 같던데.”
“글쎄요. 처음 들어보는데…. 무슨 축구단 이름 같네요.”
정하도 SFC를 몰랐다. 나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조민지에게 이렇게 큰 관심을 갖다니 스스로도 신기했다.
하교 도중에 정하와 헤어졌다. 정하는 정문에서 정욱을 만난다고 했다. 나는 쪽문으로 빠졌다. 정욱을 보기 싫어서 그랬다. 정욱을 보면 일진이 나빠질 것 같았다. 게다가 정욱이 정하와 함께 있는 꼴이라니 더욱 싫었다.
동네 골목을 걷다가 예쁜 여자를 발견했다. 뒤태가 빵빵하니 관능적이었다. 풀어헤친 머리가 내 마음을 간질였다. 왠지 우리 학교 학생 같았다. 수업 끝나고 집에 가는 길 같았다. 나는 그녀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주시하며 뒤따랐다. 가는 방향이 같아서 기분 좋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성욕이 오글거렸다. 그녀가 뛰기라도 하면 성기가 발기할 것 같았다. 그녀는 내 옆 건물에 살고 있었다. 나는 몇 층에 사는지 궁금해 쫓아 들어가려다 말았다.
집에 와서 컴퓨터를 켜고 야동을 내려받았다. 그녀의 뒤태가 생각나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야동을 내려받는 동안 메신저에 접속하고 인터넷 기사를 봤다. 메신저에 보슬이가 없었다. 최근에 만난 이후로 연락도 없었다. 문자를 보내려다 씹힐까봐 관두었고, 전화를 하려다가 용기가 없어 관두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야동이었다. 인터넷 기사는 오늘도 복잡했다. 종편방송이 황금채널 특혜를 받았다고 한다, 지방 의대생이 여후배를 성폭행했다고 한다, 모 아나운서가 사업가와 결혼할 마음을 밝혔다고 한다, 미국에서 외계인에게 납치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FBI에 정신적 피해보상을 요구했다고 한다, 방송국 낙하산 인사 때문에 기자와 PD 들이 시위에 나섰다고 한다, 잘나가는 여배우가 눈 수술 부작용 때문에 칩거 중이라고 한다. 나는 세상이 혼란스러우면서 흥미진진하다고 느꼈다.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며 키득대니 시간이 빨리 갔다. 야동은 내려받기가 끝난 상태였다. 나는 창문과 방문을 닫고 바지를 내렸다. 야동 배우가 예진이를 닮아서 흥분이 잘됐다. 사정에 임박한 순간 파리가 나타나 나를 괴롭혔다. 어마어마한 똥파리였다. 폐쇄된 방을 똥파리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궁금했지만 궁금증마저 들지 않을 정도로 쾌락을 느끼면서 똥파리의 방해에 불쾌를 느꼈다. 예진이를 닮은 야동 배우도 똥파리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나는 똥파리를 잡으려고 신문지를 말았다. 똥파리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비행이 불규칙해서 맞지 않았다. 똥파리는 내 공격을 간파하고 피해 다녔다. 나는 똥파리가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똥파리는 사방을 들쑤시며 머리를 박아댔다. 미친 파리 같았다. 창문을 여는 편이 나을 듯싶었다. 똥파리는 닫힌 창에 몇 번 부딪히고 열린 창을 통해 나갔다. 똥파리가 나가자마자 창문을 닫고 야동에 집중했다.
사정한 뒤 피곤해서 잤다. 리오타르의 생애는 다음에 알아보기로 했다. 보슬이는 연락이 없었다.
며칠간 집과 학교만 왕래했다. 수업이 끝나면 곧장 집에 왔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누구와 말하지 않았다. 나는 혼자 밥 먹고, 혼자 공부하고, 혼자 수업 들었다. 외로웠지만 갈 데가 없었다. 전 같았으면 학회실에 갔을 텐데 이제 학회실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퇴물이 된 03학번을 아무도 반기지 않았다. 용대가리조차 나를 외면했다. 무릎 꿇고 술 따를 때는 언제고. 이빨 빠진 호랑이가 물러날 때가 온 것이다. 나는 학교를 얼른 졸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기업에 취직해 구질구질한 삶에서 벗어날 테다. 학교와 자취방 동네를 떠나 새 보금자리를 마련할 테다. 오래되어 썩은 인간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워서 신선한 인간관계를 만들 테다. 여자 친구도 사귀고 비싼 차도 굴려야지. 1학기만 버티자. 금감원에 합격하면 만사가 달라진다. 혁명이 이루어진다.
말을 안 하고 사니까 걱정이 들었다. 이러다가 벙어리가 되는 것은 아닐까? 어느 날은 용기를 내어 보슬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연결되는 동안 오만 생각이 들었다. 손이 떨리고, 가슴이 뛰고, 식은땀이 흘렀다. 보슬이는 받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받았다면 한마디도 못 했을 테다. 아직 준비가 덜된 내 모습이 싫었다. 1학기만 버티면 준비가 완료되는데 1학기가 1년 같았다. 그 시간 동안 보슬이에게 남자 친구가 안 생기기를 바랐다. 방송국 아나운서와 금융감독원 직원의 만남이라. 환상적이었다.
밤이 외로워 못 견디면 정하에게 문자를 보냈다. 남자 친구 있는 애한테 전화는 할 수 없었다. 정하는 답문을 즉시 보냈다. 보슬이처럼 사람 애간장 태우는 일은 없었다. 나는 보슬이 얼굴에 정하의 답문 속도를 합친 여자를 상상했다. 어디 그런 여자 없을까? 할 수만 있다면 정하와 보슬이를 섞고 싶었다. 덤으로 예진이도 함께. 정하는 농담을 잘 받아주었다. 시답잖은 말에도 긴 문장으로 답해주었다. 날이 갈수록 문자 오가는 횟수가 많아지고 친분이 쌓여갔다. 나는 금감원에 들어가도 정하와는 인연을 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저녁은 대개 교내 식당에서 해결했다. 집에서 해 먹기도 귀찮고 밖에서 찬거리 사기도 번거로웠다. 식비 지출은 생활에 타격이 컸다. 물가가 오른 탓인지 교내 식당도 교외 식당 못지않게 비쌌다. 나는 되도록 싼 것을 먹었다.
식권을 사고 식당에 들어가는데 문자가 왔다.
『오빠 뭐해염? 어디계세요? (>_<)』
보슬이였다. 바로 답문을 보냈다.
『응 오빠학교식당 보슬이는 뭐해 그동안 잘지냈어? 연락이 없어서 좀 걱정했어』
의외로 문자가 빨리 왔다.
『저지금 오빠네 학교근처인데 ㅋ ㅋ잠깐 볼수 있어요?』
믿기지 않아서 문자를 여러 번 확인했다. 예감이 좋았다. 꿈에 그리던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보슬이가 보낸 문자에 허기도 사라졌다. 나는 식당을 나와 보슬이를 만나러 갔다. 보슬이는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치마 입은 모습이 예뻤다. 나는 보슬이를 만나자마자 옷이 예쁘다고 칭찬했다. 보슬이는 좋아하며 내 팔뚝을 쳤다. 아파야 하는데 아프지 않고 즐거웠다. 고통과 충격조차 쾌락으로 승화시키는 보슬이의 매력. 나는 보슬이와 함께한다면 평생 맞을 각오도 돼 있었다.
보슬이가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하기에 카페에 갔다. 카페에 들어가자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봤다. 눈빛을 보아하니 우리를 연인으로 착각한 듯했다. 나는 우쭐해져서 보슬이를 여자 친구처럼 대했다. 잠시나마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내가 이렇게 예쁜 여자와 사귄다는 것을. 계산대에서 커피를 시키는데 보슬이가 진열된 케이크를 가리켰다.
“오, 나 저거 되게 좋아하는데.”
고구마 케이크였다.
“먹고 싶어?”
내가 물었다.
“아뇨. 그냥 좋아한다구요.”
나는 보슬이의 마음을 간파하고 케이크도 주문했다.
조각 케이크였다. 둘이 먹기에 작았다. 나는 보슬이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대개 사랑하는 사람이 먹는 모습을 보면 행복해야 하는데 끼니를 굶은 탓인지 고통스러웠다. 포크를 가져와 빼앗아 먹고 싶었다. 고구마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보슬이는 맛있는지 나를 보며 웃었다. 나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속은 울고 있는데.
보슬이는 먹느라, 문자 주고받느라 말이 없었다. 대화라도 하면 좋을 텐데 포크를 집으면 문자가 왔고, 포크를 놓으면 문자를 보냈다. 먹고 문자 보내는 기계 같았다. 나한테는 답문을 늦게 보내면서 상대가 누구인지 오자마자 답문을 보냈다.
“오빠도 좀 드세요.”
얼마 남지 않은 케이크를 보슬이가 건넸다.
“아냐. 됐어. 너 먹어.”
나는 대인배(大人輩)답게 사양했다. 보슬이가 포크로 케이크를 찍어 한입에 넣었다. 케이크가 침과 뒤섞여 씹히는 소리가 들렸다. 배고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커피 잔도 비었고 케이크도 사라졌으니 때가 되었다. 나는 내 허기를 채우고 보슬이에게 맛있는 것을 사줄 겸 일어섰다.
“딴 데 갈래? 저녁 사줄게.”
“저 좀 있다 약속 있는데….”
“약속?”
“네. 오빠 저녁 안 먹었어요? 식당에 있다 온 거 아니에요?”
“아, 먹었지. 나는 너 안 먹은 줄 알고 사주려고 했지.”
바보 같은 짓이 탄로 날까봐 거짓말했다. 그랬구나. 시간이 남아서 나를 부른 것이었구나.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구나. 자괴감과 절망감이 들었다. 카페를 나와 지나가는 차에 투신하고 싶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명제가 떠올랐다. 이것은 근본적인 화두였다. 보슬이의 약속 시간이 다가올 동안 보슬이의 얘기를 들으며 화두를 잡았다. 눈은 보슬이를 향하고 뇌는 화두를 향했다. 나는 생각의 화살을 쏘아 화두를 타파해야 했다. 보슬이가 약속 시간이 됐다며 일어났다. 카페 문을 열고 나가는데 문에 달린 종이 딸랑 울렸다. 그 순간 화두가 터졌다. 눈앞의 경계가 사라지고 객진번뇌가 소멸했다.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인상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았다. 물고기 한 마리가 어장에서 노닐고 있었다.
보슬이와 헤어지고 식당으로 향했다. 허기 탓에 몸이 늘어졌지만 힘껏 달렸다. 숨을 헐떡이며 식당에 도착했는데 불이 꺼져 어두컴컴하고 안에 아무도 없었다. 영업이 끝난 것이다. 손에 든 식권을 주머니에 넣고 발길을 돌렸다. 집에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맥주와 라면과 과자를 샀다. 집에 와서 마구 먹었다. 먹으면서 눈물 흘려보기는 처음이었다.
생활비가 떨어져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는 우리 아들 잘 있느냐며 반가워했다. 나를 반겨줄 사람은 엄마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사람과 대화한 탓인지 말이 많아졌다. 평소에 묻지 않던 가족의 안부까지 물었다. 강아지 똘이의 소식도 궁금했다. 엄마는 똘이가 이웃집 암캐와 교미했다며 좋아했다. 너도 얼른 여자를 만들어 결혼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나는 ‘여자’와 ‘결혼’ 얘기가 나오자 우울해졌다. 기분 좋게 통화하는데 왜 스트레스를 주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엄마한테 짜증을 부렸다.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라고. 요즘 남자들 결혼 늦게 하니까 괜찮다고. 엄마가 기가 막힌 얘기를 꺼냈다. 내 앞날이 걱정되어 결혼정보업체에 나를 등록시켰다는 것이었다. 충격적이었다. 잘못 들은 것 같아서 다시 물었다. 결혼정보업체에서 나를 C등급으로 평가했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나를 결혼정보업체에 등록시킨 사실과 내가 C등급을 받은 사실에 열불이 났다. 둘 중 무엇이 더 불쾌한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아마도 A등급을 받았다면 웃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걱정 말라며 회비만 꼬박꼬박 내도 나중에 등급이 올라간다고 말했다. C등급 받은 것도 부동산 땅값이 오른 덕분이라고 했다. 나는 살고 싶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침대에 누웠다. 아무 짓도 하기 싫었다. 야동도 보기 싫고, 보슬이도 생각하기 싫고, 정하에게 문자도 보내기 싫었다. 똘이가 암캐와 흘레붙는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멋대로 암캐를 상상하고 멋대로 체위를 정했다. 개도 짝이 있는데 나만 혼자라니 정말 개 같은 날이었다.
통장을 확인하니 10만 원이 입금돼 있었다. 엄마가 보낸 돈이었다. 액수가 적어서 불만이었지만 급한 대로 이것부터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조 모임 전날에 알람을 맞추고 잤다. 지각해서 조원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날도 12시에 모이기로 했다. 9시에 일어나서 씻고 인터넷에서 리오타르의 생애를 찾아 출력한 뒤 집을 나와 학교에서 밥을 먹고 세미나실로 향했다. 일찍 일어난 덕분에 코털도 깎고 면도도 제대로 했다. 도착하니 11시 30분이었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한 셈이었다. 조민지는 아직 오지 않고, 형익만 와 있었다.
“오, 형. 안녕하세요.”
형익이 인사했다. 역시 예의가 발랐다.
“어, 그래. 일찍 왔네? 뭐 읽어?”
“신문이요.”
“무슨 신문?”
나는 형익이 무슨 신문을 읽는지 보았다. 두겨레 신문이었다.
“뭐야, 빨갱이야?”
“아 형, 빨갱이가 뭐예요.”
“크크. 농담이지, 인마. 근데 갑자기 웬 신문? 너 기자 될 거야?”
“아뇨.”
“근데 신문을 왜 읽어?”
“꼭 기자 되고 싶은 사람만 신문 읽는 건 아니잖아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오늘 나라에 무슨 일이 있었나 당연히 알아야죠.”
“꼴값은. 나 먹고 살기도 바쁜데. 크크. 너두 군대 갔다 왔으니까 이제 뭐 할지 생각해야지 않겠어?”
“안 그래도 제가 요즘 준비하는 게 있거든요. 학원도 다니긴 하는데….”
“그래? 뭔데?”
“아, 얘기해도 되나?”
“이게 무슨 위키리크스냐? 감추게.”
형익은 뜸 들이고 말했다.
“공기업 준비하고 있어요.”
“공기업? 어디?”
“금융감독원이요.”
“금감원? 나도 그거 준비하는데.”
“오, 진짜요?”
형익은 나보다 금감원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수험 기간은 내가 긴데 지식과 정보는 형익이 앞섰다. 내가 형익에게 조언을 들어야 할 판이었다. 형익은 CPA 자격증이 없어서 고민이라고 했다. 법학, 경영학, 경제학 전공자가 아닌 점도 걱정이라고 했다. 나는 그딴 것은 상관없다고 했다. 같이 힘내자고 말했다. 형익이 경영학을 잘 가르치는 강사를 소개해주었다. 자기는 현장 강의를 들으러 강남까지 간다고 했다. 나는 강의 때문에 강남까지 갈 형편이 못 되었다. 동영상 강의는 싸다고 형익이 말했다. 가격을 물었다. 기본 강의가 15만 원이랬다. 엄마에게 받은 10만 원이 생각났다. 5만 원을 무슨 수로 벌지?
정하와 리밍보가 같이 왔다. 오다가 만났다고 했다. 리밍보는 전처럼 땀을 흘리고 있었다. 내가 운동하고 왔느냐고 물었다. 리밍보가 보온병을 꺼내더니 온수를 마셔서 그렇다고 답했다. 따뜻한 물이 건강에 좋아서 마시는데 마실 때마다 땀이 난다고 했다. 나는 중국인이 차를 좋아하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민지는 12시가 넘도록 오지 않았다. 조민지가 없으니 회의가 시작되지 않았다. 나는 이번이 복수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지각했다고 나를 구박했던 때가 떠올랐다. 조민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만 지속될 뿐 받지 않았다. 나는 조민지가 집에서 자고 있기를 바랐다. 오더라도 30분 넘게 늦기를 바랐다. 시계의 분침이 갈수록 나는 즐거웠다. 늦으면 늦을수록 복수할 권리가 강해지니까.
조민지는 12시 15분에 도착했다. 아쉬웠지만 만족스러웠다. 지각했다고 나를 구박한 조민지가 자기가 지각했을 때는 내게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조민지는 당당하게 들어와 당당하게 앉았다. 사과도 없고 인사도 없었다. 모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조민지는 조원들과 눈도 안 마주치고 가방에서 공책을 꺼낸 뒤 말했다.
“회의 시작하죠.”
정적이 흘렀다.
이런 개씨팔니미좆같은씹후레죽일개같은년아, 라고 말하고 싶었다. 속에서 열불이 끓었다. 참다못한 형익이 말했다.
“이런 말 해서 죄송한데요. 늦었으면 왜 늦었는지 미안하단 사과라도 해야 하지 않나요?”
조민지는 남에게 굽히는 법이 없었다.
“죄송해요.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어요.”
나는 참을 수 없었다. 조민지는 예의와 도리를 상실한 상태였다. 혼쭐을 내야 마땅했다. 한마디 하려는데 정하가 말렸다.
“일단 모였으니까 그냥 시작하죠. 오빠도 괜찮죠?”
“엉?”
“뭐 사정이 있어서 늦은 거 같은데 이해해주실 거죠?”
짧은 순간에 오만 생각이 들었다. 같은 여자라고 정하가 조민지 편을 드나? 싸우면 분위기 나빠지니까 이러나? 내가 대인배(大人輩)라서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선택해야 했다. 싸우면 소인배가 되지만 속이 후련하다. 이해하면 대인배가 되지만 속이 답답하다. 조민지는 나를 노려보았다. 잘못한 주제에 눈을 쳐들다니 괘씸했다. 정하는 웃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웃는 눈이 보는데 소인배를 택할 수 없었다. 나는 이번만 참기로 하고 대인배를 선택했다.
“어, 그럼. 말 못할 사연이 있겠지. 괜찮아.”
내 자비로움은 조민지의 뻔뻔스러움을 압도했다. 모두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살벌했던 분위기가 내 말 한마디에 평화로워졌다. 조민지는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이기려던 조민지는 졌고, 지려던 나는 이겼다. 이것이 대인배와 소인배의 차이다. 소인배는 싸우려고 달려들지만 대인배는 그것조차 포용한다. 얄팍한 공격은 대범한 수비 안에서 녹아버린다. 애초부터 차원이 다른 것이다. 조민지라는 인간과 유성민이라는 인간은 질이 달랐다.
회의가 시작되고 각자 조사한 자료를 꺼냈다. 조민지는 내가 가져온 리오타르 생애에 관한 자료를 보더니 승질을 냈다.
“이거 인터넷에서 그대로 복사한 거죠?”
“아니 뭐 다른 곳에서 찾고 책도 보고 그랬는데….”
“이거 제가 인터넷에 그대로 떠 있는 거 봤거든요?”
조민지는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그 정도면 되지 않아요? 어차피 중요한 것도 아닌데.”
“그래도 교수님이 다 읽어보실 텐데 성의 없이 그대로 퍼오면 안 되죠!”
조민지가 목소리를 높이자 나도 발끈했다.
“그냥 생애 조사하는 건데 뭐 이것보다 얼마나 더 하라고! 논문이라도 볼까? 응?”
“반말하지 마세요! 저는 국회 도서관까지 가서 조사했단 말이에요. 성민 씨 때문에 저희 점수 깎이면 책임질 거예요?”
조민지가 자기가 조사한 자료를 꺼냈다. 양이 어마어마했다. 100장 정도 되는 A4 용지와 두툼한 책 몇 권이 책상에 올라왔다. 나는 면목이 없고 할 말이 없었다. 조민지의 지각과 뻔뻔한 태도에 기분 상했던 조원들도 조민지의 자료를 보자 표정이 바뀌었다. 모두 조민지의 지각과 뻔뻔한 태도에는 불가피하고 불가항력적인 사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전세가 역전되었다. 조민지는 자료 하나로 대인배(大人輩) 등극에 올랐다. 지각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 사람이 준비해 온 자료가 대인과 소인을 가르는 척도였다. 아량과 자비를 베풀어도 자료가 보잘것없으면 소인배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기가 죽어 가만있었다.
조민지가 말했다.
“다음 주까지 발표 초안 만들어야 하는데…. 그냥 리오타르 생애도 제가 할게요. 어차피 이건 못 쓰는 거니까.”
조민지가 내 자료를 옆으로 던졌다. 자료는 낱장이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순간 울컥했다. 둘만 있었다면 때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가슴에 참을 인(忍) 자를 새겼다. 대응하면 지는 것이다, 반응하면 지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조원들이 각자 준비한 자료를 조민지에게 건넸다. 자료의 수준은 조민지를 능가하지 못했지만 착실했다. 나만 외톨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이들은 적어도 인터넷에서 베껴 오지 않은 듯했다. 조민지가 자료를 정리해서 발표 초안을 만들겠다고 했다.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발표는 누가 하죠?”
정하가 물었다.
조민지가 조원을 한 명씩 보더니 정하와 형익을 지목했다. 리밍보와 나는 제외됐다. 리밍보가 제외된 것은 이해되는데 내가 제외된 것은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인가? 내 신세는 외톨이에서 떨거지로 전락했다. 정하는 대인공포증이 있어서 발표를 못한다고 말했다. 형익은 내가 아무것도 안 하니 형이 발표하는 편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듣고 보니 그랬다. 협동 과제인데 혼자 아무것도 안 하면 그것은 협동이 아니었다. 나는 조민지의 능력과 다른 조원의 노력에 무임승차해서 좋은 학점을 얻을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대인배(大人輩)가 할 짓이 아니었다. 나는 떳떳해지고 싶었다.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네. 발표는 제가 할게요.”
내가 말했다. 조민지는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오두방정을 떨었다.
“안 돼요, 안 돼. 발표는 형익 씨가 하세요.”
형익이 말했다.
“그래도 이게 조별 협동 과제인데 각자 역할 분담해야죠. 누구는 많이 하고 누구는 적게 하는 게 어딨어요? 물론 모두 좋은 점수 받고 싶겠지만 일단 공평하게 해야죠. 너는 부족하고 못났으니까 빠져라, 이거는 좀 아닌 것 같아요.”
형익은 내 편이었다. 부족하고 못났다는 말이 거슬렸으나 나를 변호하는 것이 확실했다. 정하도 거들었다.
“그래요. 일단 다 같이 하는 데 의의가 있으니까 오빠가 발표하는 걸로 해요. 오빠 목소리 좋잖아요.”
한국어가 달린 리밍보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찬성한다는 뜻을 보였다. 대세가 내 쪽으로 기울었다. 나는 뿌듯했다. 조민지가 말했다.
“아, 죄송한데요. 그냥 형익 씨가 발표하면 안 돼요?”
조민지는 끝까지 나를 거부했다. 형익은 발표를 꺼렸다. 하기 싫어하는 눈치였다.
“제가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고…. 정 그러면 민지 씨가 하세요.”
“아니요! 전 잘…. 아무튼 저 말고…. 그, 그래요. 그럼 성민 씨가 하세요.”
조민지가 말 더듬은 적은 처음이었다. 모두 조민지의 의외의 모습에 놀랐다. 독선적이고 이지적인 조민지가 말을 더듬으며 남에게 굽히다니. 믿기지 않았다.
보슬이는 우주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연락이 없으니 그리웠다. 학교에서 한 번은 마주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보슬이와 나는 겹치지 않았다. 수업도 겹치지 않고 걷는 길도 겹치지 않았다. 시공간이 분리되니 같은 지구에 산다는 느낌이 안 들었다. 보슬이는 외계인이 분명했다. 나는 외계인의 납치를 기다리는 지구인. 문자를 보내면 2시간 뒤에 답문이 왔다. 안 올 때도 많았다. 내가 사는 지구와 보슬이가 사는 별이 서로 멀었기 때문이다. 전화는 연결되지도 않았다. 어쩌다 연결되면 이 말이 전부였다.
“저 지금 바빠서 이따 전화할게요.”
‘이따’는 얼마 정도일까? 내가 사는 지구에서는 최대 6시간 이내를 뜻한다. 통념적으로 그렇다. 6시간이 넘을 것 같으면 정확한 시간을 말하거나 ‘밤’ ‘내일’이라고 말한다. 보슬이가 사는 별에서는 다르다. 거기서 ‘이따’는 무량대수를 뜻한다. 기약 없는 영원한 시간이나 다름없다. 나는 언어의 의미 차이 때문에 오해를 당하고 불편을 겪었다. 전화를 기다리다 잠드는 날이 많았다.
집에서 게임 하는데 보슬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처음에는 안 받았다. 보슬이인 줄 몰랐다. 원래 게임 할 때는 전화를 안 받는 편이다. 전화가 또 왔다. 짜증 나서 핸드폰을 침대에 던지려다 수신자를 확인하니 보슬이었다. 냅다 받았다.
“보슬아! 미안, 오빠가 급한 일 있어서 전화를 못 받았다.”
“지금도 급하세요?”
“아, 아니. 하나도 안 급해. 이제 다 끝났어.”
“무슨 시끄러운 소리 들리는데….”
게임 소리였다. 스피커를 껐다. 어깨로 전화를 받은 채 게임을 계속했다.
“어, 그래. 무슨 일이야?”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전화하나요? 히히.”
“오, 아니지, 아니지. 뭐 별일 없고?”
“네. 오빠는요? 요즘 바쁘세요?”
몬스터 보스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보스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체력 좋은 기사들이 전방에서 칼을 휘둘렀고 민첩성 높은 마법사들이 후방에서 불을 쏘았다. 보스는 공격이 세고 맷집이 강했다. 레벨 높은 기사들이 몇 방에 떨어져 나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어! 보슬아, 말해.”
“요즘 바쁘냐구요.”
“아니. 전혀 안 바쁘지.”
보스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요정들이 합세했다.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요정들은 몬스터 조무래기들을 활로 쏘아 기사와 마법사를 도왔다. 기사와 마법사는 요정들 덕분에 보스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오빠 뭐 하는구나. 집중도 안 하고.”
“아, 아니야. 나 얘기 듣고 있어.”
한 손으로 전화를 받고 다른 손으로 마우스를 잡았다. 어깨에 있던 전화가 손으로 오니까 한결 나았다. 나는 마법사였기에 자리 좋은 곳에서 마법만 쓰면 됐다. 보슬이 얘기를 들으며 검지로 마우스 단추를 눌러댔다. 보스 체력이 절반 정도 깎였다.
“오빠, 문학에 대해 잘 알지 않으세요?”
“문학? 뭐 많이 알진 못하고….”
“오빠 책도 많이 읽고 학회 같은 것도 활동하잖아요.”
“음. 그렇지. 실존주의문학회만 몇 년 했으니까. 근데 문학은 왜?”
“다름이 아니라 제가 리포트를 써야 하는데 주제가 너무 어려워서….”
“주제가 뭔데?”
“카뮈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어떻게 다른지 비교 분석하는 거예요.”
보스가 죽을 위기에 처하자 조무래기들이 몰려왔다. 한두 마리였던 놈들이 떼가 되어 나타났다. 요정들의 활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조무래기 한 녀석이 나를 건드렸다. 맞서 싸우려다 귀찮아서 가만있었다. 조무래기의 약한 공격은 내게 무의미했다. 나는 보스가 쓰러지기만을 기다렸다. 조무래기는 요정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었다.
“오빠, 듣고 있어요?”
“어, 어. 카뮈 실존주의이랬지?”
“카뮈하고 사르트르요.”
“음, 그래. 꽤 심도 있고 의미 있는 주제구나.”
“인터넷으로 찾아봤는데 잘 모르겠어요.”
“그런 건 인터넷에서 찾으면 안 되지. 국회 도서관 가서 논문을 봐야지.”
조무래기가 신경 쓰였다. 녀석은 갈고리 같은 손으로 나를 긁었다. 긁을 때마다 체력이 조금씩 깎였다. 녀석은 낙숫물로 댓돌을 뚫겠다는 신념이었다. 마법으로 날려버리려다 관뒀다. 보스가 죽어가고 있었다. 내 근처에 있던 요정은 나를 본체만체했다.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시간이 없어서…. 별로 중요한 수업도 아니고. 죄송한데… 오빠가 좀 도와주시면 안 돼요?”
녀석이 언제 이렇게 때렸는지 체력이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한두 대만 맞으면 죽을 판이었다. 나는 요정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요정은 나를 무시했다. 보스가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나 같은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는 보스에게 향했던 커서(cursor)를 조무래기로 옮겼다. 마법을 쏘려는 순간 조무래기가 먼저 긁었다.
“안 돼!”
나는 뒈졌다.
“예?! 싫어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됐어요. 전 오빠가 도와줄 줄 알았는데. 제가 괜한 기대를 했네요.”
“보슬아, 오해야. 내가 너한테 한 말이 아니거든. 잠깐 뭐 좀 보느라, 암튼 내가 할게. 카뮈와 사르트르 비교랬지? 내가 할게.”
“오?! 정말요? 오빠, 고마워요. 역시 오빠 짱!”
나를 제외한 기사와 요정과 마법사가 보스를 쓰러뜨렸다. 보스가 죽자 조무래기들도 사라졌다. 하늘에서 돈과 무기와 보물이 떨어졌다. 모두 승리에 기뻐하며 그것들을 주웠다. 내 주검은 외롭고 처참했다.
보슬이 과제 때문에 처음으로 논문이란 것을 찾아보았다. 요즘에는 IT가 발달해서 학교 도서관 사이트만 접속하면 논문을 볼 수 있었다. 국회 도서관에는, 갈 맘이 나지 않았다. 아무리 보슬이를 위한다고 해도 거기까지 가는 일은 무리였다. 카뮈와 사르트르를 검색하자 논문이 수십 개 나왔다. 두 사람의 실존주의 사상을 비교 분석한 것이 많았다. 나는 몇 개만 내려받고 짜깁기했다. 그럴싸한 리포트 하나가 완성되었다.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넉넉잡고 1시간이면 족했다. 보슬이가 과제 잘 하고 있느냐고 문자를 보냈다. 나는 완성했으니 메일 주소 알려 달라고 답문을 보냈다. 메일 주소가 왔다. 나는 완성한 리포트를 보슬이에게 보냈다. 잠시 후 문자 하나가 왔다.
『땡큐염(/^o^)/♡』
하트였다. 여자한테 하트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기쁨과 당혹감이 밀려왔다. 하트를 왜 보냈을까? 의미 없는 이모티콘인가? 우리 사이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깊은가? 나를 남자 친구 정도로 생각하나? 나는 침대에 누워 하트를 고찰했다. 그냥 보냈을 리 없다. 리포트 도와준 감사의 표시는 ‘땡큐’로 족하다. 하트는 그 이상의 의미를 함축한다. 검은 하트도 아닌 하얀 하트. 검은 하트는 속이 찼지만 하얀 하트는 속이 비었다. 허전하고 공허한 마음을 채워 달라는 표식 아닐까? 둘도 아니고 하나다. 만약 둘 이상이었다면 하트는 무의미했을 것이다. 하나이어야만 의미가 부각된다. 나는 화면에 하트가 뜬 핸드폰을 가슴에 품고 눈을 감았다. 보슬이를 안은 느낌처럼 푸근했다. 메신저에 보슬이가 있을 것 같아서 컴퓨터를 켰다. 보슬이는 없었다. 대신 정하가 있기에 정하에게 말을 걸었다. 다짜고짜 하트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하트를 보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정하는 상황과 모양에 따라 다르다고 했다. 나는 보슬이에게 받은 문자를 정하 핸드폰으로 보냈다. 정하는 보더니 아무것도 아닐 확률이 높다고 했다. 이유를 물었다. 무의미한 이모티콘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얼굴 표정 말고 뒤에 달린 하트를 보라고 했다. 정하는 하트 또한 이모티콘에 불과하다고 했다. 정하가 모양만으로 판단하고 있었기에 나는 상황을 설명했다. 그동안 보슬이와 있었던 일을 모두 말했다. 술에 취했을 때 내게 매달린 일, 내가 보는 앞에서 군바리 남자 친구를 찬 일, 학교 근처에 놀러 와서 나를 부른 일 등. 정하는 상황을 듣더니 판단을 보류했다. 자기도 보슬이의 마음을 모르겠다고 했다. 남자 친구로 생각할 확률과 편한 오빠로 생각할 확률이 반반이라고 했다. 나는 첫 연애 감정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30에 드디어 여자 친구가 생긴 것이다.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분이 나쁘지마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여자와 이렇게 깊은 관계를 가진 적은 처음이었다. 내가 여자에게 하트를 받을 줄이야. 나는 여자인 정하에게 조언을 구했다. 정하는 일단 만나라고 했다. 만나서 대화를 나누며 의중을 떠보라고 했다. 정하에게 상담하니 기분이 나아졌다. 문제가 사라지고 답이 보이는 듯했다. 나는 정하에게 고마웠다. 자취방이 서로 가까우니까 언제 맥주나 같이하자고 말했다. 정하는 알았다고 했다.
며칠을 고민했다. 핸드폰을 집었다 놓는 짓을 반복했다. 전화해서 만나자고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설레고 떨렸다. 거절당할까봐 두려운 마음이 컸다.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다.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며 무엇을 먹을지, 조사가 필요했다. 전화했을 때 어떻게 말할지도 중요했다. 나는 최대한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말을 골라 문서로 작성하고 출력해서 외웠다. 잊어버릴 것을 대비해 출력물을 책상에 붙여 놓았다. 갈 곳은 영화관, 레스토랑, 청계천이었다. 먹을 것은 커피와 스테이크, 할 일은 영화감상과 대화와 산책이었다. 준비를 끝내고 보슬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느 때처럼 통화연결음이 길었다.
“여보세요?”
“보슬아, 나 성민 오빠야.”
“어, 오빠! 웬일이세요?”
“너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그 리포트는 어떻게, 잘 냈니?”
“리포트? 무슨…. 아, 실존주의요?”
“응. 내가 해준 거, 그거.”
“다행히 오빠 덕분에 잘 냈어요. 고마워요. 언제 보답 한 번 해야 하는데.”
보답이라는 말에 자신감이 생겼다.
“헤헤. 보답은 무슨. 근데 너 이번 주 주말에 시간 되니?”
“이번 주…. 왜요?”
물음이 날카로워서 당황스러웠다.
“음. 그니깐 벼, 별건 아니고. 시간 되면 만날까 해서.”
“만나요? 왜요?”
“너랑 나랑 아는 오빠 동생 사이로서 뭐랄까 그, 그냥 아무 목적 없는 친분적인 만남이랄까?”
얘기가 산으로 갔다. 책상에 붙인 출력물은 존재 가치를 잃었다. 나는 목적을 잃고 방황했다.
“저 주말에 약속 있는데.”
“아,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 밥이나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주중은 안 되니?”
“음…. 월화수는 힘들 것 같은데.”
“그럼 목요일! 목요일은?”
“목요일이라…. 그래요. 목요일날 봐요.”
잠을 설쳤다. 보슬이를 만나 실수하지 않을지 걱정됐다. 말도 똑바로 하고, 행동도 차분하게 해야 했다. 전과 다른 나를 보여줘야 보슬이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다. 고백까지 생각했지만 아직 무리인 듯했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기로 결심했다. 보슬이도 내게 어느 정도 마음을 열었으니 문제없었다. 일주일을 설렘으로 보냈다. 수업 시간에 보슬이와 영화 보는 상상을 했고, 혼자 밥 먹을 때 보슬이와 스테이크를 써는 상상을 했고, 하굣길에 보슬이와 청계천을 걷는 상상을 했다. 상상하면 할수록 자신감이 생겼다. 이미지(image) 훈련의 효과였다. 그날 분위기가 좋다면 고백까지 강행할 생각이었다. 나는 혼자 보내는 일주일이 외롭지 않았다.
미용실 가서 머리도 잘랐고, 옷도 세탁소에 맡겨 세탁했고, 영화관과 레스토랑도 예약했다. 전날 보슬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일 4시에 종각역에서 보자고. 30분 뒤에 답문이 왔다. 알았다고.
보슬이는 1시간이나 늦었다. 나는 1시간 동안 카페에서 핸드폰 게임을 했다. 보슬이가 언제 올지 몰라 영화 예매도 취소하지 못했다. 생돈을 날린 셈이다. 레스토랑 예약 시간은 7시였다. 나는 6시로 예약을 변경했다. 보슬이가 도착하면 6시까지 무엇을 할지 고민했다. 핸드폰 게임을 하며.
“오빠, 죄송해요. 제가 많이 늦었죠?”
나는 대인배(大人輩)다운 면모를 보였다.
“아냐,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제가 왜 늦었냐면요. 그래두 명색이 데이튼데 그냥 나올 수는 없잖아요. 좀 꾸미느라….”
말대로 보슬이는 어느 때보다 예뻤다. 피부는 화장했는지 안 했는지 모를 정도로 밝았고, 옷 색깔은 자연의 조화처럼 아름다웠고, 짧은 반바지 밑으로 드러난 다리는 육감적이었다. 늦은 일이 용서되었다. 둘이 카페에서 수다를 떨었다. 학업, 취업, 미래, 연예 얘기를 나눴다. 가끔 보슬이가 문자 보내느라 대화가 끊겼지만 많은 말이 오갔다. 보슬이와 오랫동안 대화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럼 오빠 재수한 거예요?”
“아니, 삼수. 서울까지 올라와서 기숙학원 다녔어.”
“그럼 거기서 밥도 먹고 잠도 자고 공부도 하고 그런 거예요?”
“그렇지! 아예 생활을 거기서 하는 거야. 집이랑 학원이랑 합쳐진 셈이지. 아 진짜 그때만 생각하면 정말….”
“재수나 삼수한 사람들 얘기 들어보면 다 딱하고 슬프던데. 전 정말 쉽게 대학 와서….”
“적어도 재수 정도는 해봐야 인생이 뭔지 알지. 난 재수할 때 철들고 삼수할 때 해탈한 것 같아.”
“하, 네.”
“넌 정시로 온 거야?”
“아뇨. 저 1학기 수시로 왔어요.”
“와 그래? 그럼 수능 안 봤겠네?”
“네. 고3 때 합격 발표 나서 수능 공부도 안 했죠.”
“완전 땡보네.”
“땡보가 뭐예요?”
“아, 그냥 군대 용어야. 좋다는 뜻이야.”
“땡보….”
“수시 뭘로 시험 봤는데? 논술?”
“아뇨. 저는 내신이랑 구술 봤어요.”
“우리 학교 수시로 왔을 정도면 내신 좋았다는 건데. 몇 등급이었어?”
“등급 그런 건 잘 모르겠구요. 그냥 다 ‘수’고 전교 몇 등 안에는 항상 들었어요.”
“그 정도면 수능 봐서 더 좋은 대학 갈 수 있었을 텐데.”
“실은 제가 모의고사 점수가 좀 안 나와서….”
“몇 점 정도 나왔는데? 그래도 350은 넘었을 거 아니야. 아니, 너희 때는 500점 만점이었지? 한 450?”
“아, 아뇨. 그냥….”
“아아. 뭐 그럴 수도 있지. 내신을 잘하는 애가 있는가 하면 수능을 잘하는 애가 있으니까. 난 아무래도 수능 쪽이었던 거 같아. 내가 삼수할 때 10월 모의고사 480점 나왔거든. 그때 그 컨디션만 계속 유지했다면 서울대 갔을 텐데.”
“예, 안타깝네요….”
침묵이 흘렀다.
“너 유도 봐?”
내가 물었다.
“유한도전이요? 저 완전 팬이에요. 한 주도 안 빼고 매주 보는데.”
“크크크. 나도. 난 유한도전이랑 슈스비케 때문에 살아. 그게 일주일을 버티는 활력소야.”
“슈퍼스타 BBK! 저도 그거 진짜 좋아해요. 집에서 할 일 없을 때 맨날, 아니 만날 재방송 보는데.”
“그럼 토성인 바이러스도 봐?”
“저 그거 1회부터 지금까지 다 봤어요.”
“와 그래? 애청자네.”
“근데 그거 뭐 이상한 시사 프로그램 때문에 방송 시간 밀렸잖아요.”
“PD슬쩍.”
“맞아요. 완전 황금 시간대였는데 괜히 재미없는 게 들어와서….”
“하여간 방송사도 정말 바보 같다니까. 재밌고 유익한 걸 내보내야 시청률이 올라가지. 정치적이고 사회 불평만 하는 방송을 누가 보고 싶겠어?”
“그 PD슬쩍, 광우병 때문에 문제되지 않았어요?”
“그때 없어져야 했는데 뭐 어떻게 겨우 살아남았잖아. 그것도 애청자가 좀 있더라구. 왜 그 막 북한 옹호하고 시위 잘 나가는 애들 있잖아.”
“알 것 같애요.”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고 청계천에 갔다. 해가 지니까 날씨가 쌀쌀해졌다. 보슬이가 추워해서 내가 겉옷을 벗어주었다. 둘이 걸으니까 연인 같았다. 보슬이도 말이 없고 나도 말이 없었다. 무언의 순간 속에 설렘과 흥분이 싹텄다. 보슬이도 느꼈을까?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 나는 손을 잡을까 말까 고민했다. 잡아도 보슬이가 빼지 않을 것 같았다. 어깨동무까지 가능한 분위기였다. 우리는 이미 팔짱까지 낀 사이니 이상할 것이 없었다. 나는 시험 삼아 손을 스쳤다. 보슬이 손등과 내 손등이 부딪히며 교감이 발생했다. 보슬이는 놀라거나 움츠러들지 않았다. 손을 잡아도 된다는 신호였다. 나는 숨을 들이쉬고 보슬이 팔 안에 내 팔을 걸어 손을 잡았다. 손가락을 넣어 깍지도 꼈다. 보슬이 손 안은 따뜻했다. 우리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걸었다. 마치 영화 속 장면 같았다.
청계광장에 군중이 모여 있었다. 경찰버스가 광장을 가로질러 길을 막았고, 전투경찰이 군중과 대치했다. 낌새가 이상해서 보슬이와 나는 멀리 피했다. 빨간 머리띠를 매고 시위 팻말을 든 군중이 전투경찰을 밀어내 진입을 시도했다. 팻말에는 ‘FTA 결사반대’ ‘Free Trick Agreement' '맹장수술 900만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광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군중은 고함지르며 난동을 피웠고, 전투경찰은 맞아가며 방패로 막았다. 나는 전경들이 불쌍했다. 시위대만 없었다면 내무실에서 TV를 보며 쉬고 있었을 테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고 자기 이득밖에 모르는 시위대 때문에 국력과 청춘이 낭비되고 있었다. 나는 조국의 앞날이 걱정되었다.
시위대를 피해 청계다리로 내려갔다. 다리 쪽은 광장과 분위기가 달랐다. 놀러 나온 연인들이 물가에서 쉬고 있었다. 보슬이가 높은 힐을 신어 발을 아파했다. 우리도 물가에 앉아 쉬었다. 보슬이가 힐을 벗고 발을 담갔다. 물이 차가운지 담갔다 빼고 다시 넣었다. 보슬이는 발도 예뻤다. 희고 가느다란 발가락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맨발을 보자 성욕이 발동했다. 보슬이 다리를 잡고 발을 빨고 싶었다. 변태적인 상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나는 물에 담긴 발을 보며 말없이 있었다.
“오빠?”
“응?”
“무슨 생각 해요?”
“어, 그냥….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내가 잘하는 게 무얼지….”
“오빠도 그런 거 걱정하는구나. 남자들 취업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는 것 같아요. 물론 여자도 마찬가지지만.”
“그렇지. 먹고 사는 측면에서도 중요하지만, 내가 사회에서 쓰임당하지 못한다는 게 존재론적인 위협이자 스트레스잖아.”
“음… 무슨 말인지 알 거 같아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도 누군가 함께 살려고 해도 일단 자기 존립 기반이 있어야 하거든. 내가 내 스스로 이 세상을 버티는 힘 또는 경제적인 능력? 뭐 그런 거 있잖아. 그게 있어야 서로 떳떳하고 당당하게, 그리고 대등한 시각으로 서로 존중하면서 사랑할 수 있어. 근데 아직도 미래가 불투명한 학생이니까 사랑이 조금 망설여지기도 하는 거지.”
“맞아요. 남자는 여자처럼 시집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엉? 웬 시집?”
“여자는 결국 하다 안 되면 결혼하잖아요. 최후의 보루랄까?”
“으응. 그치. 반면에 남자는 결혼하려면 많은 걸 준비해야 되지.”
“오빠는 결혼 언제 할 거예요?”
결혼 얘기에 놀랐다. 우리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보슬이는 진도가 빨랐다.
“내가 나이가 나이인 만큼 좀 일찍 하고 싶은데, 근데 그게 맘대로 되나.”
“오빠가 슴 몇 살이죠?”
“서른….”
“헐. 어쩌다, 아직 학생인데….”
“남자는 군대 가잖아.”
삼수도 했고, 군대도 갔고, 휴학도 했다. 나이 얘기가 나오니까 비참해졌다.
“하긴 뭐 요즘은 다 늦게 결혼하니까.”
“나 아직 안 늦었어. 이제 졸업하고 취업하면 딱 서른인데 뭐.”
“그럼요. 안 늦었어요.”
나이 문제 통과! 이번엔 보슬이가 직장 문제를 꺼냈다.
“졸업하면 뭐 할 거예요?”
“사실 준비하고 있는 게 있거든. 공기업 쪽 알아보고 있어.”
“우와! 공기업이라면 뭐 환경관리공단이나 중소기업진흥공단 같은 데죠? 거기 월급도 쎄고 짤리지도 않는다 던데.”
“신의 직장이지. 난 금감원 생각하고 있는데….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보장되니까.”
“근데 어렵죠? 거기 다니는 사람들 스펙 장난 아닐 것 같애. 막 다 서울대고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야. 작년에 우리 학교 학생 하나 들어갔어. 스펙도 좋아야 하지만, 그 시험도 잘 보고 면접도 잘 봐야 돼.”
“오빠가 꼭 들어갔으면 좋겠다.”
마지막 말이 의미심장했다. 내가 들어가는데 자기가 왜 좋을까? 나를 편한 오빠로만 생각한다면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직장 문제도 통과된 듯했다. 이제 내가 물어볼 차례였다.
“보슬이는 연애 안 할 거야? 외롭지 않아?”
“글쎄요. 헤어진 지 얼마 안 돼서 아직은 선뜻 마음이 나지 않아요.”
“조,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좋아하는 사람요?”
“그냥 뭐 관심 있는 사람이나, 누가 고백한다면 받아줄 의향이 있는지….”
“솔직히 외롭기야 하죠. 근데 누가 저한테 고백 같은 거 하겠어요.”
“왜? 너 정도면 고백하는 남자가 줄을 설 것 같은데. 이쁘고, 키 크고, 학벌 좋고, 성격도 활발하고. 빠지는 게 없다, 야.”
“헤헤. 오빠 맨날, 아니 만날 나한테 좋은 얘기만 해주잖아요.”
“아니야. 나 진심이야.”
보슬이가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였다. 분위기가 야릇해졌다. 나는 보슬이를 쳐다보았고, 보슬이는 내 눈빛이 부담스러운지 혼자 발장난만 쳤다. 발 주변에서 물거품이 생멸을 거듭했다. 그것은 고백을 고민하는 내 마음 같았다. 나는 능동적인 입장이었고 보슬이는 수동적인 입장이었다. 분위기가 이렇게 된 이상 무엇이든 내가 먼저 해야 했다. 나는 보슬이와 앉은 거리를 좁혔다. 어깨와 어깨, 엉덩이와 엉덩이가 닿을 듯 말 듯했다. 보슬이는 가만있었다. 내 행동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밤이 깊었고 조명이 켜졌다. 밤공기가 구수했고 기온은 쌀쌀하면서 아늑했다. 청계천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누가 만들었는지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흐름에 편승해 보슬이의 허리를 등 뒤로 감쌌다. 보슬이가 움찔했으나 내가 남자답게 움찔한 동작을 제어했다. 꼼짝 못하게 허리를 잡으니까 보슬이도 어쩔 수 없었다. 고개가 내 어깨로 떨어졌다. 보슬이는 내 어깨 기대어 쉬었다. 나는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보슬이가 내 여자가 된 것이다. 내친김에 고백하려다 참았다. 말보다 침묵이 유리할 때가 있다.
도곡동까지 보슬이를 바래다주었다. 집에 오니 12시가 넘었다. 보슬이한테서 집에 잘 들어갔다고, 오늘 즐거웠다고 문자가 왔다. 나는 장문으로 답문을 보냈다. 오늘은 잠을 설치지 않을 것 같았다. 이 기쁨을 누구에게 알리고 싶었다. 알릴 사람이 정하밖에 없었다. 씻고 나와 침대에 누워 정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오래갔다. 자는 듯싶어서 끊으려는데 정하가 받았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어두웠다.
“정하야, 잤어?”
“아뇨. 안 잤어요.”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안 좋아 보이네.”
“아, 아녜요. 아무것도.”
“나 오늘 만나고 왔다. 크크. 무슨 일 있었는 줄 알아?”
“그 여자분 만났어요?”
오늘 있었던 일을 말했다. 손 잡은 일도, 어깨에 기댄 일도 말했다. 정하는 축하한다며 보슬이가 나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네 덕분이라며 정하에게 고마워했다. 정하는 기쁘지 않은 듯했다. 어두운 목소리는 밝아지지 않았다.
“너 고민 있지? 그치? 이 선배한테 다 말해봐.”
“없어요. 진짜예요.”
“에 없긴 뭐가 없어. 목소리만 들어도 딱 알겠구만. 너 그렇게 담아두면 오히려 병 돼.”
정하가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실은요. 정욱 오빠 때문에 그래요.”
“왜? 정욱이가 뭐 사고 쳤어?”
“요즘 전화도 없고 만나자고 해도 바쁘다고 하길래 그냥 그런 줄 알았거든요. 근데 뭔가 수상해서 며칠 전에 핸드폰 몰래 봤는데, 그 예진이 알죠? 저희 학회 신입생.”
“어, 그 11학번? 알지!”
“걔랑 문자 보내고 그랬더라구요.”
“음…. 그냥 선후배 간의 문자가 아니었을까?”
“그랬으면 제가 이러지도 않죠. 거의 맨날 수시로 연락했더라구요. 문자 내용도 가관이에요. 막 자기야 그러고 하트 같은 이모티콘도 있고…. 저한테는 그렇게 문자 안 하거든요.”
“오 이럴 수가. 정욱이가 그랬다니 믿기지 않는데.”
“저한테 소홀해진 날이랑 걔랑 연락하기 시작한 날이 비슷하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오빠한테 물어보기 전에 제가 걔한테 전화했거든요.”
“예진이한테?”
“네. 그게 더 빠를 것 같아서요. 전화했더니 처음엔 아니라고 막 잡아떼는 거예요. 그래서 문자 보낸 거 다 봤다, 거짓말 하지 마라,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나랑 오빠랑 사귀는 거 몰랐다고 하더라구요.”
“헐. 쇼킹하다. 그럼 둘이 사귀었던 거야?”
“사귄 건 모르겠는데 둘이 좋아한 건 맞아요.”
“그래서? 정욱이한테도 말했어?”
“아뇨.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중이에요.”
“와 진짜 어떻게 이런 일이 있냐? 이게 무슨 막장 소설도 아니고. 정욱이같이 바른 애가 바람을….”
파리가 눈앞을 알짱거렸다. 몸집이 자그마한 새끼였다. 손을 휘두르니까 멀리 사라졌다.
“이미 걔랑 말 맞춰놨을지도 몰라요. 사실 오빠가 전에도 이런 적 있었거든요.”
“전에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 말이지?”
“네. 그때는 교양 수업에서 어떤 여자랑 눈 맞아서, 아 내가 이런 얘길 왜 하고 있지. 미안해요, 선배.”
“아냐, 아냐! 괜찮아. 나 이거 아무 데서도 말 안 해. 계속 얘기해봐. 얘길 해야 니 마음이 풀리지.”
“그때도 증거 있는데 아니라고 잡아떼는 거예요. 그냥 제가 져줬죠. 근데 이번에 또 이럴 줄이야.”
파리가 또 와서 나를 괴롭혔다.
“아 진짜 짱나게!”
“네? 화나셨어요?”
“아, 아니. 너한테 한 말 아니야.”
보니까 한 마리가 아니었다. 벽에 붙은 놈까지 합하니 세 마리였다. 어디서 파리가 들어왔는지 알 길이 없었다. 더러운 것을 못 참는 성격이라 신문지를 말아 잡았다. 일전에 미친 똥파리가 알을 깐 듯했다.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새끼가 날아다니다니. 파리의 번식력은 무서웠다.
“선배, 근데 내일 준비는 잘 된 거죠?”
“내일?”
“네. 발표하잖아요.”
정하가 말 안 했다면 모를 뻔했다. 내일 ‘현대예술철학의 이해’ 과제 발표하는 날이었다. 수업 시작이 오전 10시인데 지금은 새벽 1시였다. 최대 10시간 안에 준비를 끝마쳐야 했다. 정하와 전화를 끊고 조 모임 클럽에 들어갔다. 조민지가 발표문을 올려놓은 상태였다. 나는 발표문을 내려받고 출력해 읽고 외웠다. 외우려고 노력했다. 긴 글을 외울 수는 없었다. 10시간 내에 그것은 내 머리로 불가능했다. 나는 발표문을 보면서 발표할 작정으로 읽어만 보았다. 조민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발표는 당연히 외워서 해야겠죠. 외웠다고 해서 그냥 줄줄 내뱉는 게 아니라 실제 말하듯이 해야 하고요. 교수님 눈 보면서 하는 것도 잊지 마세요.”
미친년. 이렇게 긴 글을 언제 외우라는 말인가. 그렇게 열심히 하고 싶으면 자기가 발표할 것이지. 물론 내가 한다고 나섰지만 자기도 한다고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는 못하겠다며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 않았는가. 생각하면 할수록 쌍년이었다. 학점에 목매는 년이랑 과제를 같이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근데 왜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 못되게 군 적도 없는데. 내가 언제 말실수했나?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일이 없었다. 조민지는 처음부터 나를 경계했다. 과제 같이해도 되느냐며 물었을 때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개 같은 년, 눈깔을 콱 파버려! 나는 허공에 눈 찌르는 시늉을 했다.
조민지를 고찰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나는 새벽까지 발표문을 읽으며 조민지가 나를 괴롭히는 이유를 규명했다. 눈은 발표문을 향했고, 뇌는 조민지를 향했다. 오전 2시 14분께 혜안이 열렸다.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 조민지가 나를 괴롭히는 이유가 밝혀졌다.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오밤중에 웃음이 절로 터졌다. 나는 발표문을 던지고 침대에 누워 잤다.
10시에 학교에 도착했지만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다. 교수가 출석을 부르고 있었다. 나는 뒷문에 달린 유리를 통해 강의실을 들여다봤다. 우리 조는 조민지와 리밍보만 보였다. 형익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어디야?”
“형, 죄송해요. 저 늦잠 잤어요. 지금 금방 갈게요.”
“아, 그래? 괜찮아. 늦게 와도 돼.”
“발표 시작했어요?”
“응. 이제 시작할 거 같아. 어차피 늦었으니까 그냥 오늘 안 와도 돼.”
“그래도 그건 안 되죠. 죄송해요. 제가 원래 늦잠 같은 거 절대 안 자는데.”
“괜찮아. 서두르다 사고 날지 모르니까 천천히 와.”
“네. 집이 인천이라서 좀 걸릴 거예요. 아마 수업 끝나고 도착할지도….”
“그래?”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전화를 끊고 정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 정하가 연락도 없이 수업을 빠질 리가 없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었다. 정화와 형익이 없으니 발표할 사람은 조민지뿐이었다. 리밍보가 발표할 리는 없을 테고.
우리 조 차례가 되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뒷문에서 강의실을 엿보았다. 교수가 발표자를 불렀다. 조민지와 리밍보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조민지는 네가 하면 안 되냐는 눈빛이었고, 리밍보는 네가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눈빛이었다. 조민지가 교수에게 말했다.
“교수님, 저희 조가 아직 다 안 와서 그런데 맨 마지막에 하면 안 될까요?”
여기저기서 불만이 쏟아졌다. 조민지는 필사적으로 발표를 피했다. 교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학생들의 불만과 야유 속에 조민지가 강단에 섰다. 안색이 창백하고 표정이 굳어 있었다. 손에 들린 발표문이 떨렸다. 평소와 다른 조민지의 모습이었다. 나는 키득대며 강의실에 들어갔다. 조민지 눈에 잘 들어오도록 정중앙에 앉았다. 나는 여유만만한 자세로 발표를 감상했다. 조민지가 첫 문장을 내뱉자 강의실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목소리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웃겼다. 긴장과 떨림에 성대가 짓눌려 소리가 가성으로 새어 나왔다. 교수도 웃긴지 고개를 돌렸다. 조민지의 증세를 파악한 학생들이 웃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발표 끝날 때까지 키득거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교수는 시도 때도 없이 헛기침했다. 헛기침으로 웃음을 참으려는 것이었다. 나는 조민지가 나를 바라봐주기를 바랐다. 눈이 마주치기를 바랐다. 내가 일부러 늦게 왔다는 사실을 조민지가 알기를 바랐다. 조민지는 허공만 응시하며 긴장과 떨림을 온몸으로 감당했다. 불쌍해 보여서 내가 대신 발표할까, 라는 생각도 들었으나 조민지가 나를 괴롭힌 일이 떠올라 관뒀다. 발표가 끝나고 조민지는 강의실을 나갔다. 모두 조민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조민지는 교수가 보든 말든 학생이 보든 말든 개의치 않고 가방을 싸서 나갔다. 그 모습이 불쌍하지만, 웃겼다. 교수가 강의실 분위기를 수습했다. 학생들이 진정을 되찾았다. 다음 조가 나와 발표를 시작했다. 나는 조민지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각해서 죄송해요. 제가 방금 왔는데 저희 발표 잘한 거 맞죠?』
답문은 영영 오지 않았다. 문자가 씹혔는데 기분이 좋았다.
때는 4년 전. 내가 복학했을 당시. 나는 짧은 머리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들을 과목이 없어서 2학점짜리 교양 하나를 들었다. 스피치 능력을 기른다는 명목 하에 학교에서 마련한 수업이었다. 전교생이 무조건 들어야 했다. 대학생에게 수업 강요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첫날부터 언짢은 마음으로 수업에 임했다. 학생은 30명 정도밖에 안 되었다. 교수가 자기소개를 시켰다. 스피치 수업이니 낯선 사람과 친해지려면 자기소개가 필수라고 했다. 재수 없게 내가 첫 번째로 걸렸다. 당시 예비군 1년차도 안 된 복학생의 오만과 허세가 하늘을 찌르던 상태였다. 짧게 말하고 순식간에 앉았다. 교수는 탐탁해하지 않았다. 똘똘한 신입생들은 학점을 잘 받으려고 길게 말했다. 거의 연설 수준이었다. 자기에 대해 저렇게 할 말이 많다니. 놀라웠다. 입학하기 전에 웅변 학원이라도 다닌 듯했다. 한 여학생 차례가 왔다. 여학생은 일어나더니 아무 말도 안 했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 말도 못 했다. 입을 오물거렸으나 소리가 작아 알아듣지 못했다. 교수가 여학생의 답답한 행동에 화가 나서 목소리를 높이라고 말했다. 여학생은 몸을 떨고 식은땀을 흘렸다. 보는 사람이 불안할 정도였다. 나는 여학생을 앉힌 뒤 진정시키고 싶었다. 내가 교수였다면 그랬을 것이다. 수업에 대한 욕심이 큰 교수는 자기소개를 중단하지 않았다. 여학생의 증세가 수업을 통해 극복된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여학생은 들릴 정도로 소리를 냈는데, 소리를 듣고 교수와 학생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목에 무언가 걸린 듯, 울먹이는 듯, 바람이 새는 듯 아무튼 언어로 표현이 불가능한 소리였다. 교수가 자기소개를 중단하고 여학생을 앉혔다. 실컷 웃어 놓고 자비를 베풀 듯 여학생을 배려하는 교수가 얄미웠다. 여학생은 수업 도중에 나가버렸다. 그 뒤로 종강할 때까지 오지 않았다. 그 여학생이 조민지다.
밤에 보슬이와 통화했다. 내 목소리를 듣고 보슬이가 기분 좋은 일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좋은 일 있다고 답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같은 조인 여자애가 발표를 잘해서 학점을 잘 받을 것 같다고 답했다. 보슬이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나는 조민지의 심정이 어떠할지 상상했다. 상상이 될 듯하면서 안 됐다. 내가 사악한 것 같아서 상상을 멈추고 통화에 집중했다. 보슬이는 자기 일상을 얘기했다. 나는 호응해주며 듣기만 했다. 이상하게 자꾸 조민지가 생각났다. 덩달아 SFC에 대한 궁금증까지 치솟았다. 나는 보슬이에게 SFC를 아느냐고 물었다. 보슬이는 모른다고 답했다. 보슬이까지 모른다고 하니까 더 궁금해졌다. 스파이 집단이 아닐지 의심되었다. 보슬이와 1시간 넘게 통화했다. 통화를 끝내고 컴퓨터를 켰다. 인터넷으로 SFC를 검색했다. 축구동호회, 선교연합회, S그룹 면세점 등 별것이 다 나왔다. 한참 찾다가 ‘SFC 카페입니다. 동참하실 분은 가입하세요.’라는 문구를 발견했다. 예감이 좋았다. 들어가니 대문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Seoul Feminist Crew. 서울 페미니스트 크루?
이런 시발! 허탈하고 놀랍고 가소로웠다. 카페에는 페미니스트의 사상과 강령이 공개돼 있었다. 나는 하나씩 읽었다.
첫째, 연애도, 결혼도 하지 않는다.
둘째, 남자는 최대한 멀리한다.
셋째, 남자에게 ‘오빠’라고 부르지 않고 서로 존댓말 한다.
넷째, 노출이나 남자에게 잘 보이려는 옷차림을 삼간다.
다섯째, 머리는 짧은 커트나 단발을 평생 유지한다.
여섯째, 성형이나 미용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다.
일곱째, 출산과 입양은 허용한다.
여덟째, 남자에게 웃지 않는다.
아홉째,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여성차별에 헌법소원을 제기한다.
열째, 모든 여성을 페미니스트로 교화하는 데 힘쓴다.
사진 게시판에는 페미니스트 패션이 게시돼 있었다. 사진 속 여자들의 옷차림은 조민지와 흡사했다. 조민지처럼 단발이고, 조민지처럼 투박한 외투를 입고, 조민지처럼 청바지를 입고, 조민지처럼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도 똑같았다. 나는 조민지의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조민지는 정신병질 남성콤플렉스 여성우월주의자였다. ‘페미니스트’는 그럴 듯한 말에 불과했다. 나는 조민지에게 연민을 느꼈다. 도울 수만 있다면 돕고 싶었다. 복합적인 심정을 느꼈다. 침대에 누워 조민지를 생각하는데 전화가 왔다. 정하였다.
“여보세요?”
“선배, 정하에요. 통화 가능하세요?”
“응. 너 오늘 왜 안 왔어?”
“죄송해요. 저 그냥 집에 있었어요.”
“왜? 무슨 일 있었어?”
“맥주 한 잔 하실래요?”
동네 호프집에서 만났다. 대충 뭔지 알 것 같았다. 정욱과 관련된 일이 뻔했다. 후라이드치킨 한 마리와 맥주500 두 잔을 시켰다. 정하는 시무룩했다. 며칠 사이에 얼굴이 핼쑥해졌다. 정하는 아무 말 없다가 눈물을 흘렸다. 여자가 우니까 사람들이 쳐다봤다. 내가 정하를 울린 꼴이 되었다. 나는 휴지를 뽑아주었다. 정하는 마음을 가다듬고 얘기를 시작했다. 정욱에게 예진과 무슨 사이냐고 물었다고, 정욱이 발뺌했다고, 시인하면 용서하려고 했는데 뻔뻔하게 나오니까 자기도 화가 났다고, 둘이 싸웠다고, 정욱이 예진을 사랑한다며 헤어지자 했다고, 슬퍼서 매달리니까 자기를 걷어찼다고 했다. 나는 분노를 느꼈다. 아무리 동기지만 정욱을 편들 수 없었다. 정하는 맥주를 들이켰다. 술이 들어가자 말을 많이 했다. 정욱이 첫 남자라고, 자기도 전부터 좋아했다고, 문자 주고받다가 친해졌다고, 놀이동산에 놀러 가서 정욱이 사귀자고 말했다고, 사귄 지 일주일 만에 몸을 허락했다고, 정욱이 졸라서 어쩔 수 없었다고, 정욱을 믿었다고, 정욱과 결혼할 생각까지 했다고 정하는 말했다. 정하의 얘기를 듣고 있자 분노가 사라지고 무료가 찾아왔다. 나는 졸리고 귀찮았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 넘어 있었다. 정하는 술에 취해 탁자에 엎드렸다.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하의 주머니를 뒤져 정하 돈으로 계산하려다 그것은 추잡한 짓이라는 것을 깨닫고 내 돈으로 계산했다.
정하를 업고 정하가 사는 자취방에 도착했다. 정하를 바닥에 눕히고 나도 힘들어 옆에 누웠다. 여자애가 은근히 무거웠다. 나는 숨만 돌리고 나갈 생각으로 쉬었다. 정하가 사는 자취방은 비좁았다. 한 사람이 겨우 살 만한 공간이었다. TV도 없고 침대도 없었다. 가구라고는 옷장과 수납장과 노트북이 전부였다. 나는 정하가 어렵게 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전에 정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르바이트해서 번 80만 원으로 한 달을 지낸다고. 방값이 40만 원이라고 했다. 등록금은 어떻게 내느냐고 물으니 부모님이 100만 원을 대주고 나머지는 학자금대출로 충당한다고 했다. 장학금을 받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했다. 나는 정하에게 연민을 느꼈다. 정욱이, 그 시발놈은 이렇게 착하고 여린 애를 차버리다니. 나는 모로 누워 정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두운 탓인지, 내 감정 탓인지 정하가 예뻐 보였다. 나는 몸을 밀착해 정하와 접촉했다. 정하는 깨어날 생각을 안 했다. 남녀가 좁은 방에 단 둘이 있으니까 기분이 야릇했다. 나는 용기 내어 손으로 정하 허리를 감쌌다. 정하의 온기가 내 품으로 흡수됐다. 성기가 부풀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발기가 되었다. 당황스러웠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성기를 정하 허벅지에 댔다. 정하가 몸을 뒤척이며 엉덩이를 성기에 밀착했다. 하마터면 놀라 소리 지를 뻔했다. 나는 정적이 흐를 때까지 가만있었다. 온 신경이 성기에 집중되었다. 나는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정하의 엉덩이 사이에 내 성기가 자리했다. 두 봉우리 사이에 착륙한 비행기 같았다. 나는 정하가 깨지 않게 조심하며 허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움직일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이대로 계속한다면 사정도 할 것 같았다. 발단과 전개를 넘어 위기에 다다르자 움직임이 빨라졌다. 나는 정신없이 흔들어댔다. 바닥에 바지 쓸리는 소리가 났지만 들리지 않았다. 위기에서 절정에 다다르려는데 정하가 깨어났다. 나는 정하가 깬 줄도 모르고 흔들다가 정하 손에 성기를 잡혔다. 엉덩이에 길고 뜨끈한 것이 잡히자 정하가 놀라 일어났다.
“끼아악! 도둑이야!”
“정, 정하야, 나야, 나. 도둑 아니야.”
“누, 누구? 선배에요?”
“그래, 나야. 너 술 취해서 내가 집에 데리고 온 거야.”
나는 가운데를 손으로 가리고 무릎을 꿇었다.
“근데 여기서 뭐 하세요?”
“나 방금 너 업고 와서 잠깐 있었던 거야.”
“저 껴안고 있었잖아요.”
“껴안기는 무슨. 너무 힘들어서 나도 누워 있었던 거야.”
“거짓말 마요. 뒤에서 이상한 짓 했잖아요.”
“내, 내가 언제? 너 정말, 내가 얘기까지 들어주고 집까지 데려다 줬는데 이러기야?”
“가세요…. 빨리 가요! 안 가면 신고할 거예요.”
“와 진짜 어이가 없네. 너 그렇게 안 봤는데.”
나는 태연한 척하며 자취방을 나오고, 나오자마자 도망쳤다. 집에 와서 자는데 잠이 안 왔다. 정하의 신고로 경찰이 들이닥칠 것 같았다. 나는 인터넷으로 성추행과 성폭행의 차이를, 성추행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검색했다.
나는 세 여자를 잃었다. 정하, 조민지, 보슬이. 정하는 그날 이후 수업에 오지 않았다. 나는 정하와 마주칠까봐 맨 뒤에 앉았는데 정하는 보이지 않았다. 교수가 출석을 불러도 침묵이 대신할 뿐이었다. 학교에 소문이 돌았다. 정욱이 예진과 바람나서 정하를 찼고, 정하가 실연의 슬픔 탓에 자취방에서 칩거한다는 것이었다. 내 얘기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학교를 조용히 다녔다. 만나는 사람과 나누는 대화가 많아질수록 치부가 드러날 가능성이 컸다. 나는 수업이 끝나는 대로 집에 왔다. 집에 있어도 마음은 불편했다. 언제 경찰이 들이닥칠지 몰랐다.
조민지는 수업에 와도 조원과 아는 척하지 않았다. 수업이 시작될 때 강의실에 들어와서 혼자 수업을 듣고 수업이 끝나면 강의실을 나갔다. 단발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 투박한 외투, 접어 입은 청바지, 아빠 신발 같은 운동화는 변함없었다. 언젠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조민지에게 인사한 적이 있다. 장소는 학교 복도였다. 조민지는 나를 본체만체하고 지나갔다. 나는 조민지의 뒷모습에서 쓸쓸함을 느꼈는데 발표 목소리가 생각나자 웃음이 터졌다. 나는 웃으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웃었다.
보슬이는 우주를 떠났는지 연락이 두절되었다. 주말에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전날까지 소식이 없었다. 나는 음성사서함을 남겼다. 내가 잘못한 일 있느냐고, 사고당한 것은 아니냐고, 음성 듣는 즉시 연락 달라고 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사이는 연인이나 다름없었다. 손도 잡고, 어깨에 기대고, 통화도 1시간이나 하지 않았는가. 나는 보슬이의 변심을 고찰했다. 조언을 구할 정하가 없으니까 답이 불투명했다.
오래도록 혼자 지내면서 나는 위기감을 느꼈다. 수컷의 급박함이라고 할까. 서른인 내가 할 일은 여자를 잡는 것이었다. 취업도 중요하지만 취업은 급박함을 해결할 수 없었다. 사회에 나간다고, 직장에서 일한다고 급박함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취업은 졸업이 선결되어야 가능했기에 나는 여자부터 생각했다. 정 안 되면 조민지에게 참회하고 그녀라도 붙잡을 생각이었다. 조민지는 정신병을 해결하고 맵시만 다듬으면 괜찮을 듯싶었다. 나는 조민지와 섹스하는 상상을 하며 자위도 해봤다. 조민지가 페미니스트였던 탓일까. 흥분과 쾌감이 어느 때보다 달달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쪽은 보슬이였다. 보슬이는 행방불명됐을 뿐이지 나를 버린 것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생활비가 떨어졌다고 거짓말했다. 어느 정도 참말이기도 했다. 엄마가 돈 좀 아껴 쓰라며 20만 원을 송금했다. 장미꽃 사는 데 2만 원, 고구마 케이크 사는 데 2만 원, 도곡동 가는 데 1만 원 들었다. 나머지 15만 원으로 형익이 추천한 강의를 들을 계획이었다. 고백에 성공하면 여자 친구가 생겨서 좋을 것이고, 고백에 실패해도 열심히 공부할 테니까 좋을 것이었다. 나는 택시를 타고 도곡동으로 향했다. 택시에서 보슬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는데 보슬이가 받지 않았다. 오기가 나서 계속 걸었다. 정확히 14번 걸었다. 보슬이는 받지 않았다. 아파트 입구에 도착해서 문자를 보냈다.
『집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하고싶은 말이 많아』
답문은 오지 않았다. 나는 한 손에 장미꽃을, 다른 손에 케이크를 들고 보슬이를 기다렸다. 주민 한 사람이 내가 뭐 하는 놈인지 궁금한 듯 아파트 위에서 쳐다봤다.
외제차 한 대가 아파트 단지에 들어왔다. 전조등이 밝아서 눈에 띄었다. 나는 눈이 부셔서 얼굴을 찡그렸다. 외제차는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길을 비키려고 물러섰다. 외제차가 내 앞에 서더니 거기서 한 남자가 나왔다. 키가 크고 멋진 남자였다. 그가 내 멱살을 잡았다.
“이 개새끼야, 너 뭐하는 새끼야. 어?! 뭔데 자꾸 남의 여자한테 연락하고 지랄이야?!”
나는 장미꽃과 케이크를 든 손으로 저항했다. 남자는 나를 흔들고 위협했다. 내가 손 놓고 얘기하자고 해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나는 온몸으로 그를 뿌리쳤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나도 놀랐다. 장미꽃과 케이크가 다치지 않도록 땅에 내려놓고 남자에게 따졌다. 약하게 나가면 안 될 듯했다.
“야 이 씹쉐끼야. 다짜고짜 멱살부터 잡는 게 어딨어?! 너 나 알아? 아냐고!”
남자가 주먹을 들었다.
“이쒸! 죽을래? 니가 유성민이지? 맞지?”
나도 주먹을 들었다.
“그래! 꼽냐? 씨발 어디서 굴러들어온 듣보잡 주제에.”
“뭐? 듣보잡?”
“그래 듣보잡. 난 너 모르거든.”
“와 이 개새끼 말하는 거 봐라. 내가 누군지 알아?”
“니가 누군데? 씨발놈아.”
“나 최보슬 남자 친구라고. 남자 친구!”
상황이 파악됐다. 보슬이한테 남자 친구가 생겨서 연락이 두절된 것이었다. ‘남자 친구’라는 말에 나는 공격할 의지를 잃었다. 지나가던 주민들이 싸움을 구경했다. 경비까지 나와 있었다. 그들은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식으로 관전했다. 나는 공세에 밀려 수세에 몰렸다. 보슬이는 차에서 나오지 않았다. 선팅 된 유리창은 우주 공간처럼 허무하고 무서웠다. 마치 블랙홀 같았다. 보슬이는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웃고 있을까, 울고 있을까? 분노와 집착으로 얼룩졌던 마음이 내 안에서 사라졌다. 나는 보슬이 남자 친구를 뒤로하고 차 앞에 섰다. 선팅 된 유리창은 말이 없었다. 나도 말없이 유리창을 보고 그곳을 떠났다. 뒤에서 남자 친구란 놈이 소리쳤다.
“또 연락하면 그땐 진짜 죽는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밤이 깊었다. 집에 돌아가려면 택시를 타야 했다. 편의점에 들러 통장에 있는 돈을 모두 뽑았다. 19만 원 정도 되었다. 집에 가기 싫어서 밤거리를 걸었다. 번화가로 나오니 술집, 모텔, 유흥업소가 즐비했다. 술에 취해 웃고 떠드는 남녀도 즐비했다. 나는 그것과 그들 속을 지나가며 일탈을 느꼈다. 오늘 밤은 몸을 막 굴리고 싶었다. 이미 나는 내가 아니었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 하나를 주었다. 비키니 입은 여자 사진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오빠들이 잠 못 이룰 최상의 서비스’라는 말도 있었다. 주변을 서성이다가 모텔에 들어갔다. 내부가 깨끗하고 화려했다. 종업원이 인사로 맞이했다.
“자고 갈 건데요.”
“4만 원입니다.”
생각보다 쌌다. 나는 방 번호가 달린 열쇠를 받고 방에 도착했다. 침대가 넓고, TV가 크고, 천장이 높았다. 내 자취방보다 백배 좋았다. 아까 바닥에서 주운 종이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으로 하기 무서워서 모텔 전화기로 했다. 웬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최상의 서비스를 보장합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목소리가 사무적이고 기계적이었다.
“종이 보고 전화했는데요.”
“아 그러세요? 어떤 여자를 원하십니까?”
“아무나….”
“고객님이 원하는 스타일이 있으면 저희가 맞춰서 보내 드리거든요. 나이도 어린 애부터 아줌마까지 있고요. 마른 애, 통통한 애, 뚱뚱한 애 다 있습니다.”
“그냥 예쁘면 돼요.”
“하하하. 안 예쁜 애가 어딨겠습니까. 그럼 저희가 알아서 보낼게요.”
“네. 여기가….”
“옵셔널모텔 401호.”
“어떻게 알았어요?”
“요즘 그 정도는 다 알죠. 이런 것도 서비스 정신 아니겠습니까.”
나는 도촬을 의심하다 치킨집 배달 서비스를 떠올리고 안심했다. 치킨을 시키면 치킨집에 번호가 기록되어 주소를 말하지 않아도 치킨집에서 알 수 있다. 시킬 때마다 주소를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10분 뒤에 여자가 왔다. 외모가 연예인 못지않았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몸매가 쭉쭉빵빵했다. 나이도 어려 보였다. 여자는 오자마자 옷을 벗었다. 내가 멀뚱거리자 그녀가 말했다.
“오빠, 뭐해? 안 벗어?”
“바로 하는 거예요?”
“그럼?”
“아니, 너무 급한 거 같아서.”
여자가 윗옷을 벗자 가슴이 출렁거렸다. 브래지어를 안 하고 있었다.
“금방 끝낼 거야? 아니면 나 델꾸 잘 거야?”
“자면 얼만데요?”
“긴 밤 삼십, 짧은 거는 십오.”
데리고 자기에는 돈이 모자랐다.
“짧은 밤 할게요. 근데 시간은…?”
“한 번 싸면 끝이지, 뭐. 내가 잘 해줄 테니까 걱정 마. 히히.”
여자는 나를 끌고 욕실에 들어갔다. 침대가 아니라 욕실이라니 야릇하면서 두려웠다. 여자는 내 옷을 벗기고 몸에 비누칠했다. 나는 욕조에 앉아서 그녀가 해주는 대로 느꼈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손이 전신을 훑었다. 나는 황홀했다. 손이 성감대에 닿을 때마다 신음이 나왔다. 나는 그녀의 품에서 몸을 뒤척였다. 그녀는 재밌는지 나를 놔주지 않고 애무를 계속했다. 물로 몸을 헹군 뒤 침대로 갔다. 그녀가 오일을 발라주었다. 등과 허리를 주무르는 손길에 졸음이 왔다. 나는 행복했다.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나를 바로 눕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빨았다. 혀가 성감대에 닿을 때마다 나는 뒤척였다. 그녀의 서비스는 쾌락이면서 고문이었다. 그녀는 자기 서비스 실력을 자랑하며 나를 괴롭히는 데 혈안이 되었다.
“오빠, 좋지?”
나는 애무 느낌에 정복당해 대답하지 못했다.
“원래 안마는 쫌 못생긴 애들이 잘해. 예쁜 애들은 남자들이 무작정 달려드니까 서비스할 겨를이 없거든. 경험 부족이지. 근데 나는 얼굴두 예쁘고 서비스도 잘해. 히히. 그치?”
그녀가 손으로 내 성기를 흔들며 말했다. 나는 대답했다.
“마, 맞아.”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찔하고 몽롱한 상태에서 사정했다. 그녀가 내게 끼웠던 몸을 빼고 콘돔을 벗겼다.
“와아, 오빠 많이 쌌네?”
그녀가 말했다. 나는 눈만 감고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기분이 아니었다. 슬픔과 평화가 동시에 밀려왔다. 내 위에 있던 그녀가 사라지니 허전하기도 했다. 내 배는 허공을 마주하고 있었다. 살 접촉이 그리웠다. 그녀가 다시 내 위에 눕기를 바랐다. 그녀는 욕실에서 아래를 씻으며 말했다.
“좋았어? 다음에는 더 잘 해줄게. 또 불러줘.”
나는 그녀와 긴 밤을 보내고 싶었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나갈 채비를 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못 가게 했다.
“왜 이래?”
“좀만 더 있어.”
“안 돼. 나 또 갈 데 있단 말이야. 늦었어.”
다정했던 그녀가 사정 이후로 매정해졌다. 나는 그녀를 안고 싶었다. 알몸과 알몸으로 살을 부비고 싶었다.
“한 번만. 응? 조금만 안아보자.”
“됐어. 아까 했잖아.”
그녀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뿌리쳤다.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안기만 할게. 응?”
“한 번 싸면 끝이라고 말했잖아. 또 하려면 돈 더 내든가.”
“얼만데?”
“7만 원.”
“뭐?”
“7만 원에 30분 추가야. 없으면 말고.”
있어도 말았을 것이다. 7만 원에 30분은 신자유주의보다 냉정하고 혹독했다. 그녀는 갔다. 대신에 나는 베개를 끌어안고 잤다.
다음 날 아침, 카운터에 열쇠를 반납하고 모텔을 나왔다. 동이 터서 어둠이 물러간 상태였다. 날은 쌀쌀했다. 나는 밖에 나오자마자 숨을 내뱉고 역으로 향했다. 첫 지하철을 탈 생각이었다. 출근하는 사람들과 함께 걸었다. 그들을 보자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같은 아침인데, 그들은 돈을 벌러 출근하고 나는 돈을 쓰고 귀가하고 있었다. 15만 원이 아까웠다. 동영상 강의 들으려고 비축한 돈이었는데 한순간을 위해 써버리다니. 나는 길가에 쓰러진 취객을 보자 자살 충동이 일었다. 그가 내 미래 모습인 것 같았다. 나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걸음을 빨리했다. 아침에 먹은 케이크 탓에 속이 니글거렸다. 모텔에서 일어나자마자 배고파서 보슬이 주려고 샀던 케이크를 먹었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빠른 걸음은 구역질을 재촉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길에다 토를 했다. 보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침을 뱉어 입을 헹구고 정신을 차렸다. 속이 뚫리자 맑은 공기가 몸 안으로 들어왔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자살 충동과 패배감도 사라졌다. 떠오르는 해를 보자 희망이 샘솟았다.
그래, 오늘부터는, 아니 오늘은 피곤해서 자야 하니까 내일부터는 달라질 것이다. 앞으로 여자한테 관심 갖지도 않을 것이고 오늘처럼 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슬이와는 이제 절교다. 개 같은 년. 내가 어쩌다 그런 여자를 좋아하게 됐을까. 아무튼 난 이제 이전의 내가 아니다. 앞으로 공부만 할 테다. 정말 목숨 걸고 정진할 것이다. 두고 봐라. 난 누구보다 출세할 것이다. 졸업하고 금감원에 취업해서 보란 듯이 이름을 날릴 것이다. 모두 나를 거론하며 부러워하겠지? 취업해서 돈을 모으고 자취방을 떠나 여자 친구를 사귀어 빨리 결혼할 것이다. 그때쯤 되면 보슬이보다, 예진이보다, 어제 같이 잤던 창녀보다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내 옆에 있겠지? 기필코 그렇게 될 것이다. 힘내자. 오늘만 날이 아니다. 이제 내 인생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듯, 나도 새롭게 탄생할 것이다. 조금만 참자. 딱 일이 년만 참으면 좋은 직장, 예쁜 여자, 근사한 차, 멋진 생활이 펼쳐진다. 그리고 숭고함도 잊지 말자. 싸고, 경박하고, 가벼워지면 안 된다. 리오타르의 사상처럼 인간도 예술처럼 숭고해야 한다. 인간이 숭고해야 그가 사는 삶도 숭고해진다. 앞으로는 절대 매춘하지 말아야지. 매춘은 그야말로 미친 짓이다. 나는 지금까지 두 번밖에 안 했으니까 적어도 깨끗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 정도야 크게 문제될 것 없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경험 있으니까. 나중에 결혼할 여자가 물어보면 어떡하지? 솔직히 말해야 하나? 자식이 물어본다면? 아니다. 그럴 일은 없을 테다. 두 번도 모두 실수로, 철없이 저지른 일이니까 신경 쓸 필요 없다. 이제 공부만 하고 바르게 살 테다. 정하가 신고만 안 하면 되는데…. 설마 자기 처지도 있는데 신고를 할까. 정욱이 바람 피워서 헤어진 걸 모두 아는데 또 한 번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 싶을까? 더군다나 성희롱인데. 여자니까 신고 안 할 것이다. 성희롱당한 여자라고 소문나면 평생 손가락질 당하고 살아야 한다. 정하는 개념 있으니 자기에게 불리한 짓은 안 할 거다. 됐다, 이제 날 막을 것은 없다. 숭고! 내 인생의 모토(motto)는 숭고다. 유성민, 숭고해지자!

 

 

그 여자의 매력

9시에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세안하고 토마토 주스를 마셨다. 아침에 마시는 생과일주스는 피부에 좋다. 친구 말 듣고 일주일간 마셨는데 이틀째에 효과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피부가 너무 하얘서 적응이 안 됐다. 거울을 봐도 내가 아닌 듯했다. 피부가 보름달처럼 밝아 화장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주스 마시라고 알려준 친구가 왜 화장을 안 하는지 이해되었다. 친구들이 나보고 피부과 다니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답했다. 비결을 묻길래 규칙적인 생활이라고 거짓말했다. 걔들도 주스 마셔서 피부 좋아지면 내가 돋보이지 못하니까.
엄마가 왜 일찍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오늘 결혼식 있다고 답했다. 엄마는 더 묻지 않고 방에 들어가 잤다. 나는 냉장고에서 비타민 팩을 꺼내 붙이고 소파에 누웠다. 텔레비전에서 ‘처녀시대’의 새 뮤직비디오가 나왔다. 아홉 멤버 모두 얼굴이 달라졌다. 예뻐졌지만 어디인가 어색했다. 한 명은 코를 했는지 인상이 무서워졌다. 나머지도 한두 군데는 칼을 댄 듯했다. 모두 얼굴이 비슷해서 멤버 구분이 안 됐다. 한 명이 옷만 아홉 번 갈아입고 나오는 듯했다. 예전에는 조금 못나도 얼굴에 개성이 있었는데 지금은 인조인간처럼 변해서 인간미가 없었다. 노래는 좋았다. 반복되는 후렴구가 맛깔났다. 처음 듣는 내가 흥얼거릴 정도로 음과 가사가 쉬웠다. 한참 보는데 누워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녀시대의 다리 때문이었다. 핫팬츠와 높은 힐 덕분인지 다리가 길고 예뻤다. 종아리와 허벅지에 살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자극 받고 일어나 앉아 다리를 주물렀다. 종아리 알이 터지도록 꼬집었다. 허벅지도 주먹으로 눌러주었다. 결혼식 가서 적게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도 얼른 저런 다리를 만들어야 했다.
샤워하고 머리 말리고 화장을 했다. 시간이 촉박했지만 밖에 그냥 나갈 수 없었다. 세팅(setting)이 끝나려면 최소 2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 피부가 좋아져서 화장은 기초만 했다. 머리도 미용실 가서 하면 되니까 대충 말렸다. 결혼식 시작인 12시 30분까지 1시간 30분 정도 남아 있었다. 머리하는 시간까지 감안해 집에서 일찍 나갔다. 신발을 찾는데 신발이 없었다. 신발장을 뒤져도 보이지 않았다.
“엄마! 엄마! 내 구두 어딨어?”
방에서 자고 있던 엄마가 거실로 나왔다.
“뭐가 또 없어졌다는 거야?”
“구두! 얼마 전에 산 힐 있잖아.”
“그 높은 거?”
“그래. 어딨어? 내가 오늘 신고 가려고 여기 놔뒀단 말이야.”
“글쎄다. 아까 보경이가 신고 가는 거 같더만….”
“뭐?! 그걸 걔가 왜 신어? 자꾸 내 물건 만지지 말라니까!”
“왜 나한테 그러냐? 걔한테 직접 말해라.”
하는 수 없이 낮은 구두를 신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전신 거울을 봤는데 굽이 낮아 다리가 짧아 보였다. 속상했다. 높은 구두를 신어 늘씬하게 보이고 싶었는데. 하객 여자 중 내가 제일 볼품없을까봐 걱정되었다. 그나마 키가 어느 정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내가 166cm이고 굽이 3~4cm이니 약 170cm 되었다. 160cm짜리 애가 10cm 힐을 신어야 나와 비슷해진다. 머릿속으로 계산하니 마음이 놓였다. 내가 크면 몰라도 작을 것 같지는 않았다.
미용실에서 웨이브를 넣고 식장으로 향했다. 지하철에서 거울을 보며 최종 점검을 했다. 머리는 화사했고, 피부는 밝았고, 옷은 단정했다. 아나운서 같은 분위기가 물씬했다. 이대로 방송국에 입사해도 아무 문제 없을 듯했다. 혼자 거울을 보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고개를 드니 한 아저씨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빛이 야릇하고 불쾌했다. 내 치마 속을 보는 듯했다. 나는 다리를 오므리고 바로 앉았다. 아저씨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모른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기분 나빠서 옆 칸으로 이동했다. 거기도 아저씨투성이었다. 모두 음흉해 보였다. 경쟁에 패하고 욕망에 찌들어 지하철에서 여자 구경하는 일을 낙으로 삼는 것 같았다. 자리가 없어서 나는 문 앞에 기대섰다. 모든 눈이 내 다리에 쏠려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지하철을 벗어나고 싶었다. 아저씨와 할아버지의 눈길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지하철을 탈 때마다 고역이다. 남자들이 힐끔거리는 탓에 신경이 쓰여 무얼 할 수가 없다. 젊은 남자는 그나마 낫다. 그들도 보기는 보지만 아저씨나 할아버지처럼 계속 보지 않기 때문이다. 본능적인 눈길과 의도적인 눈길은 다른 것이다. 법이 개정되어 지하철에 여성 전용 칸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나같이 젊은 여성은 지하철 타기가 두렵다. 언제 성희롱 당할지 모르고 언제 어떤 위험을 당할지 모른다. 손으로 만지지 않았을 뿐이지 눈으로 보는 행위도 성희롱이라면 성희롱이다. 대한민국 여성은 지하철에서 무의식적으로 성희롱 당하는 셈이다. 한때 여성 전용 칸 얘기가 나왔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됐으면 좋겠다. 아니면 차 있는 남자라도 빨리 만나야 할 텐데.
가까스로 도착했다. 식장 앞에서 은혜를 만났다. 오랜만이었다. 얼굴이 달라져 있었다.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수술한 것은 틀림없었다. 은혜와 팔짱을 끼고 신부 대기실에 갔다. 선배, 동기, 후배가 모두 모여 있었다. 여자들끼리 만나서 반갑다며 소리치고 난리를 피웠다. 인사하고 떠드는 와중에 애들 꾸민 상태를 살폈다. 죄다 높은 굽이었다. 10cm가 넘는 킬힐을 신고 온 애도 있었다. 평소 나보다 작던 애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기분 나빠서 올려다보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어머! 너 이렇게 높은 거 신었다가 나중에 허리 다쳐. 나는 그래서 일부러 낮은 거 신고 왔잖아.”
동생이 신고 간 높은 구두가 그리웠다.
명숙 언니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오늘의 주인공답게 아름다웠다. 나는 친구들과 명숙 언니를 둘러싸고 사진을 찍었다. 페북(facebook)에 올려야 하니까 예쁜 사진이 필요했다. 나는 얼굴 작게 보이려고 몸을 뺐다. 인터넷에 올리면 다른 사람도 보니까 얼굴 크기에도 신경 써야 했다. 언니하고만 찍고 싶어서 스마트폰으로 두어 번 더 찍었다. 찍은 사진을 보니 만족스러웠다. 이 정도면 페북에 올려도 될 듯싶었다.
언니는 아나운서다. 지방 방송국에서 뉴스를 진행한다. 학교 다닐 때 친하지 않았지만 언니가 아나운서 된 이후로 내게 조언을 주면서 친해졌다. 언니는 외모, 복장, 발음 등 많은 부분을 챙겨주었다. 물론 한 번이었지만, 나는 내 주위에 아나운서가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나보다 안 예쁘고, 나보다 키도 작고, 나보다 뭔가 떨어지는 명숙 언니가 아나운서 될 정도면 나도 될 것 같았다. 언니가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부럽고 언짢았지만 생각해보니 그것은 비보(悲報)가 아니라 낭보(朗報)였다. 저 정도면 나도 할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너 이번에 시험 봤어?”
언니가 물었다. 아나운서 시험에 대한 얘기였다.
“보긴 봤는데 아직 결과가 안 나왔어요.”
“지금 몇 차까지 봤는데?”
“아직 1차예요.”
“카테(camera-test) 잘 받았어? 떨진 않았구?”
“원래 연습할 때는 절대 안 떨었는데 막상 카메라 앞에 서니까 좀 떨리더라구요. 발음도 새고.”
“원래 다 그런 거야. 1차는 웬만하면 붙으니까 너무 걱정 마.”
언니의 말에 자신감이 생겼다. 사실 합격해도 그만, 떨어져도 그만이었다. 지방 방송국이었기에 욕심이 없었다. 경험상 도전해본 것이었다. 붙었더라도 안 갔을 것이다. 나는 공중파 외를 생각한 적이 없다. 내 얼굴이 전국적으로 퍼져야지, 그러 면에서 지방 방송국은 성에 차지 않았다. 대학도 명문대에 가야 하는 것처럼 방송국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조언하는 언니가 고마우면서도 가소로웠다. 명숙 언니는 어디까지나 내게 아나운서라서 좋은 언니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선생이나 멘토(mentor)가 아니란 말이다.
친구들과 식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신랑이 지방 검사라는데 얼굴이 궁금했다. 잘생겼을까? 검사인데 잘생기지는 않을 것이었다. 키는 클까? 공부만 해서 작을 것 같았다.
“신랑 봤어?”
은혜에게 물었다.
“아까 앞에 서 있었잖아. 못 봤어?”
“못 봤는데. 어때?”
“그냥 평범해. 착하게 생긴 것 같기도 하고.”
“키 커?”
“그냥 중간.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고.”
어떤 남자일지 예상됐다. 나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잘생기고 키까지 컸다면 언짢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언니가 검사를 어떻게 만났을지 궁금했다. 옆에 있는 친구에게 아느냐고 물었다. 소문에 따르면 아나운서를 의사, 판검사, 재벌 아들 등과 연결하는 뚜쟁이가 있다고 친구가 답했다. 나는 신랑 쪽 하객을 살폈다. 신랑이 검사라면 하객도 검사일 확률이 높았다. 나는 젊은 남자들을 관찰하며 괜찮은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외모를 보니까 실망스러운 구석이 많았다. 죄다 키가 작고 생김새가 투박했다. 머리가 빠지고 배가 나온 사람도 있었다. 아무리 검사라도 저런 외모라면 여자가 결혼할 마음이 안 날 듯했다.
결혼식이 시작되고 신랑이 입장했다. 예상대로 키가 작고 못생겼다. 은혜 말처럼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편이 아니라 작았고, 평범하고 착하게 생긴 편이 아니라 못생겼다. 검사라서 그런지 걸어오는 모습은 당찼다. 신부가 입장하고 주례사가 이어졌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결혼식을 지켜보았다.
뷔페에서 조금 먹었다. 친구들이 나보고 많이 좀 먹으라고 했다. 나는 입맛이 없다고 했다. 연어회와 탕수육이 당겼지만 참았다. 육식보다 채식이 미용에 좋기에 나는 샐러드만 먹었다. 고기 먹는 사람들 틈에서 풀만 먹으니까 배가 쪼그라들 것 같았다. 한 친구는 살과 몸무게를 신경 쓰지 않는지 폭식했다. 그릇에 음식으로 탑을 쌓고 먹었다. 여자가 마구 먹어대니까 경박해 보였다. 남편 친구들이 검사인데 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나는 친구를 보면서 식욕을 참았다. 저렇게 먹어대면 남자들이 좋은 눈으로 봐줄 리 없었다. 나는 남편 친구들을 의식하며 조신하게 먹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식장 앞에 모여 있었다. 꾸미고 외출했는데 집에 그냥 가기는 아쉬웠다.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저쪽에 있는 남편 친구들을 의식했다. 그쪽도 우리처럼 그냥 헤어지기 아쉬운 듯 몰려 있었다. 우리와 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친구들이 뒤풀이를 바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여자라서 그런지 남자와 놀고 싶으면서도 티 내지 않는 모습이 웃겼다. 신랑이 뒤풀이를 주선할 때까지 우리는 기다렸다. 명숙 언니는 아나운서 친구들과 얘기하고 있었다. 신랑이 자기 친구들에게 뭐라고 하더니 어디로 데려갔다. 처음에 우리에게 오는 줄 알았다. 신랑은 명숙 언니의 아나운서 친구들에게 자기 친구들을 소개했다. 검사 친구들과 아나운서 친구들이 섞이더니 식장을 나갔다. 우리는 허탈했다. 소외감과 배신감을 느꼈다. 명숙 언니는 우리한테 와서 오늘 고마웠다고 말했다. 그 말이 다였다. 뒤풀이는 애초에 계획되지 않은 것이었다. 검사와 아나운서를 위한 자리만 있을 뿐 우리는 들러리에 불과했다. 나는 식장에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남자와 함께할 기회를 잃자 몇몇이 집에 갔다. 모두 없는 약속을 만들어 핑계를 대고 떠났다. 남은 인원은 네다섯 정도밖에 안 됐다. 신방과 여학생끼리 모여 카페에 갔다. 꾸민 상태로 보아 이대로 귀가할 수 없다는 애들이었다. 더 놀고, 남의 시선을 더 받아야 오늘 꾸밈이 아깝지 않은 애들이었다.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원래 명숙 언니 남친 있지 않았어?”
“그 신랑 만나고 바로 헤어졌잖아. 그것두 만난 지 두 달 만에 결혼한 거야.”
“헐! 진짜? 너무 빠른 거 아니야? 남친만 불쌍하게 됐네.”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 당연한 거지. 너 같으면 회사원이랑 검사 중에 누구 택할래? 결혼은 현실이야.”
“하, 나도 빨리 좋은 남자를 만나야 할 텐데. 너는 주변에 괜찮은 남자 있어?”
“주변에 괜찮은 남자 있는 여자가 어딨니? 그냥 오빠나 어린 동생들뿐이지. 밖에서 찾아야 하는데 요즘엔 통 소개팅이 안 들어오네.”
“여자는 딱 두 가지 방법밖에 없어. 자기 스스로 능력 있는 여자가 되든가, 아니면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든가. 물론 두 개 다 하면 최고겠지. 근데 그게 힘들잖아. 그래서 난 요즘 소개팅을 많이 해. 실은 어제두 했어.”
“뭐야? 남자 뭐하는 사람이야?”
“회계사 시험 합격한 사람인데 아직은 학생이야. 이번에 졸업해.”
“학교 어디?”
“고구려대.”
“좋겠다. 나도 소개시켜주면 안 돼? 히히.”
“넌 니 남친이나 잘 챙겨. 꼭 있는 것들이 더 한다니까.”
“보슬아, 너는? 남친이랑 잘 지내?”
친구가 물었다.
“어, 그럼.”
“남자 친구 군인이잖아. 괜찮아?”
묻는 의도가 무엇일까. 비꼬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빴다. 군인이면 안 괜찮아야 하는가? 자기도 군인이랑 사귀었으면서. 훈련소 들어간 지 한 달도 못 참고 바람 피웠으면서. 그것도 신방과 선배랑. 내가 화제가 되자 친구들이 군인 남자 친구에 대해 말했다.
“몇 달 남았어?”
“언제 헤어질 거야?”
“설마 기다리는 건 아니지?”
“결혼할 거야?”
친구들은 나를 실험용 동물처럼 취급했다. 걔들에게는 내가 특이한 생명체였다. 군대 간 남자 친구를 1년이나 기다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사실 기다리면서 다른 남자도 몇 번 만났고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참았다. 양심적으로 말하면, 참게 되었다. 내가 참고 싶어서 참은 것이 아니라 상황이 나를 참게 만들었다. 어쨌든 나는 참고 기다린 셈이다. 남자 친구 하나 못 기다리는 애들이 나를 이상하게 취급하자 기분이 나빴다. 오히려 이상하게 취급할 쪽은 나였고, 이상하게 취급될 쪽은 걔들이었다. 나는 걔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니까. 나는 오기가 생겨서 남자 친구를 기다릴 것이고 전역하면 결혼할 것이라고 말했다. 모두 놀랐다. 나는 걔들이 우리 사이를 부러워하기를 바랐지만 부러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한 친구는 나를 미쳤다는 식으로 쳐다보았다.
“근데 니들 그거 알아?”
한 친구가 화제를 돌렸다.
“뭔데?”
“명숙 언니 아나운서 어떻게 됐는지.”
“어머! 그게 사실이었구나. 나도 들었어.”
“뭐, 뭔데? 말해봐.”
“시험 봐서 공채로 들어간 거 아니야? 헛소문 같은 거라면 그냥 얘기하지 마.”
“헛소문이라니. 이거 아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도 믿을 만한 사람한테 들은 얘기야.”
“전부터 명숙 언니 아나운서 된 거에 말 많았어. 솔직히 언니가 뭐 아주 예쁜 것도 아니고 늘씬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똑똑한 것도 아니었잖아. 스터디도 안 하고 학원도 안 다닌 사람이 4학년 때까지 놀다가 아나운서 됐으니 이상할 수밖에….”
“언니 스터디는 안 해도 학원은 다녔어.”
“다녔기야 했겠지. 근데 실력만으로 된 게 아니라는 거지.”
“그럼?”
“이건 나도 들은 얘긴데, 그 지방이나 케이블 쪽은 시험이 아니라, 물론 시험도 보지만 외압이 많이 작용한대.”
“외압? 무슨 외압?”
“그니까 기업에 좀 높은 사람이랑 아나운서 지망생들이랑 뭔가 썸씽을 가지면 쉽게 될 수 있다는 거지.”
“에이,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진짜야.”
“그럼 티비에 나오는 아나운서들이 다 그렇게 된 거란 말이야?”
“그건 아니지. 공중파 말고 지방 조그만 방송국이나 케이블 같은 델 말하는 거야.”
“내 친구 중에 그렇게 해서 리포터 된 애 있는데.”
“맞아. 아나운서는 잘 몰라도 리포터나 캐스터 같은 건 그런 식으로두 많이 돼.”
“걔가 어느 신문사 사장이랑 만나고 그랬는데 나중에 보니까 리포터 됐더라고. 그 사장이 꽂아준 거 같아.”
듣고 있다 내가 말했다.
“그래두 명숙 언니가 설마….”
내가 알기로 명숙 언니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왜? 남친 버리고 두 달 만에 결혼한 사람이 그까짓 거 못 하겠어?”
“야. 말이 너무 심했다. 크크.”
“히히. 뭐 틀린 말은 아니네.”
은혜가 약속 있다며 먼저 일어났다. 남자 친구가 밖에 와 있다고 했다. 우리는 궁금해서 창밖으로 남자 친구가 어떤지 보았다. 남자 친구는 보이지 않고 외제차 한 대만 보였다. 은혜가 외제차에 타더니 외제차가 출발했다. 실은 놀랐다. 은혜는 자기 남자 친구가 평범한 학생이라고 했다. 학벌도 좋지 않았다. 중하위권 대학이었다. 그런 남자가 외제차를 끌고 다니다니 집이 부자인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은혜가 불쌍하면서도 부러웠다. 외제차 타고 가는 모습에 질투가 났다. 친구들도 나랑 같은 심정이었나 보다. 은혜가 가자 모두 은혜를 흉봤다.
“남친 또 바꿨네.”
“전에 사귀던 애 아니지? 그치?”
“전에 사귀던 사람은 그냥 회사원이었잖아. 외제차를 가지고 다닐 리 없지.”
“기집애, 차 없어도 사랑할 수 있대면서 결국 외제차 있는 놈한테 갔네.”
“저거 비싼 거 맞지? 국내에 몇 대 없는 거.”
“몰라. 그게 무슨 소용이야. 저기서 뭘 하느냐가 문제지. 히히.”
“하하. 야, 다른 사람 듣겠다.”
“사실 맞잖아. 보나마나 아니겠어? 은혜, 쟤가 남자관계가 얼마나 복잡한데.”
“전 남친이랑 사귀면서도 바람 많이 폈잖아.”
“그 남자가 저 남자야. 나한테 고민 상담 했었거든. 몰래 소개팅 했는데 부잣집 아들 만났다고. 아빠가 어디 무역회사 회장이래.”
“쟤 쫌 그런 거 있지 않냐? 은근 과시하는 거.”
“하하. 뭔지 알아. 그런데 또 그걸 자기는 티 안 내는 척하잖아. 남이 알아주길 바라고.”
“어! 그거! 진짜 재수 없어. 분명 남자 친구도 지가 여기까지 부른 걸걸. 우리한테 외제차 자랑하려고.”
“크크. 어련하겠어.”
“에휴. 그래두 부럽다. 난 언제 저런 차 타보냐?”
“니 남친 차 있잖아.”
“야 그게 어디 차냐? 그냥 수레지.”
“수레래. 크크.”
“확실히 남자는 차가 있어야 돼. 그래야 어디를 가도 편하게 가지. 그리고 차가 구리면 왠지 사람까지 후져 보여. 그 이미지의 힘이라는 게 무시 못 하지.”
“보슬이는 어때?”
“응? 뭐가?”
나한테 질문이 왔다.
“차 있는 남자 좋지 않아? 외제차 타고 싶지?”
“아니, 뭐. 좋기야 하겠지만 그게 꼭 중요한 건 아니잖아.”
“에이, 또 착한 척한다. 아까 보니까 부러워하는 것 같더만.”
“내가?! 아니야. 절대 하나도 안 부럽다, 야.”
“하긴 니 남친도 차 있으니까.”
옆에 있던 친구가 물었다.
“군인인데 무슨 차가 있어?”
“쟤 남친 운전병이잖아. 크하하.”
좌중이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 아니라 멸시이자 비웃음이었다. 나는 발끈했다.
“야! 차가 뭐가 중요하냐? 사람이 중요하지. 니들은 나중에 차랑 결혼할래?!”
내가 목소리를 높이자 모두 숙연해졌다. 침묵이 흘렀다. 누구 하나 내 눈치를 보며 입을 열지 않았다. 내가 화를 내서 분위기를 망친 것 같아 미안했다. 잠시 후 한 친구가 말했다.
“근데 걔 이마 넣은 거지?”
“누구? 은혜? 응. 웃을 때마다 티 나던데.”
분위기가 활발해지고 이야기가 재개되었다.
“보형물인가? 지방 이식?”
“보형물. 그래도 꽤 예쁘게 됐네. 성형 같은 거 안 한다고 했으면서. 크크.”
나는 친구들 말을 듣고서야 은혜 얼굴에 어디가 달라졌는지 깨달았다. 이마가 튀어나와서 인상이 귀여워 보였던 것이다. 나는 내 이마를 만져보았다. 포장도로처럼 판판했다. 이마가 콤플렉스라서 앞머리를 만들고 다녔는데 이마 성형 얘기가 나오니 솔깃했다. 화제는 명숙 언니 아나운서 비화에서 성형으로 옮겨졌다. 각자 수술하고 싶은 부위를 말했다.
“난 코 하고 싶어. 코만 해도 인상이 완전 달라지잖아.”
“난 역시 눈. 언제까지 아이라인을 짙게 그려야 하는지….”
“나는 턱 깎고 싶은데.”
“그건 위험해. 잘못하다 큰일 날 수도 있어.”
“알아. 근데 하면 진짜 예뻐지잖아. 얼굴도 작아지고. 보슬이 넌?”
“난 눈.”
“눈? 너 눈 예쁜데. 쌍꺼풀도 있잖아.”
“눈 사이가 좀 먼 거 같아서 앞트임 하고 싶어.”
거울 볼 때마다 불만이었다. 눈도 쌍꺼풀지고, 코도 오뚝하고, 턱도 날카로운데 눈 사이가 먼 점이 흠이었다. 지금도 예쁘지만 눈만 가까워지면 연예인해도 못지않겠다는 말 많이 들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눈만 가깝다면 대한민국에서 제일 예뻤을 테다.
“넌 안 해도 이쁘니까 괜찮아.”
친구가 위로해주었다. 다른 애들은 가만있었다. 걔들은 원래 나한테 예쁘다고 말하지 않는다.
너무 떠들었는지 모두 입을 멈추고 쉬었다. 결혼식 날에 여대생 넷이서 카페에 앉아 잡담하는 꼴이 궁상맞았다. 나는 내가 초라해졌고 친구들이 우스워졌다. 갈 데 없어 이런 데 오고, 만날 사람 없어 이런 애들 만나다니 내가 한심스러웠다. 집에 가서 공부나 할걸. 토익, 한국어, 과제 등 할 일이 많았다. 나는 집에 가고 싶었지만 먼저 일어나지 못했다. 도중에 먼저 가는 일이 부끄러우면서 두려웠다. 분위기 깨는 것 같아 미안하고 혼자 행동하는 것 같아 어색했다. 무엇보다 내가 가면 애들이 나를 흉볼 것 같았다. 나는 커피나 마시며 앉아 있었다. 누가 뒤에서 나를 욕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침묵 뒤에 화제가 취업으로 바뀌었다. 모두 언론사 지망생이었기에 방송국 얘기가 나왔다. 기자 지망이 하나, PD 지망이 하나, 아나운서 지망이 나까지 둘이었다. 우리는 합격 후 같은 방송국에서 일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같이 아나운서 지망하는 애가 말했다.
“너 프랑스어 복전 한다매?”
“응. 지난 학기부터 들었어.”
“왜? 불어 하면 뭐 가산점 있어?”
“아니. 불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문학과야. 문과대.”
“왜 그거 했어? 나중에 아나운서 안 되면 혹시 모르니까 경영이나 경제 하지. 애들 거의 다 그러는데.”
아나운서가 안 된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프랑스어문학과는 문학이 좋아서 선택한 것이었다. 프랑스어문학과에서 공부하면서 후회한 적 없다. 오히려 신방과가 내게 고역이다. 수업도 재미없고 사람들도 정치만 얘기한다. 좌파가 어떻고, 우파가 어떻고, 진보가 어떻고, 보수가 어떻고 등. 나는 사람들이 왜 복잡하게 사는지 모르겠다. 자기 인생 챙기기도 힘든데 국가 인생을 어떻게 챙겨? 그럴 만큼 시간과 여유가 많나? 오지랖이 넓은 것은 아니고? 우리가 왜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을 뽑는가? 대신 나라를 맡아 달라는 뜻이다. 우리는 먹고 살기 바쁘니 너희가 알아서 하라는 뜻이다. 나는 일반인이 정치를 얘기하는 것은 허세라고 생각한다. 나는 너희보다 이만큼 똑똑하고 정의롭다고 하는 자랑에 불과하다. 나는 되도록 학과 생활을 자제하고 학과 모임을 멀리한다. 신방과에는 위선자가 많다.
집에 오니 동생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나는 아침에 있던 일이 생각나서 화를 냈다. 다시는 내 신발 신고 가지 말라고 했다. 내 물건도 만지지 말라고 했다. 동생은 졸아서 고개만 끄덕였다. 엄마가 저녁 차렸으니 밥 먹으라고 했다. 나는 살찌기 싫어서 안 먹고 방에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안 보이니 마음이 편했다. 옆에 아무도 없으니 몸도 편했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 절로 잠이 왔다.
밤 10시께 일어났다. 종민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보슬아, 오늘 잘 있었어? 취침 전에 몰래 나와서 전화한다.”
“지금 전화해도 괜찮아? 너 혼나는 거 아니야?”
“괜찮아. 나도 이제 상병인데 뭘. 어차피 조금밖에 못 해. 오늘 뭐 했어?”
“그냥… 이것저것.”
“이것저것 뭐?”
“밖에도 나갔다 오고 지금까지 잤어.”
“밖에? 어디 갔다 왔는데?”
“선배 결혼식.”
“선배 누구? 남자?”자꾸 물어보니까 짜증이 났다. 내가 감시 받는 죄인이라도 된 것 같았다.
“여자야!”
“그, 그래? 근데 왜 화를 내?”
“니가 자꾸 물어보니까 그렇지.”
“그렇다고 화를 낼 필요까진 없잖아.”
“화나는데 어떻게 화를 안 내?”
“오늘 무슨 일 있었어?”
“휴. 됐어. 그만 하자.”
“뭐야, 무슨 일인데 말해봐.”
“나 끊을래. 힘들어.”
내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시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종민이랑 헤어질 때가 된 것 같았다. 전화는 며칠간 계속됐다. 나는 계속 받지 않았다. 받지 않으면 종민이가 알아서 마음을 접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응답은 이별 통보나 다름없었다. 여자는 직감이 있어서 눈치가 빠르다. 상대방이 냉담해지면 마음이 떠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별을 준비한다. 남자는 다르다. 남자는 둔해서 눈치가 없다. 상대방이 냉담해지면 자기가 따뜻해져 상대를 괴롭힌다. 눈치껏 이별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사랑, 책임, 의무 따위를 거론하며 상대의 양심을 찌른다. 이별 앞에서 남자는 도덕적으로 착한 놈이 되고 여자는 도덕적으로 나쁜 년이 된다. 여자들이 이별할 때 연락을 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침묵은 최선이다.
종민이는 끈질겼다. 집착은 포기를 몰랐다. 나는 일주일간 이어지는 전화를 참지 못하고 받았다. 받자마자 종민이가 소리 질렀다. 그렇게 화난 모습은 사귀면서 처음이었다.
“뭐 하는 거야?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연락이 안 되는데 내가 무슨 수로 알아봐. 여기 갇혀 있는 사람은 생각도 안 해? 니가 내 맘을 아냐고!”
종민이의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잘못한 점이 있었다. 전화를 받지 않으니 군대에서 얼마나 걱정했을까. 나는 미안해졌다. 이별을 통보하려고 했는데 이별 통보할 입장이 아니었다. 사과해도 시원찮을 판에 이별이라니. 나는 전화기만 붙잡고 있을 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종민이가 진정하고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아무 일도 없었어.”
“근데 왜? 내가 전화를 몇 번이나 했는 줄 알아?”
“알아. 그냥 받기 싫었어.”
종민이가 내 맘을 알아챘는지 말을 멈췄다. 침묵과 정적이 흘렀다. 둘이 말없이 있었다.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종민이가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지금까지 잘 해왔잖아. 우리 일단 대화하자. 말을 해야 네가 어떤 상황인지 내가 알지. 응?”
“그냥 여기까지인 거 같아.”
“뭐가 여기까지야? 응? 혹시 너 다른 남자 생겼어?”
“아니. 없어.”
“근데 왜? 내가 자꾸 전화해서? 그럼 내가 전화 줄일게.”
“그것도 아니야. 그냥….”
너랑 헤어지고 싶어, 라는 말이 안 나왔다. 나쁜 년 되기는 싫었다. 나는 종민이가 알아서 단념해주기를 바랐다.
“좀 시원하게 말해봐. 그렇게 흐지부지하게 하면 내가 어쩌라고!”
종민이가 다시 화냈다. 목소리가 높아지자 나도 흥분했다.
“제발 좀!”
“제발 뭐?”
“나 진짜 힘들거든. 이제 우리 그만 하자.”
“그러니까 이유가 뭔데?”
“이유 없어. 없다고! 내가 이 정도까지 했으면 니가 알아서 행동해야 되는 거 아니야? 내가 헤어지자고 일일이 다 말해야 돼? 응?”
“그니까 내가 대화하자고 한 거잖아. 얘기를 해야 내가 알지.”
“나 너랑 할 얘기 없어. 나 좀 힘들게 하지 말래?”
종민이는 말이 없었다. 내가 계속 말했다.
“나도 내가 이기적인 거 아는데, 미안해. 내가 힘들어. 내가 힘들어서 못 참겠다구.”
종민이는 말도 하지 않고 전화도 끊지 않았다. 나는 말이 끝났기에 전화를 끊었다. 기분이 홀가분하고 찝찝했다. 아무에게나 전화 걸어 하소연하고 싶었다. 내가 나쁜 것이 아니라고,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모두 헤어지는데, 이별을 받아들이는데 왜 나만 기다려야 하냐고, 기다리는 사람의 심정이 비참한 줄 아느냐고, 이제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고.
자는데 눈물이 났다. 종민이한테 미안했다. 지금껏 사귄 남자 중 나한테 제일 잘해줬는데. 나는 종민이가 군대에서 울고 있을까봐 걱정되었다.
내가 헤어지고 싶어서 헤어졌는데 내가 슬펐다. 종민이도 슬퍼하고 있을까? 마음 어디에 씻겨 내려가지 않은 앙금이 남아 있었다. 종민이와 다시 사귀고픈 생각은 없었다. 나는 혼자가 되어 외로울 뿐이었다. 마음을 추스르려면 옆에 누가 있어야 했다. 학교생활이 즐겁지마는 않았다. 4학년이 되니까 낯익은 사람이 줄고 낯선 사람이 늘었다. 나를 반기고, 나를 웃기던 남학생들은 군대에 갔거나 사회로 나갔다. 단짝이던 은혜도 한 학기를 남기고 휴학했다. 수업도 같이 듣고, 밥도 같이 먹었는데 학교에서 만나지 않으니까 연락도 줄고 사이도 멀어졌다. 이제 와서 학과 활동을 할 수도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신방과에는 위선자가 많다. 위선자들 틈에서 정치 얘기를 들을 바에야 FTA 반대 시위에 나가는 편이 낫다. 복수전공인 프랑스어문학과는 학과 활동이 뜸해 사람들과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 다행히 경은이와 전공 수업을 같이 들어 친해졌다. 경은이도 같이 다닐 사람이 없는 듯했다. 경은이는 내 동기인데 전에는 친하지 않았다. 마주치면 인사만 하는 정도. 정확히 말하면, 인사하기 껄끄러워서 서로 고개 숙이고 지나가는 정도. ‘성(sex)과 미디어’ 수업에서 같은 조가 되었기에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알고 보니 경은이는 나쁘지 않은 애였다. 신입생 때는 경은이 성격이 직선적이라 애들이 따돌린 감이 없지 않았다. 나도 따돌림 당하기 싫어서 경은이를 멀리했는데, 얘기를 나누고 과제를 같이해 보니 천성이 착한 애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수업은 물론이고 점심시간과 공강 시간도 경은이와 함께했다. 우리는 주로 남자 얘기를 즐겼다. 보기와 다르게 경은이도 남자에 관심이 많았다. 남자 친구가 있는데도 소개팅을 나가고 그랬다.
“너는 요즘 어때? 잘 사귀고 있어?”
경은이가 물었다.
“헤어졌어.”
“아, 진짜? 언제 헤어진 거야?”
“며칠 됐어.”
“니가 헤어지자고 한 거지? 설마 남자가 찼을 린 없을 테고.”
“응.”
당연한 말인데 기분이 나빴다. 경은이 말투가 원래 그렇기에 이해했다.
“전화 계속 오지 않아? 헤어진 뒤로.”
“조금….”
실은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마지막 통화 이후로 종민이는 연락을 끊었다. 가끔 허전해서 핸드폰을 볼 때, 종민이가 전화하기를 바라기도 했다. 헤어진 뒤 연락이 없었다고 하면 경은이가 나를 비웃을까봐 거짓말을 했다.
“너 앞으로 조심해야 돼. 군인들이 얼마나 끈질긴 줄 알아? 나는 전에 사귀었던 애가 휴가 나와서 집까지 쫓아왔다니까. 정말 진드기가 따로 없어.”
얘기를 들어 보니 경은이도 남자관계가 복잡했다. 4학년이 된 뒤로 모든 남자를 정리했다고 한다. 친한 오빠나 아는 동생과도 연락을 끊고 사귀던 남자 친구와도 헤어졌다고 한다. 무능력한 남자는 알아봤자 자기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나 뭐라나. 남자들은 깨끗한 여자를 좋아하기 때문에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려면 남자관계가 단순해야 한다고 했다. 경은이는 현재 자기 남자관계는 아빠와 남자 친구밖에 없다고 했다. 취업하면 여기에 동료가 더해진다고 했다. 아빠는 가족이니까 어쩔 수 없고, 능력 있는 남자 친구를 사귀어 결혼해 인생을 즐기고, 자질구레한 일은 동료에게 부탁하면 된다고 했다. 남자들은 멍청해서 여자가 웃기만 해도 부탁을 들어준다고 했다. 이것이 여자가 사는 법이라고 했다. 나는 경은이의 철학이 속물 같았다. 경은이는 무시무시한 애였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잇속을 고려하며 남자를 사귀다니. 혹시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나는 경은이를 바라보았다. 경은이 눈빛은 진솔했다. 나는 경은이가 더 진화한 암컷이거나 덜 진화한 암컷이라고 생각했다.
“너 따라다니는 남자는 없어?”
경은이가 물었다.
“응. 뭐 가끔 연락하는 사람은 있는데….”
“에고고. 천하의 최보슬이 어쩌다 이렇게 됐니? 너 신입생 때는 인기 정말 많았잖아. 남자 선배들이 다 너 좋아하고. MT 갔을 때 기억 나? 선배들이 너 있는 방에만 간 거.”
화려한 과거를 칭찬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때는 정말 그랬다. 전화와 문자가 끊이지 않았고 고백도 한 달에 서너 번씩 받았다. 심지어 남자가 귀찮기도 했다. 싫은 남자를 떼어 내려고 미친 척한 적도 있다. 남자는 내가 미친 사람이어도 좋다며 자기가 돌봐주겠다고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때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예쁜 줄 알았다.
경은이 말에는 뼈가 있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다. 아까 한 말은 과거에 인기가 많았을지 몰라도 현재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뜻이었다. 나보다 못생긴 애가 나를 무시하니까 오기가 솟았다. 나는 내가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교양 수업 때 있던 일을 말했다.
수업 시간에 한 남학생이 나를 힐끗했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자꾸만 내 근처에 앉았다. 내 옆에 앉은 적도 있다. 나는 부담스러워서 시선을 피했지만 남학생은 관심을 거두지 않았다. 어느 날 수업 끝나고 남학생이 뒤를 쫓아왔다. 나는 두려워서 걸음을 빨리했다. 남학생도 속력을 높였다. 내가 뒤돌아보는 찰나에 남학생이 말을 걸었다. 당황했는지 남학생은 말을 흐리고 도망쳤다.
“그냥 뭐 물어보려던 거 아니야?”
“뭘 물어봐? 물어볼 게 뭐 있다고.”
“왜 이런 거 일지도 모르지. 교회 다니냐고 묻는 애들 있잖아. 기독교 서클.”
“그럼 강의실에서 물어봤겠지.”
“강의실에는 사람 많잖아. 자기 신분이 탄로 날 텐데 그렇게 하겠어?”
“쳐다보는 눈빛이 남달랐다니까. 왜 여자의 직감이란 게 있잖아.”
“남자들은 원래 여자면 다 쳐다봐. 야, 그렇게 따지면 나는 수천 번 고백 당했겠다.”
“누가 널 쳐다본다고.”
“어? 내가 왜? 나도 교양 들으면 남자애들이 많이 쳐다봐.”
“그래서 그 남자애들이 고백했어?”
“고백은… 안 했지.”
“거봐. 그거야말로 그냥 쳐다본 거고, 내 경우는 다르지. 전에도 이런 식으로 고백 당한 적 많아서 나는 알아.”
“그런 게 바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하는 거야.”
“뭐?”
“논리적 판단 결여라구. 눈에 보이는 까마귀가 온통 검다고 흰 까마귀가 없으리란 보장 없잖아. 눈으로 다 확인해본 것도 아닌데.”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지. 지금 너는 니가 고백 당한 경험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잖아.”
“됐어. 그만 하자.”
경은이가 왜 따돌림 당했는지 알 것 같았다. 경은이는 똥고집이 강했다. 남을 위해 배려하는 말도 할 줄 몰랐다. 나는 기분 상해서 가만있었다. 경은이도 먼저 굽히지 않는 성격이라 아무 말도 안 했다. 내가 말싸움에서 진 것 같아 불쾌했다. 이런 느낌은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 저학년 때 신방과 활동 할 때는 많이 느껴봤다. 위선자들 속에서, 헛똑똑이들 속에서 무슨 말만 하면 반박을 당했다. 위선자와 헛똑똑이 들은 그것이 논리적인 반박이라고 자칭했다. 그들은 주워들은 잡지식과 논리를 가장한 비논리로 나를 압박하고 내가 압박당하면 즐거워했다. 내가 신방과를 멀리한 이유 중 하나다. 이것이 우리 과의 특색이다. 말만 하면 논리가 어쩌고 저쩌고. ‘논리야 놀자’라는 책은 읽어보고 하는 말일까? 경은이도 내가 보기에 위선자 혹은 헛똑똑이에 불과했다.
“너 남친 뭐 해?”
내가 물었다.
“로스쿨 다녀. 서울대 법대 나왔고 지금 서울대 로스쿨에서 공부해.”
경은이는 자랑하듯 답했다.
“로스쿨? 변호사가 한 해 만 명인 시대에….”
“변호사가 아무리 많아도 서울대 정도면 좋은 로펌 들어가니까 상관없어.”
“FTA 비준동의안 처리되면 앞으로 서비스 시장이 개방돼서 미국 로펌도 우리나라에 들어온다는 거 몰라? 그러면 우리나라 변호사들 힘들어질 게 뻔하지.”
나는 신문에서 읽은 내용을 빌려 말했다. 경은이는 반박하지 못했다. 나는 통쾌했다.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나는 남친이랑 약속 있어서 이만. 너는 뭐 할 거야?”
남자 친구도 없는 너는 뭐 할 것이냐는 말이었다. 나는 도서관에서 공부하겠다고 응수했다.
도서관은 학기 초라서 한산했다. 나는 개인 책상이 아니라 공용 책상에 앉았다. 개인 책상에 앉으면 남자의 시선을 받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공용 책상은 10분 앉아 있어도 남자들이 넘친다. 자기들이 알아서 근처에 앉는다. 나는 도서관에 갈 때면 공용 책상을 애용한다. 앉는 자리도 정해져 있다. 매번 같은 곳에 앉아야 남자들이 나를 알아본다. 자리를 이동하면 남자의 기억에서 잊힌다. 지속적으로 각인시켜야 나중에 고백한다. 고백 방법은 여러 가지다. 자리 떴을 때 따라와 고백하는 남자도 있고, 쪽지와 음료수를 건네는 남자도 있고, 내가 어느 학과이고 몇 학년인지 인터넷으로 알아내어 고백하는 남자도 있다.
치마를 입은 덕분이지 주변에 남자가 득실댔다. 나는 다리를 꼬고 앉아 열심히 공부했다. 남자들이 힐끔대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른 척했다.
깜박 졸았나 보다. 고개를 떨구며 조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고개가 떨어지는 순간과 동시에 책 보는 척하며 고개를 숙였다. 누가 봐도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잠시 후 몰래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쳐다보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아무도 내가 조는 모습을 못 본 듯했다. 화장실에 가서 화장을 고쳤다. 침을 흘렸는지 입 주변에 화장이 번져 있었다. 화장실을 나오다 운수 오빠를 만났다. 오빠는 화장실 앞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운수 오빠!”
“어? 보슬아, 잘 지냈어? 뭐 해?”
“저 요기서 공부하다 잠깐 화장실 좀. 오빠는요?”
“나도 공부하고 있었는데 너 어디에 앉았어?”
“저 넓은 책상, 가운데요.”
“내가 칸막이에 앉아서 몰랐구나. 알았으면 옆에 앉았을 텐데. 흐흐.”
“오빠, 기자 준비 잘 돼가요?”
“뭐 언제나 열심히는 하는데 결과가… 너는?”
“저도 뭐 마찬가지죠. 헤헤.”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고 자리로 돌아왔다. 1시간 정도 공부했을까? 운수 오빠한테 문자가 왔다. 밥 안 먹었으면 저녁 같이 먹자고. 자기가 사 주겠다고. 나는 배도 고프고 공부할 마음도 없어서 오빠를 따라나섰다. 회전초밥 전문점에 갔다. 처음 가봤는데 시설이 깔끔하고 가격도 저렴했다. 한 접시에 1200원. 10그릇 먹어도 12000원밖에 안 됐다. 운수 오빠는 대화가 그리웠는지 말이 많았다. 주로 취업에 관한 얘기였다.
“내가 스터디를 하려고 해도 별로 도움이 안 돼서 혼자 하고 있거든. 막상 가서 얘기해 보면 다들 자기 자랑만 하지 공부할 생각은 없어 보여. 매주 나가는데 그 시간이 너무 아깝잖아. 진짜 언론고시 합격하려면 하루에 10시간 이상은 공부해야 하는데 걔들이랑 떠들 시간이 어딨어. 내가 무슨 남의 자랑이나 들어주려고 거기 가는 건가. 다 부질없어. 진짜 될 만한 애들은 다 혼자서 공부하더라.”
“그래도 같이하면 도움 되잖아요.”
“너는 아나운서니까 그렇겠지만 기자는 달라. 가면 진짜 싸움밖에 안 해. 거기에 경상도 고향인 애나 한총련 애들 있으면 가관이지. 스터디 시간이 총 4시간이면 4시간 동안 싸움만 하는 거야. 어디서 또 들은 건 많아 가지고 주절거리는 건 잘해.”
“오빠 그래서 혼자 하시는 거예요?”
“응. 오히려 혼자 공부하니까 집중도 잘 되고 시간도 안 빼앗기도 좋더라.”
회전판 위에서 도는 연어초밥을 보자 군침이 돌았다. 벌써 다섯 접시 먹은 상태였다. 서너 접시 더 먹고 싶었는데 살찔까봐 참았다.
“왜? 다 먹었어?”
오빠가 물었다.
“아, 아니요. 좀 쉬었다 먹으려구요.”
오빠는 열 접시를 넘긴 상태였다. 나는 저 배에 거지가 들어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보슬이는 방송국 어디 들어가고 싶어?”
“저는… 음 아무 데나 괜찮아요.”
“에이, 그래도 제일 가고 싶은 데가 있을 거 아니야.”
“엔비씨?”
“오, 엔비씨 좋지. 거기 근무 환경도 좋고 연봉도 세잖아. 너랑 어울린다.”
“정말요?”
“응. 너 딱 아홉 시 뉴스 진행하게 생겼잖아.”
아부인 줄 알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오빠도 꼭 기자 되세요. 그럼 제가 다음은 김운수 기자입니다, 김운수 기자, 라고 말할게요. 히히.”
“에이, 나는 방송국 체질이 아니라… 신문사 갈 거야. 기자가 글을 써야지 카메라 앞에서 말만 하면 되나.”
“그럼 오빠는 어디 가고 싶으세요?”
“난 고조선이랑 센터랑 농아일보. 딱 이 세 개.”
“원래 두겨레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야, 두겨레를 어떻게 가냐. 월급도 못 줘서 무급휴가 주는 곳을.”
오빠가 내가 찜한 연어초밥을 가로챘다. 부드러운 연어가 오빠 입에서 녹는 상상을 하니 괴로웠다. 회전판을 살피니 연어초밥이 동난 상태였다. 대신 나는 파인애플을 먹었다. 피부를 생각해서 과일을 선택했다.
“근데 오빠 운동권 아니었어요?”
“응. 2학년 때까지만. 군대 갔다 와서 정신 차렸지.”
“정신 차렸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세상을 바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는 거지. 요즘 학교에 보면 총학 선거다 뭐다 해서 대자보 붙이는 애들 있잖아. 특히 반값 등록금이랑 우리학교 재단 몰아내고 국립화하자는 애들. 진짜 미친 새끼들이지. 에고, 미안. 내가 욕을 했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오빠가 군대 가기 전까지만 해도 걔들처럼 그러고 다녔어. 집에도 안 가고 애들이랑 모여서 토론하고 응? 인문학이랑 사회과학 서적 읽고 집회도 나가고. 거의 데모한 거나 다름없지. 근데 군대 갔다 오니까 생각이 바뀌더라고. 비뚤어진 시각에서 합리적인 시각을 되찾았다고 해야 할까. 내가 봤을 때 걔들은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애들이야. 걔들은 나보고 변절자라고 하지만.”
계산은 오빠가 했다. 오빠가 산다고 했으니까 나는 가만있었다. 음식점을 나와 산책 겸 길을 걸었다. 오빠가 맥주 마시자고 추근거렸다. 나는 집에 가야 한다고 에둘렀다. 오빠가 다음 주에 보자고 말했다. 나는 다음 주에 왜 보느냐고 물었다. 오빠가 개강 파티가 있다고 답했다. 교수님도 오시니 나도 참석하라고 했다. 나는 알았다고 한 뒤 오빠와 헤어지고 지하철을 탔다.
집에 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입사 지원한 방송국 누리집에 들어갔다. 지하철에 있을 때 1차 합격 결과가 나왔다는 문자를 받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해 알아보려고 했지만 인터넷 속도가 느려서 관두었다. 나는 1차는 합격할 줄 알았기에 집에 갈 동안 설렘을 즐기기로 했다.
수험 번호를 적고 마우스를 클릭하니 이런 문구가 나왔다.
<죄송합니다.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
떨어졌다는 소리였다. 나는 믿기지 않아서 한 번 더 확인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지하철에서 집까지 올 동안 느꼈던 설렘이 좌절로 변했다. 나는 울고 싶었다. 1차에서 떨어지니 충격이 컸다. 카메라 테스트에서 낙방했다는 것은 아나운서가 될 만한 미모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나는 거울을 보았다. 눈 사이의 거리가 신경 쓰였다. 조금만 좁았어도 합격했을 텐데. 나는 손에 힘을 줘 눈을 모았다. 손을 놓으니 살이 풀리면서 눈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역시나 눈 사이는 멀었다. 아나운서 지망생 클럽에 들어가 봤다. 1차에 합격한 사람들이 자랑 글을 올려놓았다. 합격자가 의외로 많았다. 나만 떨어진 것 같았다. 나는 컴퓨터를 켜고 침대에 누웠다. 아무한테나 하소연하고 싶었다. 종민이가 생각났다. 어차피 군인이라서 전화도 받지 못하니 헤어지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수 오빠한테서 문자가 왔다. 잘 들어갔느냐고. 나는 운수 오빠한테 하소연하려다가 말았다. 운수 오빠한테 말하면 학교에 소문날 것이 뻔했다. 은혜한테 전화하기는 껄끄러웠다. 연락 안 한 지 꽤 되었다. 마지막으로 본 때가 명숙 언니 결혼식 날이었으니까. 경은이도 마땅치 않았다. 경은이는 나의 낙방을 반길 애였다.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을 살폈는데 얘기를 들어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아니, 한 명 있었다.
도곡역에서 기다리는데 성민 오빠가 택시를 타고 도착했다. 오빠는 나를 보마자마 무슨 일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맥주를 마시고 싶었다고 답했다. 오빠를 데리고 동네 맥줏집에 갔다. 금요일 밤이라서 그런지 손님이 많았다. 우리는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후라이드치킨 한 마리와 맥주500 두 잔을 시켰다. 오빠한테 아나운서 시험에 떨어졌다고 말했다. 오빠는 나를 위로해주었다. 내가 아나운서 될 만한 얼굴이 아니냐고 물었다. 오빠는 아나운서는 물론이고 배우해도 될 만한 얼굴이라고 답했다. 나는 기분이 좋아서 과식하고 과음했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 오늘만 욕심 부리자고 나한테 말했다. 오빠랑 대화하는데 자꾸 전화가 왔다. 누구인지 확인하니 종민이였다. 나는 놀라서 화장실로 가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나야. 종민이.”
“어. 웬일이야?”
“지금 너희 집 앞이야.”
“뭐?”
“집 앞에 있다고.”
“왜? 뭐 하러?”
“너한테 할 말 있어.”
“무슨 말? 지금 해.”
“아니. 얼굴 보고 말할게. 잠깐만 나와 봐.”
“나 밖이야. 그리고 지금 못 들어가. 그니까 빨리 가.”
“기다릴게.”
“너 정말 날 왜 이렇게 괴롭히니? 가라면 좀 가.”
“올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종민이가 전화를 끊었다. 상황이 암담했다. 종민이가 전화해서 좋기는커녕 귀찮았다. 집까지 찾아왔다니 총 들고 탈영해서 나를 죽이지는 않을까 걱정됐다. 종민이 성격이라면 그럴 만도 했다. 집착의 둘째가라면 서러울 애니까. 나는 성민 오빠에게 도움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맥줏집을 나와 취한 척 오빠에게 의지했다. 오빠는 나를 부축하고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불안해졌다. 종민이가 어디서 나타날지 몰랐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이고 오빠의 걸음에만 의존했다. 아파트 입구에 다다랐을 때 누가 우리를 막았다.
“보슬아.”
종민이 목소리였다.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여기서 끝장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종민이가 성민 오빠를 밀치고 나를 부축했다. 나는 종민이를 거부하고 밀쳐냈다. 강한 모습을 보여야 종민이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종민이는 목소리를 높였다. 밤중에 소리가 동네에 퍼져서 쪽팔렸다. 가라고 해도 종민이는 안 갔다. 내가 무시하고 아파트로 들어서자 종민이가 팔을 잡아당겼다. 힘을 써 여자를 제압하니까 나도 화가 났다. 보고 있던 성민 오빠가 대신 나섰다. 둘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주먹까지 오가는 상황이 연출됐다. 몸싸움 와중에 내가 다칠까봐 성민 오빠가 나를 저쪽으로 보냈다. 나는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피신했다. 종민이가 내 등 뒤에 대고 말했다.
“야이 씨발! 최보슬 이리 안 와? 이 씨발년아!”
뒤에서 욕하는 소리를 듣자 열불이 났다. 가만있을 수 없어서 종민에게 다가갔다. 이성을 잃으니까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종민이를 노려보고 말했다. 네가 싫어졌으니 이제 떨어지라고. 종민이는 울고불고 매달리더니 땅에 던진 모자를 쓰고 말없이 있다가 가버렸다. 나는 심한 말을 한 것 같아 종민이에게 미안했다. 종민이는 가면서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우리 사이는 완전하게 끝난 셈이었다. 성민 오빠한테도 추한 모습을 보여 미안했다. 오빠는 평소 착한 마음으로 나를 이해해주었다. 집에 와서 씻고 침대에 누웠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이제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나운서 입사밖에 없었다. 연애는 보류하기로 다짐했다. 오랜만에 숙면했다.
아나운서 스터디에 가입했다. 스터디장이 이력서와 명함 사진을 메일로 보내 달라고 했다. 얼마나 대단한 스터디길래 이력서와 명함 사진까지 필요할까. 나는 스터디 가입이 아니라 방송국 입사인 줄 알았다. 금요일에 첫 만남을 가졌다. 스터디 회원 모두 외모가 말끔하고 말투가 또박또박했다. 그들과 함께 있으니 내가 제일 못나 보였다. 외모적으로 못생겼다는 뜻이 아니라 아나운서 기준에 모자랐다는 뜻이다. 외모는 여자 중 내가 가장 예뻤다. 남자가 둘이고 여자가 셋이었는데 두 남자 모두 내게 반한 듯했다. 자기소개를 하는데 모두 스펙(specification)이 훌륭했다. 케이블에 있다가 공중파 가려고 퇴사한 언니도 있었다. 얼굴이 단아하고 말수가 적어서 사람이 신뢰감 있었다. 이름이 곽영선이었다. 스터디장인 남자는 대기업에 다녔다고 말했다. 학교는 서울대라고 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말하면 누가 좋아하는 줄 아는 듯했다. 나는 겉으로 웃었지만 속으로 비웃었다.
“언니, 시험 본 적 있으세요?”
자기를 연옥이라고 소개한 여자가 물었다. 본 적 있다고 하면 몇 차까지 갔느냐고 물을 테고 1차에서 떨어졌다고 하면 비웃을까봐 본 적 없다고 답했다.
“그럼 학원은요?”
“방학 때 잠깐 다녔어요.”
“학원은 꾸준히 다니는 게 좋아요. 학원을 다녀야 연습이 되죠. 혼자 하면 연습도 잘 안 하게 되더라구요.”
너나 잘하세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이도 어린 것이 내가 시험 본 적 없다고 하자 나를 자기와 동급으로 취급해 가르치려고 들었다. 얼굴도 못생긴 주제에.
스터디가 끝나고 개강 파티에 참석했다. 가기 싫었지만 꾸미고 나왔는데 공부만 하고 집에 갈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친구들도 볼 겸 모임 장소인 학교 정문으로 향했다. 가는 와중에 운수 오빠한테서 전화가 왔다.
“보슬아, 너 오늘 오니?”
“네. 지금 가고 있어염. 왜요?”
“아니, 연락이 없길래 너 안 오는 줄 알고. 언제쯤 도착해?”
“한 10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죄송해요.”
“그래? 그럼 우리 소고깃집 가 있을 테니까 그리로 올래? 너 알지? 어디인지.”
“아, 매번 가는 데 맞죠? 그리루 갈게요.”
내가 도착하니 모두 나를 반겼다. 많이 예뻐졌다며 여기저기서 칭찬이 쏟아졌다. 교수님은 내 이름을 부르며 악수까지 청하셨다. 반가운 얼굴이 많았다. 나는 한 명씩 인사한 뒤 방석을 깔고 앉았다. 내 자리는 구석이었다. 저학년은 안 보이고 고학년뿐이었다. 왜 고학년만 있느냐고 친구에게 물으니까 친구가 교수님께서 취업과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방황하는 고학년을 위해 특별 자리를 마련했다고 답했다. 나는 낯선 저학년이 없어서 편했다. 취업과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방황하는 고학년을 위해 교수님이 뭘 해줄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나 아나운서 시켜줄 힘도 없는데, 뭐.
치마를 입어서 앉아 있기 불편했다. 그 모습을 쥐대가리가 봤는지 종업원에게 담요를 주문했다. 쥐대가리는 신방과 학생회장이다. 외모와 언행이 쥐를 닮아서 별명이 쥐대가리다. 쥐처럼 비열하고 야비함의 도수가 일반인보다 높다. 나랑 동기인데, 얼마 전에 전역하고 복학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못 본 사이에 살이 빠져서 쥐를 더 닮아 있었다. 쥐대가리는 신입생 때 나를 좋아했다. 전화도 하고 선물도 주고 고백도 했다. 자기랑 사귀어 달라는 말에 나는 웃으며 거절했다. 진지한 고백에 내 웃음이 충격이었는지 쥐대가리는 내게 차이고 입대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미안해진다. 그날도 그랬다. 나는 쥐대가리와 가까이 있는 것이 불편해서 구석 자리를 택한 것이었다. 쥐대가리가 담요를 가져다주니 부담스러웠다. 나는 다리를 포개고 담요를 무릎에 깔았다. 쥐대가리가 음흉한 눈으로 다리를 쳐다보았다.
교수님이 소주와 동동주를 섞어 잔을 돌렸다. 모두 잔을 들고 교수님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이것은 우리 과의 전통인데, 교수님이 한마디 하고 한입털이를 하면 차례로 따라 해야 했다. 이 전통은 열외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무리 술 못하는 사람이라도 전통은 따라야 했다. 첫 잔만큼은 같이해야 한다는 집단주의 발상이었다. 따지고 보면 전통이 아니라 폐습이었다. 한 사람씩 차례로 한입털이를 했다. 나는 억지로 마셨다. 소주와 동동주가 섞이니 뒷맛이 씁쓸했다. 나는 강단에서 점잖은 교수님이 술자리에서 왜 술을 섞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학자들은 술로 마음을 달래는 듯싶었다.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진로를 물었다. 한 사람씩 뭐 하고 싶은지 대답했다. 대개가 방송국에 입사하기를 원했고 두 명만이 다른 일을 원했다. 한 명은 로스쿨에 가서 인권변호사가 되겠다고, 다른 한 명은 소설가가 되어 불교문학을 쓰겠다고 했다. 둘 다 꿈이 독특했다. 교수님은 아나운서가 되겠다는 내게 관심을 보였다. 자기가 맡고 있는 언론고시반에 왜 들어오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언론고시반에 아나운서를 준비하는 애가 적어서 안 들어갔다고 답했다. 교수님이 들어오면 잘 해줄 테니 생각해 보라고 했다. 쥐대가리가 교수님께 무릎을 꿇더니 잔을 올렸다.
“며칠 전에 교수님께서 두겨레에 쓰신 칼럼 잘 읽었습니다.”
“오, 그거 읽었어?”
“네, 그럼요.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황금만능주의에 대한 비판과 아쉬움, 그로 인해 인문학과 진보에 대한 개념이 괄시되고 오직 경제적 성공만이 가치 판가름의 기준이 된 사회, 그리고 대학 또한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취업 양성소가 된 현실에 비분강개하셨죠. 진취적인 사고와 학문에 대한 열정은 없고 오직 일신의 영달만을 위해 공부 같지 않은 공부를 하는 대학생도 비판하셨습니다.”
“아주 자세히 읽었구만.”
“제가 원래 꼼꼼합니다.”
“내가 뭐 현장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인데, 그런 내가 봐도 우리 사회에 문제가 많아.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나아져야 하는데 암처럼 병만 커지고 있다고. 그 문제의 첫 번째가 정치야. 사람들이 경제, 경제 그러지만 실은 경제는 나중이라고. 정치부터가 안 잡혔는데 무슨 경제를 논해?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 가야겠다는 철학이 없는데 뭔 놈의 경제야. 철학과 사상이 없는 놈이 돈 관리를 하겠다고? 말이 안 되지. 그건 그냥 자기 잇속만 챙기겠다는 거야. 국민들은 또 바보같이 그런 거에 잘 속아. 경제 살리겠다고 하면 자기 지갑이 두꺼워지는 줄 알거든. 이건 웃긴 소리지만, 경제는 내가 어렸을 적에도 나빴어. 언제 한 번 좋아진 적 있나? 신문이나 뉴스에서 경제 좋아졌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 도시와 산업 시설이 발전하고 대기업이 해외에 진출했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서민 경제가 나아졌다는 얘기는 한 번도 못 들어봤다고. 이게 다 정치하는 놈들 때문이야. 그 놈들이 말은 정치인이지 실은 정치에 관심이 없어. 그냥 출세하고 싶어서 국회의원 하는 거라고. 철학도 없고 이념도 없어. 또 의외로 무식하지. 그냥 대충 학창시절에 암기 잘하고 대학 잘 가서 고시 합격하고 그렇게 산 놈들이야. ‘역사의 종언’도 안 읽어본 놈들이 빨갱이가 어떻고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가 어떻고. 걔들이 철학이라고 해봤자 고작 약육강식에 불과한 거라고. 강해져서 약한 놈 것 빼앗자. 그게 끝이야.”
신방과의 특기인 정치 얘기가 나왔다. 나는 벌써부터 지루해졌다. 교수님은 취했는지 말이 많았다. 학생들 대개가 교수님께 잘 보이려고 경청하는 척했다. 쥐대가리의 눈빛과 표정은 진지했다. 몇몇은 자기들끼리 밀담하거나 듣는 척하며 딴생각했다. 교수님의 연설은 끝을 몰랐다.
“나 대학생 때는 학생들이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고. 지금처럼 비싼 옷 입고 명품 가방 들고 다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어려운 책 들고 다녔다고. 그때는 그게 자랑이었어. 나 이렇게 어려운 책 읽고 다닌다, 이런 게 멋이었다고. 그 정도로 학문에 대한 열기가 대단했지. 술자리에서 하는 얘기가 죄다 그런 거였으니까. 근데 지금은 어때? 학생들이 뭐 정치에 관심 있나? 그냥 진보, 좌파 뭐 이런 얘기 하면 다 빨갱이로 보지. 색안경부터 끼고 보잖아. 그리고 누가 대통령이 되든 누가 국회의원이 되든 아예 관심도 없어. 선거하는 날이 무슨 데이트하는 날이야. 부모님이 비싼 등록금 다 대주고, 용돈까지 받으면서 명문대에 편하게 다니니까 사회에 뭐가 문제고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지. 비정규직, 의료법개정, 이런 거에 관심이라도 있나? 없지. 왜? 내 삶이랑은 상관없으니까. 나는 명문대 나와서 대기업 취업해서 중산층으로 잘 먹고 잘 살 테니까 아예 관심 밖인 거야. 뭐가 옳고 그른지를 알고, 어떻게 하면 이 약육강식의 더러운 세상에서 인문학에 기초한 휴머니즘을 꽃피울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지. 그게 대학생이 할 일 아니야? 어? 대학생이 뭐야? 큰 학문을 배우는 학생이잖아. 큰 학문이 뭔데? 아니, 애초에 학문이란 게 뭔데? 이 우주란 무엇일까, 내가 사는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진 걸까, 그 속에 사는 나는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결국 인간적인 생각이 곧 학문이라고. 영어 점수가 높고, 학벌이 좋아야 하고, 어학연수를 어디로 갔다 와야 하고 이런 게 학문이 아니라고. 내가 강의하면서 느낀 건데 우리 학생들 정말 무식해. 명문대라는 게 의심스러울 정도라니까. 죄다 모이면 연예인 얘기나 하고, 손에서 핸드폰이 떠날 줄 모르고, 치마는 또 왜 이렇게 짧은지 내가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지 술집에서 강의를 하는지 헷갈릴 때가 많다니까.”
나는 치마를 입고 있어서 움찔했다.
“그리고 요즘 신방과 학생들 신문은 보나?”
교수님이 물음을 던지고 한 명씩 쳐다봤다. 대개가 말을 못 했다. 쥐대가리가 말했다.
“저는 컴퓨터 할 때마다 인터넷 기사를 봅니다.”
“인터넷으로 읽는 게 그게 기산가? 응? 인터넷에 떠 있는 기사들 보면 정말 형편없어. 요즘엔 아무나 기자 하는 거 같아. 자고로 기사를 읽으려면 종이신문을 읽어야지. 컴퓨터로 본다고 그게 읽혀?”
쥐대가리가 칭찬받지 못하자 아부로 전략을 바꿨다.
“그럼요. 교수님 말씀이 맞습니다. 인터넷 기사는 내용도 이상하고 또 컴퓨터로 보니까 집중이 잘 안 되더라고요. 앞으로는 종이신문 읽겠습니다. 두겨레 잘 읽고 있습니다.”
“내가 언론고시반을 지도하지만 여기에도 할 말이 많아. 나는 신문방송학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우리 언론계가 정말 걱정 돼. 언론사 입사하는 학생들 보면 자기 신념이 없어. 정치 철학이 없다니까. 최소한 자기 생각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데, 그냥 연봉 높은 데만 간다면 된다는 식이야. 기자 정신 때문에 기자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나 이렇게 좋은 데 다니면서 취재하고 글 쓴다, 뭐 이런 자랑이나 자부심 때문에 기자 하는 거 같어. 아니야? 내 말이 틀려? 그니까 데스크에서 지시하는 대로 구라 기사나 쓰고 자빠졌지.”
교수님 말을 듣고 있자 기분이 불쾌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닌 듯 모두 안색이 안 좋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참는 표정이었다. 운수 오빠를 보았다. 오빠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교수님은 술 한 잔 마신 뒤 다시 말했다.
“아, 나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그때는 이상이 있고 희망이 있었지.”
“교수님도 데모하고 그러셨나요?”
한 학생이 물었다.
“그럼. 그때는 데모가 일상이었지. 학교에 군인들이 들어와서 수업도 못 하게 한 적도 많았어. 그러면 우리는 모여서 집회 장소 같은 거 비밀리에 회의하고 그랬지. 짱돌도 많이 던지고, 최루탄도 맞고, 민중가요도 많이 불렀어. 아 또 생각나네.”
“근데 제가 듣기로는 386 중에 실제 데모했던 사람은 몇몇 없었다고 하던데요.”
“누가 그래?”
“아니, 이건 뭐 어디서 들은 건데요. 전체 학생 중 30%만 데모했고 나머지 70%는 나 몰라라 했다고… 그냥 궁금해서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 그래. 데모하는 학생들이 얼마나 많았다고. 그때는 지금이랑 학생들의 의식 구조가 아예 달랐어. 나 몰라라 라니. 넌 그걸 진짜 믿냐?”
“제가 감히 안 믿는다는 건 아니고요. 생각해 보면, 인간은 이기적이잖아요. 나라가 망해도 일단은 자기 먼저 살고 보자는 게 인간인데, 아무리 민주화가 중요하다고 해도 미래까지 내버릴 정도로 투쟁하는 인간들이 많았나, 뭐 이게 좀 의심스러워서요.”
“어디 가서 함부로 그런 말 하지 마라. 우리 같은 사람들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아직도 군사 독재였을지도 몰라. 민주화도 없고 자유도 없을 테지.”
“아, 죄송합니다. 전 그냥 궁금해서…. 사실 이거 저희 작은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는데요. 작은 아버지가 학생 때 데모하다가 다치셔서 몸이 좀 불편하거든요. 지금은 어디 진보 정당에서 간부로 일하시고 있구요. 아무튼 그 데모한 30% 중에서도 군대 안 가려고 일부러 데모하는 척했던 학생도 있었다 던데….”
군대 얘기가 나오자 교수님이 헛기침했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질문했던 학생은 낌새를 채고 말을 멈췄다.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교수님이 바지를 걷더니 다리를 보여주었다.
“자, 봐봐. 이게 데모하다 맞아서 난 상처야. 보라구.”
무릎에 꿰맨 자국이 있었다. 학생들이 고개를 빼고 들여다봤다. 교수님은 입증하듯 모두에게 상처를 확인시켰다. 상황이 기자회견 같았다. 교수는 왜 병역을 면제받았는가? 학생들이 기자처럼 몰려들어 눈으로 사진을 찍은 셈이었다. 나는 저 정도 상처로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예비역인 남학생들 눈에 의심이 감돌았다.
한바탕 대화가 끝나고 휴식을 가졌다. 교수님 연설 탓에 화장실에 못 간 학생은 화장실에 갔고, 실내에만 있어서 답답했던 학생은 바람을 쐬러 나갔고, 술 마시고 담배가 그리웠던 학생은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쥐대가리가 담배를 피우러 나가면서 내게 농담했다.
“보슬아, 오랜만에 같이 피울까?”
같잖아서 대답하지 않았다.
넓은 방에 혼자 남았다. 나는 담요를 치우고 상 밑으로 다리를 뻗었다. 포개고 있던 다리를 펴니 느낌이 시원하고 좋았다. 벽에 등을 대고 고개를 기대니 몸이 풀리면서 졸음이 왔다. 이대로 방에서 혼자 자고 싶었다. 눈을 감고 있는데 누가 들어왔다. 교수님이었다.
“어라! 아무도 없네. 보슬이, 혼자서 뭐 했어?”
“아, 그냥 있었어요.”
“왜? 밖은 싫어?”
교수님이 내 옆에 앉았다. 넓은 방에 둘만 앉아 있으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펴고 있던 다리를 접지 못했다. 다리를 포개고 담요로 가리자니 번거로웠다.
“아나운서를 하고 싶댔지?”
“네….”
“뭐 궁금한 거 있거나 힘든 거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내 친구들이 지금은 방송국, 어디 신문사 그런데 국장이나 대표들이야. 어떻게 보면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많다고.”
“감사합니다.”
“보슬이는 얼굴도 예쁘고 몸도 늘씬하니까 뭐 어렵지 않겠네.”
“아, 아니에요. 과찬입니다.”
“지상파만 생각하는 건가? 케이블이나 지방 쪽은….”
“어디든 되면 저야 좋죠. 없어서 못 가는 판인데요.”
“그래? 아무 데나 괜찮다는 거지?”
“네. 뭐 일단은….”
“다 줄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래도 괜찮겠어?”
“네?! 다 준다뇨, 뭘?”
“흠! 그니까 내 말은… 그만큼 힘든 직업인데 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지.”
“네! 네! 힘들어도 열심히 해야죠.”
“그래. 좋은 생각이야. 열심히 해야지, 열심히. 땀 흘리며.”
발밑에서 무언가 느껴져 놀랐다. 교수님이 내 발목을 만지고 있었다. 당황스러워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막막했다. 나는 그 손이 올라오지 않기만을 바랐다. 화장실로 대피하는 방법도 생각했지만 교수님이 옆에 붙어 있어서 일어나기 불편했다. 잘못하다가는 치마 속을 보일 염려가 있었다. 나는 아무나 방에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쥐대가리가 들어왔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라 교수님이 손을 치웠다. 다른 학생들도 줄줄이 들어왔다. 쥐대가리가 말했다.
“교수님, 안쪽에 앉으시죠. 오늘의 주인공이신대.”
“나는 안이 답답해서….”
교수님은 내 옆을 떠나지 않았다.
술자리가 무르익을 즈음 한 학생이 말했다.
“교수님, 아까 밖에서 좀 생각해 봤는데요. 그럼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음… 꽤 어려운 질문인데.”
진중한 얘기를 꺼내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음담패설을 나누던 사람들이 귀를 세우고 눈을 치켜뜨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진지해졌다. 나는 위선자와 헛똑똑이 들의 대화가 이어질 것 같아 신경을 껐다.
“전 힘이라고 생각해요.”
쥐대가리가 말했다.
“힘?”
“네. 나쁜 뜻의 힘이 아니라 니체의 권력의지 같은 긍정적인 의미의 힘이요. 일단은 힘이 있고 강해야 자유를 쟁취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힘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까요. 저는 우리 역사가 주체성과 정체성을 잃고 열강들 틈에서 성장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힘이 약해서였다고, 뭐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니체까지 거론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는 척은 쥐대가리의 특기였다. 옆에 있던 학생이 말했다.
“꼭 힘만이 전부는 아니지. 중요한 건 올바름이니까. 강한 것이 올바르다는 명제는 성립되지 않아. 그럼 정의는 무조건 강자의 편익이게?”
쥐대가리가 반박 당하자 흥분했다.
“니 말도 맞는데, 그래도 일단 중요한 것은 힘이지. 만약에 힘이 없다면 올바름이 뭐고 정의가 뭔지 생각할 겨를이 있을까? 한 치 앞도 예상 못 하는 세상에 너처럼 형이상학적인 타령만 해대면 과연 그게 올바른 걸까? 힘없는 정의는 무능에 지나지 않아.”
쥐대가리는 어디서 들은 말을 잘도 꾸며댔다. 내가 보기에는 둘 다 형이상학적인 타령에 불과했다. 교수님이 나섰다.
“음… 너희들이 무슨 말 하는지 알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이 세계에서 가장 추구해야 할 가치를 뽑는다면, 아마 숭고가 아닐까?”
“숭고요?”
“그래. 바로 숭고함.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적어도 싸우고 죽이고 욕망에 따라 막 행동하는 동물과는 달라야 할 거 아니야. 그치? 그게 바로 약육강식을 물리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래서 내가 생각했을 때는 무엇보다 숭고가 중요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지. 숭고해야 돼. 정말 숭고하지 않으면 안 돼.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과 구원이라는 것도 사실 역사적으로 따지면 숭고해지겠다는 열망에 기원하거든. 그 정점에 있는 것이 종교고. 바른 세상을 만들겠다는 정치의 이상도 사실 숭고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아. 크게 보면 역사는, 인류의 역사는 숭고함과 저속함의 싸움이야. 전쟁, 식민지, 독재 같은 게 저속함이지. 약육강식의 속성인…. 근데 훌륭한 몇몇 인간이, 의식이 깨인 몇몇 인간들이 이 저속함에 맞서 싸웠단 말이야. 그래서 정신적 가치가 발전하게 된 거고. 역사는 사실 이런 노력들의 산물이지 어떤 세력 다툼과 전쟁의 결과가 아니야.”
알아서 그러는지, 몰라서 그러는지 모두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교수님이 하는 말이 와 닿지 않았다. 여기가 선방(禪房)이나 수도원도 아닌데 웬 숭고 타령? 나는 신방과의 위선과 헛똑똑에 넌더리가 났다.
교수님이 말을 계속했다.
“예술에 있어서도 말이지, 예술. 나는 예술의 역사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예술은 가짜를 인정하지 않아.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확실히 나뉘는 데가 바로 예술이라고. 당대에 아무리 잘나갔던 예술가라도 그 작품에 정신적이 가치가 없다면 후대에 남지 않아. 다 사라져버리지.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를 보자. 너희 살리에리 음악 들어봤어? 모차르트는 들어봤어도 살리에리는 못 들어봤지? 왜일까? 당대 최고의 작곡가였던 살리에리는 존속하지 못하고, 살리에리보다 불우한 인생을 살았던 모차르트가 현재 클래식의 천재라 칭송받는 이이유가 뭘까? 바로 이게 숭고함 때문이야. 아무리 돈을 벌고 잘나갔어도 숭고함이 없으면 시간에 묻히게 되지. 반면에 숭고함이 있으면, 정신적인 가치가 있으면 시간의 흐름에도 마모되지 않고 간직되지. 왜? 사람들이 계속 찾으니까. 거기서 갈증을 해소하고 구원을 맛보니까. 회화도 마찬가지야. 고흐 봐봐. 고흐보다 잘나갔던 화가들 어디 지금 남아 있나? 문학도 똑같애. 우리 인류는 죽을 때까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을 거라고. 그 당시 재밌는 소설로 돈 잘 벌었던 소설가들, 지금은 어디에 남아 있나? 없지. 숭고함이 없어서 그래. 이걸 우리가 사는 세계에 적용해 보자. 너희들 인생도 마찬가지야. 숭고해야 돼. 그냥 좋은 학교 나와서 대기업 들어가거나 뭐 방송국 입사해서 연봉 많이 받고 그러면 끝인 게 아니야. 더 중요한 게 있어. 사람을 볼 때도 마찬가지야. 외모, 학벌, 직업, 연봉, 집안. 이런 거는 사실 아무것도 아닌 거거든. 그보다 중요한 건 이 사람의 인생이, 이 사람 자체가 숭고하냐 안 하냐, 이게 가장 중요한 거라고. 응?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러니까 내 말은 결국, 가장 아름다운 게 뭐니? 최고의 미학이 뭐야? 응? 아는 사람 없어?”
알 리가 없었다. 모두 궁금한 듯 대답만 기다렸다.
“최고의 미학은 바로 윤리학이야.”
쥐대가리가 감탄했다. 연기인지, 실제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행동이 과장된 점으로 보아 연기인 듯했다.
“윤리학이 인문학과 연결되고, 인문학이 휴머니즘과 연결되고, 휴머니즘이 숭고가 되는 거지. 내가 결국 이 자리에서, 취업과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방황하는 너희들을 위해서 해주고 싶었던 말도 결국 이거야. 숭고해져라!”
연설이 끝나자 모두 박수를 쳤다. 쥐대가리가 가장 열심히 쳤다. 무슨 종교 집단 같았다. 숭고를 빌미로 위선자와 헛똑똑이 들을 양산하는 집단. 나는 가소로워서 박수 치는 척만 했다.
술자리는 12시께 끝났다. 교수님이 술에 취해 떡이 된 상태였다. 남학생 하나가 교수님을 부축했고, 교수님은 기분이 좋은지 고깃집을 나올 때까지 내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나는 손 정도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해 불쾌하지마는 않았다. 문제는 교수님이 나를 끌고 함께 택시에 타려고 한 것이었다. 학생들이 말리며 교수님과 나를 떼어놓았다. 쥐대가리가 가장 적극적이어서 고마웠다. 교수님은 인사불성이 되어 고함을 치고 난동을 부렸다. 내 이름을 부를 때는 쪽팔려 죽는 줄 알았다. 학생들이 교수님을 택시에 밀어 넣고 택시를 보냈다. 모두 한시름 놓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지하철이 끊길까봐 걸음을 서둘렀다. 쥐대가리가 따라붙었다.
“너 버스 타고 가지 않아?”
내가 물었다.
“응. 밤길 위험하니까 역까지 바래다줄게.”
“역까지 멀어. 됐으니까 그냥 가.”
“아니야. 난 괜찮아. 버스 늦게까지 있거든.”
내가 안 괜찮아, 라고 속으로 말했다.
쥐대가리는 말을 걸며 계속 쫓아왔다. 쥐덫이라도 사서 길에 뿌리고 싶었다. 내가 높은 구두를 신어 발을 삐끗하자 쥐대가리가 부축했다. 순식간에 팔이 내 겨드랑 안을 침입했다. 내가 팔을 빼려고 해도 쥐대가리는 막무가내였다. 힘이 세서 여자인 내가 어찌할 수 없었다.
“너 취했어. 내가 역까지 안전하게 모실게. 걱정 마.”
쥐가 이렇게 힘이 센지 처음 알았다. 나는 거의 끌려가다시피 했다. 쥐대가리는 내 허리까지 감싸려고 했다. 팔이 허리와 엉덩이 사이에 닿을 듯 말 듯했다. 참지 못한 나는 있는 힘껏 쥐대가리를 밀쳤다. 쥐대가리가 말했다.
“왜 그래?!”
“따라오지 마. 제발 가라니까.”
“너 위험할까봐 데려다 주는 거뿐이야.”
“뭐가 위험해? 나한테 니가 제일 위험해.”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나는 쥐대가리를 무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쥐대가리가 따라와 팔을 잡았다. 나는 짜증이 났다.
“이거 놔! 너 진짜 미쳤지?”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너 아까 나 만지려고 했잖아.”
“헐! 야, 내가 널 왜… 너 내가 그 정도로밖에 안 보이니?”
“어. 그 정도로밖에 안 보여. 그니까 그냥 가. 너랑 할 얘기 없어.”
나는 다시 서둘렀다. 쥐대가리가 쫓아오며 말했다.
“나는 너 오랜만에 봐서 정말 좋았어. 니가 나 부담스러워하는 거 알면서도 너한테 잘 해주려고 노력했다고. 너한테 관심 같은 거 바라지 않아. 그냥 조금만 친절하게 대해주면 안 돼?”
골목에 들어서자 길이 어둑하고 사람이 없었다. 나는 무슨 일이라도 당할까봐 달리기 시작했다. 높은 굽 때문에 발목과 무릎이 부서질 것 같았지만 참고 뛰었다. 쥐대가리가 쪼르르 달려와 나를 막았다. 쥐새끼가 진짜 미쳤는지 내 두 손을 잡고 무릎을 꿇었다. 아무 데서나 무릎 꿇는 것이 취미인 듯했다.
“보슬아, 나 오늘만을 기다려 왔어. 군대에 있는 동안에도 너만 생각했다고. 네가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 알고 내가 얼마나 기뻤는 줄 알아? 자, 잠시면 돼. 나랑 얘기 좀 하자. 너한테 할 얘기가 많아.”
“나 집에 가야 된다니까! 비켜!”
“딱 10분, 아니 5분이면 돼. 늦으면 내가 택시 태워 보내줄게. 가지 마!”
쥐대가리가 무릎을 꿇은 채 나를 안았다. 쥐대가리의 대가리가 내 치마폭에 들어왔다. 나는 놀라서 쥐대가리의 뺨을 후리고 발로 걷어찼다. 뺨이 얼마나 강했는지 철썩 소리가 밤의 정적을 갈랐다. 나는 너무 세게 때린 것 같아 미안했다. 쥐대가리도 내가 때릴 줄은 몰랐나 보다. 뺨을 어루만지더니 겁먹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여기서 약한 모습 보이면 쥐대가리가 또 집적댈 것이 분명했다. 내가 말했다.
“꼼수 쓰지 마. 한 번만 더 그러면 신고할 거야.”
쥐대가리는 졸아서 아무 말 못 했고, 나는 역으로 향했다.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가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애인은 없다. 있어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혼자다. 실존의 중심에는 나밖에 없다. 외부는 나와 격리된 세계일 뿐이다. 나는 거기에 참여하지도 몰입하지도 못한다. 내가 주체성을 확장하면 세상은 낯설음을 그만큼 가져다준다. 우리는 영원한 이방인인 셈이다.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이 많아봤자 소용없다. 인간은 뜯어먹기 위해 친해질 뿐이다. 모든 인간관계는 가식이다. 사랑과 우정도 예외가 아니다. 여자들은 아무리 친해도 친해질 수 없다. 마음이 간사해서 친구가 잘되는 꼴을 못 보기 때문이다. 누가 잘난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면 친구들이 그 애를 시기하고 질투하느라 사이가 틀어진다. 나도 여자지만, 여자는 간악하다. 우주에서 가장 이기적인 동물을 꼽으라면 여자일 것이다. 여자도 자기가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안다. 알아서 슬프다. 모른다면 슬프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존재의 비극을 아는 자가 울음의 의미를 알 듯이 여자도 자기 천성을 알기에 본질적으로 슬프다.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운다. 사람들은 모른다. 내가 웃으면 즐거운 줄 안다. 실은 정반대인데.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내 존재를 알아줄까?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비참함만 커진다. 혼자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혼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나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다. 이제 무쇠의 뿔처럼 혼자서 가자.
페북에 일기를 썼다. 오랜만에 글이 잘 써졌다. 생각에 막힘이 없었고 문장에 걸림이 없었다. 나는 컴퓨터 화면에 뜬 내 글을 여러 번 읽어보고 좋아했다. 그동안 썼던 글은 모두 삭제했다. 나는 오늘 쓴 글 하나면 족했다. 지난 날 쓴 글을 보니 감상적이고 가식적이었다. 내가 그런 글을 썼다니 믿기지 않았다. 댓글에는 칭찬뿐이었지만 달갑지 않았다. 사람들이 컴퓨터 안에서는 웃지만 컴퓨터 밖에서는 비웃을 것 같았다. 사진도 삭제하려다 관두었다. 예쁘게 나온 사진이 많았다. 댓글도 많았기에 지우기 아까웠다. 나는 오늘 쓴 글과 지금껏 찍은 사진만 남기고 페북을 정리했다. 이제 공부만 할 생각이었다. 학교에서 수업 열심히 듣고, 스터디에서 공부 열심히 해서 보란 듯이 아나운서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혼자라는 사실이 두렵지 않았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늘과 땅 사이에 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실존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혼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스터디장이 작문 주제를 정했다. 주제는 세 가지였다. 천식, 다이아몬드, 디트로이트. 하나만 정해도 되고 셋 모두 정해서 써도 되었다. 나는 디트로이트가 왜 나왔는지 궁금했다. 스터디장이 작년 시험에 오사카가 나왔다고 했다. 낯선 도시 이름이지만 어떤 주제가 나오더라도 당황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한 여자가 비싼 다이아몬드를 사러 디트로이트에 갔다가 거기서 천식에 걸려 육체적 고통과 마음고생을 겪은 뒤 물질이 허망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국으로 귀국하는 이야기를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썼다. 어제 일기를 쓴 탓인지 글이 술술 나왔다. 작문을 끝내고 첨삭 시간을 가졌다. 스터디장이 내 글을 읽고 말했다.
“세 가지 주제를 다 사용한 점은 높이 치겠지만 이야기가 너무 단순하네요. 뭔가 정형화된 스테레오타입을 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전 읽자마자 결말을 예측했거든요. 오히려 천식을 앓던 여자가 죽기 전에 자유를 찾으려고 요양할 겸 디트로이트에 갔다가 거기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덤으로 다이아몬드까지 얻는 이야기였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뭔가 글 쓰는 말투가 굉장히 어려요.”
“네?”
“문체가 어리다고요.”
“어리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그니까 사람마다 자기 고유의 문체라는 게 있는데 보슬 씨는 그게 한 중학교 2학년에서 멈춘 느낌이랄까요.”
울컥해서 따졌다.
“제가 멈췄는지 안 멈췄는지 어떻게 아세요?”
“글 읽어보면 알죠. 문장에 베인 말투 자체가 마치 세상을 다 안다는 듯이 말하지만 그것이 이성과 사유로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자기 감정으로 파악한, 그런 느낌이에요. 여중생들이 이런 식으로 글을 많이 쓰거든요. 감성이나 감정에 매몰돼서 자기를 비극의 여주인공으로 내몰고 마치 자기는 대단한데 세상이 몰라준다는 둥 투정이나 부리고. 그러니까 글이 굉장히 감상적이고 가식적이게 되는 거예요.”
“그럼 이성적이고 사유적인 문체는 도대체 어떤 건데요?”
“치밀한 생각과 관찰의 흔적이 보이죠. 그리고 절대 감상적이지 않아요. 문장 자체에 자기성이 없는 것도 특색이고요. 왜냐면 글에 자기가 들어가면 유치해지거든요. 뭐든지 자기를 배제하고 써야 돼요. 보슬 씨 글에는 그 자기가 너무 많아요. 그래서 모든 사건과 대상을 합리화하고 있어요. 그 합리화가 독자가 보기에는 싸구려 감정처럼 느껴진다는 거죠.”
“싸구려요?!”
울음이 나올 뻔했다. 내 글을 비방한 사람은 그 새끼가 처음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꼬집고 발로 차고 싶었지만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기에 비방과 조롱에도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며 웃음으로 화답했다. 내가 미소 짓자 스터디장이 미안했는지 그래도 재밌고 괜찮았다며 마무리했다.
“저도 언니 꺼 보면서 좀 그런 걸 느꼈거든요.”
연옥이 차례였다.
“글에 좀 깊이가 부족하다고 할까요. 왜, 잘 쓰는 작가들 글 보면 굉장히 투명하고 객관적이잖아요. 자기 절제라는 게 느껴지는데 언니 글에서는 절제가 아니라 과잉이 느껴졌어요. 이렇게 뭔가 자기 눈으로만 세상을 봐서 넓고 깊게 보지 못하는 듯한? 또 이런 게 언니 특색일 수도 있는데 그게 공지형이나 박민구 같은 작가들이랑은 또 다른 거잖아요.”
스터디장이 비판하니까 연옥이도 따라서 비판했다. 줏대 없는 년. 나는 스터디장보다 연옥이가 더 싫었다. 비판을 하더라도 자기가 생각한 대로 비판해야지 연옥이는 남이 생각한 대로 비판하고 있었다. 나는 연옥이 말을 듣는 척하며 속으로 비웃었다. 여자애들 중에는 저렇게 줏대 없는 애가 많다.
다음 차례는 영선 언니였다.
“음… 글쎄, 문체에 대한 건 전 좀 다르게 생각하거든요. 그게 어리다 성숙하다의 문제는 아닌 것 같고. 왜냐면 사람마다 자기 목소리가 있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내용이지 목소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이의 목소리로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노인의 목소리로 얘기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김운의 문체는 형태는 짧지만 질감은 무겁지 않습니까. 반면에 조세이의 문체는 어리고 경쾌하죠. 같은 단문인데도 한 쪽은 어른이고 다른 쪽은 아이란 말입니다. 근데 어른이 못 하는 걸 아이는 하죠. 만약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볼>을 어른 목소리로 썼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저는 그만한 문학적 가치를 얻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보슬 씨의 문체는 칭찬해줄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문제는 작문 내용인데….”
영선 언니는 보는 눈이 남달랐다. 말도 논리적이고 깔끔했다. 누구처럼 어렵게 포장하지 않았고, 누구처럼 남을 따르지도 않았다. 영선 언니에 대한 호감이 상승했다. 나는 스터디 끝날 때까지 영선 언니 말만 경청했다. 스터디에 이렇게 좋은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꼭 언니와 함께 아나운서가 돼야지, 라고 다짐했다.
스터디가 끝날 때쯤 영선 언니가 말했다.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요?”
스터디장이 물었다.
“아마 오늘이 마지막일 거 같아요.”
“네?! 갑자기 왜….”
“제가 이번에 엔비씨에 합격했거든요.”
모두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 놀라서 말을 잃은 상태였다. 영선 언니가 웃어 보이자 그제야 모두 축하하고 기뻐했다. 나는 언니를 못 본다는 생각에 속상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는 법이다. 혼자가 되기로 결심하지 않았던가.
영선 언니를 떠나보내기 아쉬워서 여자끼리 저녁을 먹었다. 영선 언니와 둘만 있고 싶었는데 연옥이가 따라왔다. 스파게티 전문점에서 스파게티를 먹으며 수험 생활과 합격 방법과 시험 후기에 대해 들었다. 언니의 합격 수기는 감동적이었다. 원래 법대에 진학할 생각이었다고, 형편이 안 좋아 4년 장학금을 받는 대신 법대를 버리고 터키어문학과에 수석으로 들어갔다고, 터키어문학과에서도 사법시험을 준비했다고, 한 달 방값과 생활비는 아르바이트해서 번 80만 원으로 해결했다고, 1년 공부한 뒤 자기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방황했다고, 어느 날 아홉 시 뉴스 앵커를 보고 아나운서의 꿈을 세웠다고, 공중파에 세 번 도전했는데 세 번 모두 3차에서 떨어졌다고, 희망을 잃고 케이블에 지원했는데 한 번에 합격해서 입사했다고, 근무 환경이 열악하고 자기 계발 가능성이 불투명해 퇴사한 뒤 스터디에 가입했다고, 교우 관계를 끊고 쓸데없는 시간을 줄여 공부했다고, 남자 친구도 사귀고 싶었지만 참았다고, 하루에 4시간 자고 18시간 공부했다고, 이렇게 공부한 지 반년 만에 엔비씨에 합격했다고 했다. 나는 영선 언니가 존경스러웠다. 이런 사람을 왜 이제야 만났을까. 아쉬움이 들었다. 스터디에 일찍 들어오지 않은 것도 후회되었다. 함께 공부했다면 나도 합격했을 텐데. 나는 언니의 외모와 말투와 성품을 닮고 싶었다. 언니는 누가 봐도 아나운서가 될 자격이 있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얼굴만 예뻤다. 말투와 성품은 함량에 미달되었다. 연옥이는 모두 미달이었고.
언니가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적당히 하려면 아예 하지 마. 여기에 목숨 걸겠다는 각오로 도전해.”
집에 가는 길에 연옥이와 지하철을 탔다.
“진짜 부럽다. 언니는 안 부러워요?”
연옥이가 물었다.
“엄청 부럽지. 근데 당연한 일이잖아. 안 될 사람이 된 것도 아닌데 뭘.”
“하긴 스터디 할 때도 제일 열심히 하더니 결국 가장 먼저 됐네요. 엔비씨라… 이번에 여자 한 명밖에 안 뽑았는데,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연옥이와는 할 말이 없었다. 연옥이가 내가 삐친 줄 알았는지 나를 위로했다.
“그거 신경 쓰지 마세요.”
“뭘?”
“아까 스터디장 오빠가 한 말이요. 언니 작문 보고 뭐라 했잖아요.”
“아, 그거. 아니야, 나 신경 안 썼어.”
“에이, 언니 얼굴에 써 있는데요, 뭘.”
“아닌데….”
“그 오빠 원래 성격이 그래요. 할 말, 안 할 말 못 가리고 눈치 진짜 없고 자기가 대단한 줄 알고. 그리고 원래 남자들이 쎈 척 잘하잖아요. 히히.”
스터디장보다 싫은 연옥이가 스터디장을 욕하니 연옥이가 더 싫어졌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꼴이었다.
“아, 맞다! 근데 언니 주말에 시간 돼요?”
“주말? 별일은 없는데, 왜?”
“언니 아나운서 되고 싶은 거 맞죠?”
“응. 그렇지.”
“그럼 방송국 국장님 한 번 안 만나볼래요?”
“국장? 내가 그런 사람을 어떻게 만나?”
“그러니까 제가 소개시켜주겠다는 거죠.”
“니가? 네가 아는 사람이야?”
“히히. 제가 발이 좀 넓어요. 하여튼 만날 거예요, 안 만날 거예요?”
“만나면 뭐 하는데?”
“그냥 같이 밥 먹으면서 얘기 듣는 거죠. 아나운서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나 혼자 만나?”
“아뇨. 저랑 언니랑 그쪽 국장님, 그리고 다른 언론사 간부님 한 분. 이렇게 넷이서.”
“이상한 거 아니지?”
“에이, 아니에요. 언니도 참.”
집에 와서 방을 정리했다. 영선 언니에게 자극을 받아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쓸데없는 물건도 버리고, 화장대에 널브러진 화장품도 정리하고, 더러워진 방 전체도 청소했다. 옷장에 있는 옷도 버릴 것은 버리고 입을 것만 보관했다. 철없던 때 샀던 옷은 소각 대상이었다. 민소매 나시, 짧은 반바지, 짧은 청치마 등 야시시한 옷은 동생 주었다. 동생은 좋다며 자기 방으로 가져갔다. 나는 아나운서가 될 몸이니 옷차림이 단정해야 했다. 영선 언니처럼 튀지 않고 점잖은 옷이 필요했다. 화장품도 몇 개 버렸다. 진한 화장을 고수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아나운서가 될 몸이었다. 과일주스 덕분에 피부도 좋아졌으니 화장을 줄여도 괜찮았다. 책상에 앉아 현재를 점검하고 미래를 계획했다. 그동안 허송했던 삶을 반성하고 새로운 인생 계획표를 만들었다. 언제까지 무엇을 이루고, 나중에 어떤 일을 할지 구체적으로 적었다. 완성한 계획표를 인쇄기로 출력해 책상 앞에 붙였다. 핸드폰 화면도 바꿨다. 검은 바탕에 흰 글자로 이렇게만 썼다.
<적당은 금물! 목숨을 걸자!>
밤에 성민 오빠한테서 전화가 왔다. 주말에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선약이 있었으므로 만날 수 없었다. 평일은 어떠하냐고 물었다. 아무래도 데이트 신청 같았다. 만나기 싫어서 월요일도 안 되고 화요일도 안 되고 수요일도 안 된다고 했다. 목요일은 어떠하냐고 묻길래 안 된다고 답하려다가 오빠가 리포트 과제 해준 일이 떠올랐다. 안 된다고 하면 삐칠 것이고 삐치면 다음에 안 도와줄 것 같아 목요일에 보자고 했다. 오랜만에 남자나 만나서 실컷 얻어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요일 아침부터 준비를 서둘렀다. 약속 시간은 저녁 6시였다. 과일주스를 마시고, 팩을 붙이고, 헬스장을 다녀오고, 입을 옷을 선별하고, 목욕을 하고, 화장을 하고, 미용실에 가니 오후 4시였다. 명숙 언니 결혼식 때처럼 머리에 굵은 웨이브를 넣었다. 원장님이 나한테는 이 머리가 가장 어울린다고 말했다. 강남역에서 연옥이를 만나 한식집으로 향했다. 값이 비싸고 고위층만 드나들 법한 곳이었다. 나는 으리으리한 한옥풍 건물에 압도당했다. 음식점에 들어서니 말끔하게 차려입은 종업원이 우리를 방으로 안내했다. 방에는 중년 남자 두 명이 있었다. 방송국 국장님과 신문사 대표님이었다. 어디 방송국이고 어디 신문사인지는 밝힐 수가 없다. 국장님과 대표님이 우리를 맞이했다. 10분 정도 늦었는데 화도 내지 않으셨다.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했다. 가격이 장난이 아니었다. 숫자 뒤에 달린 0이 무수했다. 눈에 적응 안 되는 가격이었다. 내가 무엇을 시켜야 할지 망설이자 국장님이 대신 주문했다. 종업원이 짧은 치마를 입은 나를 보고 담요를 가져다주었다. 내가 다리를 포개고 담요를 덮자 국장님이 힐끔했다. 대놓고 보지 않는 이상, 남자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밥 먹느라 말이 없었다. 국장님과 대표님도 마찬가지였다. 두 분이 말을 안 하니 우리도 할 말이 없었다. 배고팠던 나는 소식을 잊어버리고 과식했다. 갈비찜, 잡채, 편육, 순두부, 궁중떡볶이, 고등어, 오이무침, 버섯볶음 등 반찬이 다양했다. 나는 영양비빔밥 한 숟갈에 반찬 10가지를 먹었다. 국장님이 나보고 말했다.
“하하하. 어린 여자애가 잘 먹네.”
나는 먹던 것을 삼키고 말했다.
“국장님, 저 안 어려요.”
“그래? 몇 살인데?”
“스물다섯이요.”
“아직 애네, 뭐.”
“왜요? 저 성인인데.”
“사회에서는 서른 살 안 넘으면 애야.”
나는 그런 나이 셈법은 처음 들었다. 대표님이 말했다.
“아이 뭐 아가씨들이니까 그렇게 따지면 안 되고, 남자는 서른 살 넘어야 성인이지만 여자는 졸업하면 어른이나 마찬가지지. 보슬이? 보슬이라고 했나?”
“네. 최보슬이요.”
“어. 보슬이는 졸업한 거지? 지금….”
“아뇨. 아직 한 학기 남았어요.”
국장님이 말했다.
“거봐. 내가 어린애 맞다고 했잖아.”
대표님이 말했다.
“학교는 수억대라고 했나?”
“네. 수억대 신문방송학과요.”
“그래? 그럼 거기 그 뭐냐, 그 뭐시기….”
국장님이 말했다.
“누구? 이 교수?”
“그래! 이 교수 거기 있지 않나?”
내가 말했다.
“네! 맞아요. 저희 과 교수님이세요.”
국장님과 대표님이 웃기 시작했다. 나는 왜 웃는지 궁금했다. 대표님이 말했다.
“그 양반 아직도 학생들한테 이상한 말 하고 그러나? 뭐 도덕적인 얘기나 정치사상 같은 거. 걔가 굉장히 좌(左)스럽잖아.”
“네. 맞아요. 진보 쪽에서 활동도 많이 하시고 두겨레에서 논설위원도 했다고 들었어요.”
국장님이 말했다.
“그게 다 가식이야, 가식.”
대표님이 말했다.
“아직도 학생들한테 다리 보여주고 그러나? 데모하다 무릎 다쳤다고.”
“네! 저 그거 실제로 봤어요.”
국장님과 대표님이 웃었다.
“왜 그러세요?”
내가 물었다.
“그게 데모하다 생긴 게 아니라 군대 안 가려고 미국에 유학 갔다가, 거기서 스키 타다 다친 거야.”
국장님이 답했다. 대표님이 이어 말했다.
“귀국해도 자동적으로 군대 면제. 무릎이 아예 나갔다지? 근데 그걸 데모하다 다친 거라고 학생들한테 그렇게 구라를 치나? 하하.”
내게는 충격이었다. 교수님과 스키는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도피성 유학이라니 말이 되지 않았다.
“근데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내가 물었다.
“왜 몰라? 걔가 우리 동긴데. 이미 우리 사이에서는 소문 파다해.”
국장님이 말했다. 대표님이 덧붙였다.
“그리고 걔가 원래 데모하던 애도 아니었어. 사람들이 뭐 그때 얘기하면 다 데모한 줄 아는데 실제로 한 30% 정도만 데모했다고. 나머지는 도서관에 처박혀서 친구들이 맞아 뒈지든 죽든 상관 안 했어. 걔가, 이 교수가 그 나머지였다고, 원래는. 근데 어느 날 갑자기 막 자기가….”
“학회실 들어와서 회장 되겠다고 하더니 데모 주도했지.”
“엉. 아니, 관심도 없던 녀석이 나타나서 막 제일 앞에서 돌 던지고 그러더라니까. 그래서 우리가 그걸 보고….”
“쑈다. 저건 확실한 쑈다.”
“그치. 이렇게 생각했지. 저 자식이 절대 이런 데 나올 놈이 아니다. 뭔가 있을 것이다 했지. 아니나 다를까. 쁘락치였지, 쁘락치.”
“쁘락치가 뭐예요?”
내가 묻자 국장님과 대표님이 웃었다.
국장님과 나, 대표님과 연옥이가 짝을 지어 헤어졌다. 나는 국장님 차에 올라탔다. 국산이지만 가격이 비싼 차였다. 치마가 짧아서 백(bag)으로 가렸다. 국장님이 운전하면서 힐끔했지만 남자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집에 데려다 주는 줄 알았는데 국장님이 2차를 가자고 말했다. 자기가 좋은 곳을 안다고 했다. 시간이 늦지 않아서 거절하지 않았다. 국장님이 늦으면 자기가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나는 안심하고 국장님을 따랐다.
조명이 은은한 술집이었다. 자리마다 칸막이가 둘려져 있었다. 국장님이 소주와 오뎅탕을 시켰다. 나는 취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칵테일을 마셨다. 둘이 오랫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나는 취업과 연애에 대해, 국장님은 직장과 가족에 대해 얘기했다. 말을 나눠보니 국장님이라는 인간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높은 위치에서 부족함 없이 살지만 거기에도 슬픔과 고충이 있었다. 처음 만난 여대생 앞에서 진심을 털어놓는 국장님을 보며 호감을 느꼈다. 이성적인 호감은 아니었다. 절대 아니었다. 그냥 첫인상과 다르게 착한 사람인 듯했다. 국장님이 말했다. 아내는 밖에 싸돌아다니고 자식은 자기랑 대화하지 않는다고. 집에 들어가도 의지할 사람이 없으니까 외롭다고. 나는 국장님 심정을 이해했다. 상황만 다르지 나도 외로움을 느끼니까. 내가 말했다.
“결국 인간은 혼자인 거 같아요.”
“응?”
“인간은 혼자라구요.”
“그래. 맞아…. 보슬아.”
“네?”
국장님이 뜸을 들이고 말했다.
“옆에 앉아도 될까?”
분위기상 거절할 수 없었다.
“네….”
국장님이 옆에 오자 술 냄새가 풍겼다. 취한 듯했다. 국장님은 내게 몸을 돌리고 말을 계속했다. 혀가 꼬였고 발음이 새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는 척했다. 속으로는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바랐다. 국장님이 내 무릎에 손을 올렸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아까부터 국장님이 다리를 주시하며 기회를 엿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치마를 손으로 누른 채 가만있었다. 무릎은 허용해도 허벅지는 허용할 수 없었다. 국장님은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무릎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언론을 공부하고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다리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국장님이 만취해 대리운전을 불렀다. 돈은 국장님이 알아서 계산할 것이었다. 나는 대리기사에게 국장님을 떠넘기고 돌아섰다. 다행히 시간이 맞아 지하철 막차를 탔다. 승객들이 다 내 무릎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목요일에 오전 수업을 마치고 집에 와 낮잠을 자다가 늦게 일어났다. 성민 오빠와 한 약속을 떠올리고 외출을 준비했다. 샤워하고, 머리 말리고, 화장하니 오후 4시였다. 약속 시간이 4시인데 4시에 준비가 끝난 셈이다. 무엇을 입을지 생각하다가 짧은 반바지가 생각났다. 오늘만큼은 남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싶었다. 그동안 아나운서 따라 한다고 단정한 옷만 입었으니까. 일전에 내가 준 핫팬츠를 동생 방에서 빼앗아 입고 약속 장소인 종각역으로 향했다. 1시간이나 늦었다. 성민 오빠는 카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미안해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성민 오빠는 평소 착한 마음으로 나를 이해해주었다. 카페에서 오빠와 많은 얘기를 나눴다. 학업, 취업, 미래, 연예 등. 학업 얘기할 때는 고3 수험 생활이 주였다. 오빠는 삼수를 했다고 고백했다. 삼수했다는 말을 듣자 호감이 떨어졌다. 본래 호감이 있지도 않았지만. 오빠가 너는 어떻게 대학에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1학기 수시로 왔다고 답했다. 모의고사 점수를 묻길래 둘러대며 대답을 피했다. 내신에 비해 모의고사 성적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내 모의고사 점수는 모두에게 비밀이다. 아마 내가 수능을 봤다면 서울 4년제도 못 갔을 것이다. 연예 얘기할 때는 예능 프로그램이 주였다. 오빠도 나처럼 텔레비전을 좋아했다. 내가 보는 방송을 오빠도 보고 있었다. 공감대가 형성되자 떨어졌던 호감이 올라갔다. 오빠도 자세히 보면 귀여운 얼굴이었다.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었다. 나는 소식과 채식을 잊고 육식하고 과식했다. 살찔까봐 먹으면서 두려웠다. 내일부터 살 빼자, 라고 생각했다.
밖에 나오니 기분이 야릇했다. 서늘한 바람에 내 마음이 살랑거렸다. 밤공기를 맡으니 연애하고 싶었다. 얼굴도, 키도, 학벌도, 직업도, 연봉도, 집안도 안 보고 아무나 사귀고 싶었다. 어쩌면 그 사람이 성민 오빠일지도 몰랐다. 오늘만큼은 기분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이성과 의지를 버리고 감성과 욕망에 휘둘리고 싶었다. 내가 추워하는 것을 느꼈는지 오빠가 겉옷을 벗어주었다. 나는 여자 친구라도 된 마냥 큰 옷을 걸치고 오빠와 걸었다. 오빠가 손을 잡을 듯 말 듯했다. 나는 오빠가 손을 잡을 때까지 가만있었다. 서로 손등이 스치고 오빠의 손가락이 내 손바닥으로 들어오면서 깍지가 끼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성민 오빠한테 설렘을 느낄 줄이야. 나도 믿기지 않았다. 다리가 아파서 청계천 다리에서 쉬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물에 발을 담갔다. 성민 오빠가 내 발을 힐끔했다. 지워진 페디큐어가 보일까봐 물장구를 쳤다. 침묵이 싫어서 오빠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오빠가 멋있어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오빠가 멋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제어되지 않는 것이었다. 여자한테는 이런 순간이 종종 온다. 하루쯤 아무에게나 몸을 바치고 싶은 느낌. 망측한 소리지만 내 심정이 그랬다. 나는 오빠가 스킨십 할 때까지 기다렸다. 여자인 내가 먼저 다가설 수 없었다. 그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여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신호를 주는 일뿐. 오빠가 거리를 좁혀 앉기에 나는 가만있었다. 저항하지 않는 행동, 반응하지 않는 행동은 허락과 수용을 뜻했다. 어깨동무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오빠의 팔이 내 허리를 감았다. 바람과 달랐지만 허리도 어깨만큼 좋았다. 처음에 놀라서 뒤척였는데 팔이 뱀처럼 내 허리를 감쌌다. 간지러우면서 기분이 야릇했다. 오빠가 부끄러운지 몸을 떨었다. 나는 오빠를 편안하게 해주려고 고개를 기댔다. 뇌 깊은 곳에서 이성이 나타나 말했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내가 미쳤지, 미쳤어.
영선 언니가 가고 스터디에 새 회원이 왔다. 여자였다. 나이가 나보다 어리고 학벌도 나보다 낮았다. 아직 학생이라서 시험 경험은 전무했다. 얼굴은 예뻤다. 내가 예쁘다고 할 정도면 진짜 예쁜 것이다. 물론 내 미모에 못 미쳤지만 연옥이보다, 은혜보다, 경은이보다 예뻤다. 이름이 빈이라고 했다. 외자였다. 나는 새 회원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빈이가 어색하지 않도록 말을 걸어주었다.
“학원은 다녔어요?”
“아뇨. 아직요. 스터디가 처음이에요.”
“스터디도 좋지만 나중에는 학원도 다녀야 돼요. 여기서는 카메라 테스트도 못 받고 발음 연습도 자주 못하니까 그런 거는 학원에 가서라도 해야지. 일단 가기라도 하면 어쨌든 연습은 하니까. 그런 게 쌓이고 쌓여서 실력이 되는 거거든.”
“아,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애가 싹싹하고 예의 발라서 마음에 들었다. 연옥이는 경계하는 눈치였다. 자기보다 예쁜 애가 들어오니까 샘이 난 것이 틀림없었다.
이번 주 작문 주제는 피부클리닉, 아이폰(iPhone), 사학재단이었다. 지난번처럼 하나만 정해서 써도 좋고 셋을 다 이용해도 좋았다. 나는 사학재단에 다니는 여학생이 피부클리닉에서 시술을 받다가 반들반들한 자기 피부에서 영감을 얻어 아이폰을 구상한다는 이야기를 썼다. 내용은 단순했지만 피부에서 얻은 영감이 아이폰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치밀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 부분을 칭찬했다. 스터디장은 탄력 있는 피부가 터치스크린(touchscreen)의 모태가 된 부분에서 감동했다고 말했다. 나는 칭찬을 받아서 기분이 좋았다. 연옥이도 스터디장을 따라 칭찬했다. 빈이는 국회의원에 출마한 사학재단의 딸이 비싼 피부클리닉에 다니다가 아이폰 동영상으로 적발된다는 이야기를 썼다. 내용이 비상식적이고, 구조가 허술하고, 문장이 조악했다. 빈이는 작문 실력이 꽝이었다. 나는 독설했다. 빈이를 위한다면 솔직하게 말해주는 편이 나았다.
“처음 써 보는 거라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일단은 이야기가 너무 판타지적이에요. 아무리 작문이라고 해도 서사가 사실성에 기초해야죠. 이런 일이 정말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요? 출제자들은 현실적이고 시사성 높은 글을 원한다구요. 그냥 이렇게 동화같이 써버리면 바로 낙방이에요. 또 제가 지적하고 싶은 건, 문장에 왜 주어가 없어요? 우리말이 워낙 자유로워서 주어가 없어도 의미가 통한다고 하지만 이건 소설이 아니라 입사 시험이잖아요. 그럼 어느 정도 규정에 맞는 문장을 써줘야죠.”
빈이는 발끈하지 않고 내 의견을 수용했다.
그날도 연옥이와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갔다.
“언니, 새로 온 애 어떻게 생각해요?”
“빈이? 음… 괜찮아 보이던데. 아직 처음이라 미숙해도 성실하고 열심히 하는 것 같던데. 너는?”
“전 별로에요.”
“하하. 벌써 별로야? 왜?”
“그냥 제가 딱 싫어하는 타입이에요. 괜히 진지한 척하는 애들 있잖아요. 마치 세상의 고민은 자기 혼자 짊어지고 사는 것처럼 행동하는 애들. 그런 애들이 나중에 뒤통수친다니까요. 언니 걔 좋아하는 거 같던데 조심하세요.”
“아직 처음이니까. 계속 보다 보면 너도 좋아하게 될 거야.”
“전 한 번 싫은 사람은 끝까지 싫어해요. 누구처럼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죠.”
침묵이 흘렀다. 연옥이 말했다.
“아, 맞다! 언니 그날 어떻게 됐어요?”
“국장님 만난 날?”
“네. 또 다른 데 갔어요?”
“그냥 술집 가서 술 마셨어.”
“전화번호는 알려줬어요?”
만취한 국장님이 떼쓰길래 번호를 알려줬다.
“아니. 당연히 안 가르쳐줬지.”
“그럼 술 마시고 헤어진 거예요?”
“응. 너는?”
“저도… 그냥 잠깐 얘기 나누다 헤어졌어요. 솔직히 좀만 친해지고 놀아주면 아나운서 자리는 쉽게 구할 수 있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그렇잖아요. 그 사람들이 우릴 왜 만나겠어요. 다 바라는 게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요? 인간 사회가 엄연히 기브 앤 테이크인데 그냥 밥 먹고 얘기만 나눌 거면 아예 만나지도 않았겠죠.”
“아무래도 국장이나 대표라면 우리보다 더 잘 알고 많은 걸 알려줄 거 아니야. 그래서 만나는 거지.”
“에이, 그런다고 아나운서 되나요? 차라리 그 시간에 발음 연습을 더하지.”
“그럼 넌 왜 만났는데?”
“전 솔직히 전에도 몇 번 만났거든요. 이상한 짓은 안 했고요. 그냥 뭐랄까. 최후의 보루라고 할까요?”
“최후의 보루?”
“네. 언니 만약에 아나운서 안 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아나운서가 안 된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뭐 취업해야겠지?”
“한 번 떨어졌다고 취업하진 않을 테고 계속 도전할 거잖아요. 그럼 나이도 차고 그럴 텐데 취업이 쉽게 될까요? 이것도 모 아니면 도죠.”
“그럼 어떡해?”
“그래서 제가 최후의 보루라고 한 거예요.”
나는 최후의 보루가 뜻하는 바를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는다면 끔찍한 일이었다. 나는 친구를 잘못 사귄 느낌을 받았다. 앞으로 연옥이를 멀리하고 빈이와 가까이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언니!”
“응?”
“소개팅 안 할래요?”
“갑자기 웬 소개팅?”
“제 남친의 친구가 언니 사진 보더니 소개시켜 달라고 했거든요.”
“내 사진 보여줬어?”
“네. 폰에 있는 거요. 어때요? 한 번 만나지 않을래요?”
나는 친구를 잘못 사귄 느낌 때문에 거절했다. 성민 오빠를 생각하는 마음도 있었다.
“아냐. 내 처지에 무슨 소개팅이야.”
“진짜 괜찮은 앤데. 싫으면 말구요.”
나는 호기심이 발동해 어떤 사람인지 물었다. 만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의대생이라고 했다. 학교는 고구려대라고 했다. 집이 잘 산다고 했다. 아빠가 판사고, 엄마가 강남에서 실내건축 사업을 한다고 했다. 키가 178cm이라고 했다. 마른 체형에 옷도 잘 입는다고 했다. 눈은 외까풀에 코가 높고 턱이 갸름하다고 했다. 나는 마음이 흔들렸다. 조건만 들었는데도 가슴이 설렜다. 내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연옥이가 물었다.
“만날 거예요, 안 만날 거예요? 오늘까지 확답 주라고 했는데.”
“오늘까지? 좀만 생각해 보면 안 될까?”
“왜요? 언니 무슨 고민 있어요? 사귀는 사람도 없잖아요.”
“사귀는 사람은 없는데 쫌 잘 되어가는 사람이 있어서.”
“누군데요? 도대체 누구길래 의대생과의 소개팅을 마다하는 거예요?”
나는 연옥이에게 성민 오빠를 설명했다. 연옥이는 성민 오빠의 스펙을 듣더니 분개했다.
“언니! 정신 차리세요. 언니가 지금 그런 남자 만날 때에요? 우리 이제 스무살 초반 아니에요. 그때야 아무 남자 만나도 됐지만 지금은 아니죠. 남자 하나 잘못 만나서 신세 망치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이제 좀 가려 사귀어야 할 때에요. 남들은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은 남자를 만날까 애쓰는데 언니는 그런 찌질이나 만나고 있으니…. 도대체 언니가 뭐가 부족하다고.”
일전에 경은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기한테 남자는 아빠와 애인과 동료밖에 없다고. 지금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았다. 나는 마법에 홀려 독이 뭍은 사과를 먹으려던 참이었는데, 연옥이가 마법에서 나를 깨운 것이다. 나는 하마터먼 남자 하나 때문에 인생을 망칠 뻔했다. 연옥이의 주장은 계속됐다.
“특히 우리 아나운서 지망생은 더 조심해야 돼요. 앞으로 입사하면 여기저기서 선 들어올 텐데 그때 괜히 이상한 남자한테 발목 잡혀 있어 봐요. 헤어지고 싶어도 그땐 정 들고 맘 주고 몸 줘서 힘들어요. 그냥 가볍게 만나거나 아예 솔로로 있는 게 낫죠. 그리고 운 좋아서 재벌가에서 데려간다고 해봐요. 근데 과거 남자관계가 복잡하네. 이걸 어째?”
“그 사람들이 과거에 누굴 사귀었는지 어떻게 알아?”
“언니, 모르는 소리 마요. 그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싶은 거면 다 알아낼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과거 연애 정도 못 밝히겠어요? 누워서 떡 먹기죠. 그래서 재벌가에서는 여대를 선호하죠. 왜냐면 여대는 그만큼 남자 손을 덜 타니까.”
“설마 꼭 그렇지마는 않을 거야.”
“뭐가요?”
“재벌가에서 여대만 선호한다는 거.”
“아, 네. 뭐 말이 그렇다는 거죠. 아무튼 언니! 그 요성민이라는 놈인지 뭔지 그 사람은 진짜 아닌 것 같아요.”
연옥이가 먼저 내리고 나는 지하철에 남았다. 집에 가는 내내 연옥이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 내 인생에 도움 되는 말이었다. 나는 나를 마법에서 풀어준 연옥이에게 고마웠다. 친구를 잘 사귄 느낌이 들었다. 빈이를 가까이하는 만큼 연옥이도 가까이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뒤로 성민 오빠에게 연락하지 않고 연락받지도 않았다.
연옥이의 말대로 의대생은 잘생기고 멋졌다.
“안녕하세요. 박희재라고 합니다.”
목소리까지 묵직한 중저음이었다. 나는 태어나서 이렇게 우월한 수컷은 처음 보았다. 몸매도 모델처럼 늘씬했다. 토요일 정오에 처음 만나서 점심을 먹고 저녁까지 같이했다. 나도 그랬지만 희재 오빠도 나를 좋아하는 눈치였다. 나는 수컷의 사랑과 관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뉴스 진행하는 게 꿈이겠네요?”
“네. 아홉 시 뉴스가 목표죠."
“어쩐지 딱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낌이 왔어요.”
“무슨 느낌이요?”
“아나운서 느낌이요. 얼굴도 예쁘고, 키도 크시고, 목소리도 좋으시고.”
“하하하. 아니에요. 과찬이에요. 오빠도 정말 멋있어요.”
“푸헐. 우리 처음부터 너무 칭찬 일색이다.”
“근데 오빠는 전공이 뭐예요? 의대도 여러 가지가 있던데.”
“항문외과요.”
“하, 항문?”
“네. 제가 치질에 좀 관심이 많거든요. 인간이 왜 치질에 걸리는지 공부 중이죠. 이건 성적 때문에 간 게 아니라 제가 관심 있어서 간 거예요.”
“와. 뭔가 목적이 뚜렷하셔서 멋있는 것 같아요. 괜히 돈 잘 버는 치과나 편한 안과 가는 거랑은 차원이 다르잖아요.”
“이 항문이라는 게 사실은 좀 심오하거든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배출구죠. 인간은 배출 없이 살 수 없죠. 무엇이든 인풋이 있으면 아웃풋이 있는 거처럼 항문도 오만 가지의 입자와 찌꺼기들이 나가는 곳이에요. 참 매력적인 기관이죠.”
저녁을 먹고 오빠가 차로 집에 데려다 주었다. 오빠의 차는 외제차였다. 이름은 모르겠는데 비싸 보였다. 나는 외제차에 처음 타봤다. 승차감이 안정적이었다. 나는 처음 만난 남자의 차에서 잘 뻔했다.
그날 이후 오빠와 급속도로 친해졌다. 매일 문자 보내고 매일 전화 걸었다. 통화하면서 밤새운 적도 많았다. 만난 지 사흘째 되던 날, 오빠가 사귀자고 말했다. 나는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즉석에서 바로 승낙했다. 오빠는 나를 안고 기뻐했다. 나는 오빠의 품에 안겨 연옥이에게 다시 고마워했다.
자동차극장에서 영화 보던 날 오빠가 처음으로 날 만졌다. 오빠는 영화에 집중하지 않고 내 다리만 만졌다.
“오빠, 그냥 영화 보자.”
“잠깐만. 잠깐만 가만있어봐.”
오빠가 치마 속으로 손을 넣고 키스를 시도했다. 나는 입술을 피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처음부터 조심하지 않으면 오빠가 나를 막 대할 것 같았다.
“왜? 하기 싫어?”
“아니. 남들이 보면 어떡해?”
“괜찮아. 이거 유리 선팅 다 한 거야. 밖에서 안 보여.”
“아, 그래도 여긴 싫어.”
“여긴 싫어? 그럼 우리 딴 데 갈까?”
“딴 데 어디? 영화도 안 끝났는데.”
“모, 모….”
“모가 모야?”
“모, 모텔.”
“아, 뭐야. 변태같이.”
“모텔이 왜 변태야?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모텔 가는 게 변태야? 응? 너 그거 니 생각이 이상한 거야.”
나는 일부러 순결한 척했다. 여자가 조신하게 굴어야 남자가 달아오르는 법이다. 오빠가 모텔을 가자고 졸랐으나 내가 거절했다. 오빠는 내가 처녀인 줄 알고 있었다. 일전에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진 적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경험이 없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오빠는 이렇게 예쁜 애가 아직 경험이 없다니 믿을 수 없다면서 좋아했다. 오빠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뻤다. 속인 사실이 들통 날까봐 관계를 계속 미루었을 뿐인데. 나는 오빠에게 미안했다.
“그럼 우리 언제 해?”
“보채지 마. 마음이 준비되면 그때 말할게.”
“그때가 언젠데? 나만 이렇게 죽치고 앉아서 기다리라고?”
내가 말이 없자 오빠가 졸라댔다. 안 하면 바람이라도 피울 기세였다. 나는 대답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럼 다음 주에 하자.”
“진짜? 진짜로?”
“응.”
오빠는 나를 집에 데려다 줄 때까지 신이 나 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 음높이가 올라갈수록 내 마음은 불안해졌다. 오빠 차에 앉아 집에 가는데 전화가 왔다. 성민 오빠였다. 핸드폰을 진동으로 해 놓고 안 받았다. 전화가 계속 왔다.
“누구야? 왜 안 받어?”
“아니, 그냥.”
“누군데?”
“있어. 그냥 친구야.”
“친군데 왜 안 받어?”
“지금 받기 싫어서.”
“왜 싫어? 너 뭔가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내가 오빠한테 숨기는 게 뭐가 있어?”
“그러면 빨리 받아. 그거 남자지? 그치? 남자 맞는 거지?”
“아니야. 운전이나 똑바로 해.”
오빠가 차를 세우고 핸드폰을 빼앗았다.
“성민 오빠? 성민이가 누구야?”
“그냥 학교 선배야.”
“근데 왜 이 밤중에 전화질이야?”
“뭐 물어보려고 그러나 보지.”
“근데 넌 왜 안 받아? 뭔가 켕기는 게 있으니까 안 받는 거 아니야, 지금!”
오빠가 화를 냈다. 나는 짜증이 나서 이렇게 말했다. 복수전공 학과 선배인데 전부터 나를 좋아했다고, 그냥 오빠일 뿐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싫다고 말했는데 전화 계속한다고, 말이 안 통하니까 일부러 전화 안 받았던 것이라고. 오빠가 화를 내며 클랙슨(klaxon)을 주먹으로 쳤다. 경적이 사방으로 퍼졌다. 나는 무서워서 가만있었다. 오빠가 핸드폰을 뒤져 성민 오빠한테서 온 문자를 확인했다.
“뭐? 집 앞에서 기다려? 하고 싶은 말이 많다고? 이런 또라이를 봤나.”
“됐어. 그냥 신경 꺼.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야.”
“씨발, 이런 스토커 같은 새끼가 뭐가 안 나빠! 너도 그래. 이런 일이 있으면 오빠한테 가장 먼저 얘기했어야지.”
“미안해. 나는 오빠가 나 땜에 신경 쓸까봐.”
“그럼 남자 친구가 이런 것도 신경 안 쓰면 뭐 해? 어?”
“미안해.”
나는 울먹였다. 가식이 아니었다. 진짜로 눈물이 나왔다. 오빠의 사랑이 느껴져 감격스러웠다. 오빠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1시간 정도 걸릴 거리가 30분밖에 안 걸렸다. 나는 집에 가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두 오빠가 싸우는 것보다 성민 오빠가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희재 오빠에게 말하는 것이 두려웠다. 손 잡았던 일, 어깨에 기댔던 일, 낯 뜨거운 말로 통화했던 일을 희재 오빠가 알면 나를 버릴 확률이 높았다. 나는 오빠가 사실을 알게 되면 시치미 뗄 작정이었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자 멀리서 성민 오빠가 보였다. 손에 무엇을 들고 있었다. 흉기라도 든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꽃다발과 케이크였다. 희재 오빠가 차를 세우고 성민 오빠한테 달려들었다. 나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두 오빠가 주먹을 들고 싸웠다. 주먹은 들었지만 누구도 먼저 치지 않았다. 욕설이 난무하고 몸싸움이 격해졌다. 주민들이 나와서 싸움을 구경했다. 모두 재미있다는 식으로 쳐다보았다. 개중에는 경비 아저씨도 있었다. 나는 얼굴 팔릴까봐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냥 두 사람만 싸우게 내버려두었다. 한참 욕설이 오가더니 성민 오빠가 자리를 떠났다. 떠나기 전에 차 앞에 얼마간 서 있었다. 성민 오빠의 눈이 선팅 된 창을 뚫고 내 양심을 찔렀다. 그 눈이 내게 나쁜 년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내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잘못된 일을 저지른 것 같았다. 종민이가 그랬듯이 성민 오빠도 내게 같은 감정을 남겼다. 이별 앞에서 남자는 또 착한 놈이 되고 여자는 또 나쁜 년이 되었다. 왜 항상 여자만 나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여자가 싫은 티를 내면 남자가 알아서 관계를 정리해야 하지 않나? 눈치 없는 남자들이 문제다. 결국 여자를 괴롭히는 쪽도 남자다. 귀찮게 문자 보내고, 귀찮게 전화 걸고, 귀찮게 집까지 찾아오고. 남자는 여자를 정말로 귀찮게 한다. 따지고 보면 여자가 나쁜 년이 아니라 남자가 나쁜 놈이다. 언제까지 여자가 당해야 하는가? 못난 남자의 집착과 구속이 나처럼 예쁜 여자를 위협한다. 나는 경은이와 연옥이의 말에 공감했다. 남자는 아빠와 애인과 동료밖에 없고,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행복해진다.
성민 오빠가 떠나고 희재 오빠가 차에 들어왔다.
“보슬아, 이제 괜찮아. 다시는 안 올 거야. 내가 아주 작살을 냈어. 또 너 귀찮게 하면 내가 그땐 진짜 죽인다고 했거든.”
나는 오빠 품에 안겼다. 오빠가 나를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이 한 남자만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했다. 구경꾼이 사라진 뒤에야 나는 차에서 내렸다.
그날이 다가왔다. 오빠와 그것을 하기로 한 날. 오빠는 아침부터 안부 문자를 보냈다. 잘 있어났느냐는 둥, 무슨 꿈을 꾸었느냐는 둥, 오늘 예쁘게 하고 나오라는 둥. 오빠가 보낸 문장에서 수컷의 조급함이 느껴졌다. 나는 그 조급함을 닳은 음부로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처녀라고 했는데 피가 안 나오면 오빠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는 오빠가 클랙슨을 주먹으로 때린 때처럼 내 얼굴을 때릴까봐 걱정이 들었다. 인터넷으로 처녀막을 검색했다. 좋은 정보가 있었다. 여자의 처녀막은 성관계를 통해서만 파열되는 것이 아니라 심한 운동이나 외부 충격을 통해서도 파열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변명할 거리를 찾아내 기뻤다. 피가 안 나오면 어렸을 적 사고를 당해 처녀막이 파열됐다고 거짓말할 생각이었다.
오빠가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샀다. 나는 채식과 소식을 염두에 두고 스테이크 반쪽과 샐러드만 먹었다. 맛있는 양송이 수프도 오빠에게 양보했다. 오빠는 보양식을 먹듯 음식을 해치웠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조급함을 또 느꼈다.
저녁을 먹고 오빠가 나를 모텔로 끌고 갔다. 나는 카페에서 쉬었다 가고 싶었지만 오빠는 막무가내였다. 조급함 앞에서는 아무 말도 통하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 하기로 했잖아. 그니까 커피 좀 마셨다 가자.”
“안 돼! 대실 4시간밖에 안 된단 말이야.”
“4시간이면 충분하네.”
“안 돼. 모자라. 너 그거 하면 시간이 얼마나 빨리 가는 줄 알아?”
“모, 모르지. 나야 당연.”
“그니까 잔말 말고 따라와.”
“근데 오빠가 4시간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가봤어?”
“뭐가?”
“방금 대실 4시간이라매.”
“그래서?”
“그걸 오빠가 어떻게 아냐구.”
“아, 그거 뭐, 친구한테 들었어.”
모텔에 들어가자 종업원이 인사했다. 내부가 깨끗하고 화려했다.
“쉬었다 갈 건데요.”
“3만 원입니다.”
방 번호가 달린 열쇠를 받고 승강기를 탔다. 승강기에서 오빠가 내게 키스했다. 나는 CCTV가 있을까봐 두려웠다. 천정을 둘러보니 CCTV는 없는 듯했다. 방은 아늑하고 거대했다. 우리 집 거실만큼이나 넓었다. 천장이 높은 점이 특이했다. 오빠가 먼저 샤워했다. 나는 침대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았다. 유한도전 재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깔깔대며 보는데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보슬아, 나다.”
목소리가 낯익었다.
“누구세요?”
“국장님이야. 전에 만났던.”
“허걱. 구, 국장님 웬일이세요?”
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텔레비전 소리를 높였다.
“지금 시간 있어? 좀 봤으면 하는데.”
“지금요? 지금은 좀 힘들 것 같은데.”
“왜 무슨 급한 일 있어?”
“아니요. 급한 일은 아니지만… 지금은 만나기 힘들 것 같아요.”
“이번에 공중파 방송 3사에서 아나운서를 뽑는데 엔비씨는 이미 뽑았고, 나머지 두 군데에서 여자는 딱 1명씩만 뽑는다고 하더라.”
새로운 소식이었다.
“아, 그래요? 굉장히 쪼금 뽑네요.”
“그리고 내년에는 아예 TO가 없다고 하던데. 케이블도 한두 명 뽑을지 말지 생각 중이라 하고.”
암담했다.
“그럼 아예 자리가 없는 건가요?”
“없진 않지. 니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어.”
“제, 제가요? 뭘 어떻게….”
“이번에 종편채널도 들어오고 또 지방 쪽이라면 내가 좀 손봐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연옥이가 말한 최후의 보루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이 이런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그것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모호한 ‘것’ 속에서 구체적인 ‘것’을 느꼈다. 오빠와 그것을 하기로 한 날에 국장님과 그것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최후의 보루를 쓸 시점에 와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내 나이 스물다섯. 올해도 안 될 듯하고 내년도 안 될 듯하다. 내후년은 되고 싶어도 못 될 수 있다. 앞으로 아나운서 채용 인원이 줄어든다는 말을 들었다. 하늘에 별 따기만큼 어려운 언론고시. 나는 국장님이 말한 종편과 지방 소리에 귀가 솔깃해졌다. 최후의 보루를 쓸 때가 온 듯했다. 이제 내게 지켜낼 것도 막아낼 것도 없었다.
오빠가 가운을 걸치고 욕실에서 나왔다. 나는 오빠에게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겠다고 했다. 오빠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큰아빠가 돌아가셨다고 답했다. 오빠의 표정은 걱정 반과 아쉬움 반이었다. 오빠가 10분만 시간을 내줄 수 없느냐고 말했다. 나는 이유를 물었다.
“시, 십분 안에 끝낼게.”
“미쳤어! 그게 지금 할 소리야?”
내가 할 소리도 아니었지만 오빠가 할 소리는 더 아니었다. 큰아빠가 돌아가셨다는데 그런 말이 나오나? 물론 거짓말이지만.
나는 멀쩡히 살아 있는 큰아빠를 죽이고 국장님을 만나러 갔다. 오빠는 나를 따라가겠다고 했지만 내가 만류했다. 만류해야 했다. 만류하지 않으면 큰일 나니까.
강남역에서 국장님 차를 얻어 타고 모텔로 향했다. 국장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불안했다. 키스부터 해야 하나? 샤워부터? 콘돔은 끼고 하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것 하는 상상을 하니까 몸이 달아올랐다. 성욕을 느끼자마자 자신에게 혐오감이 일었다. 몸 깊은 곳에서 이성이 말했다. 미친년, 미친년! 미친년, 미친년!
국장님이 나를 침대에 앉히고 끌어안았다. 나는 가만있었다. 차마 두 팔로 국장님을 안을 수는 없었다. 국장님이 내 가슴에 얼굴을 부비고 단추를 풀었다. 나는 당황해서 몸을 피했다.
“자, 잠깐만요.”
“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이런 건지 몰랐어?”
“아뇨. 알긴 알았는데… 국장님 저 정말 되게 해주는 거죠?”
“그럼! 아까 말했잖아.”
“확실히 약속 받고 싶어요. 오늘 이것만 하면 저 정말 되는 거죠?”
“그렇다니까. 이번에 종편 들어가는 거랑 지방 쪽.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어떻게든 해볼게가 무슨 뜻이에요? 확실한 게 아니잖아요.”
“내가 백프로 장담할 순 없어. 왜냐면 만약 니 실력이 아예 안 되는데 내 말만으로 되게 할 순 없잖아. 니 실력이 어느 정도 돼야 내가 거기서 손봐줄 수 있는 거지. 안 그래?”
“그 실력이라는 게 어느 정도여야 하는데요?”
“그냥… 1차 카메라만 합격해라. 그러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정말이죠?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그래. 자, 약속!”
국장님과 소지로 약속하고 엄지로 도장까지 찍었다.
국장님이 내 옷을 벗기고 침대에 눕혔다. 나는 부끄러워서 가운데를 가렸다. 눈 뜨고 있기조차 힘들었다. 국장님이 가방에서 무얼 꺼냈다. 채찍과 치수가 큰 아동복이었다.
“그게 뭐예요?”
내가 물었다.
“자, 들어.”
국장님이 채찍을 건네고 자기는 아동복으로 갈아입었다. 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지 난감했다. 아동복을 입은 국장님은 침대에 엉덩이를 내밀고 엎드렸다. 나보고 때리라고 시켰다. 나는 때릴 수가 없었다. 벌거벗은 내가 채찍을 들고 있는 꼴도 웃겼고, 아동복을 입은 국장님이 엉덩이를 때려 달라는 꼴도 웃겼다. 내가 머뭇거리자 국장님이 말했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이번만 용서해주세요. 한 번만요, 제발 한 번만요.”
갑자기 애 흉내를 냈다. 그 모습을 보자 욕지기가 났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추잡스러웠다. 나는 꼴 보기 싫어서 채찍을 휘둘렀다. 엉덩이를 맞자 국장님이 말했다.
“더 쎄게! 아주 쎄게!”
있는 힘껏 때리고 또 때렸다. 채찍이 남아나지 않도록 엉덩이를 후려쳤다. 강도가 세어질수록 국장님은 좋아했다. 엉덩이가 벌겋게 달아올랐는데도 아파하는 기색이 없었다. 나는 팔이 빠지는 줄 알았다. 쉬려고 채찍질을 멈추니까 국장님이 화를 냈다. 나는 손을 바꿔서 때렸다. 국장님이 바지를 벗더니 자위를 시작했다. 엉덩이를 맞으며 손으로 성기를 흔들었다. 그 모습이 끔찍해서 나는 눈을 감고 마구 때렸다. 국장님이 신음하더니 침대로 쓰러졌다. 이불에 정액이 묻어 있었다. 나는 채찍을 내려놓고 옷을 입었다. 국장님은 잠들어버렸다. 얼굴이 평화로워 보였다. 근심과 걱정에서 해방된 순수한 아이의 모습이었다. 나는 국장님 귀에 속삭였다.
“국장님, 국장님.”
국장님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어?”
“저 가도 되죠?”
“그래. 수고했다. 니 일은 내가 알아서 잘할게.”
“편히 주무세요.”
국장님은 대답 대신 코를 골았다.
밤공기가 들숨을 타고 들어와 몸과 마음을 정화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모텔 골목을 빠져나왔다. 주말이라 그런지 거리에 연인이 많았다. 오빠가 생각났다. 오빠는 무얼 하고 있을까? 내 걱정을 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오빠에게 미안하면서 고마웠다. 이번 일은 죽을 때까지 비밀로 간직할 것이다. 오빠는 물론이고 연옥이한테도 비밀이다. 우주에서 국장님과 나만 알겠지. 나는 떳떳하다.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잘못한 일이 없다.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몸을 판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국장님의, 한 외로운 남자의 쾌락을 옆에서, 아니 뒤에서 도와줬을 뿐이다. 이것이 부정한 짓이라면 세상에 부정 한 번 안 저지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차피 모두 더럽다. 겉은 멀쩡해도 속은 비리한 사람이 많다. 나 정도면 양호한 편이다. 내가 누구를 죽이기라도 했나? 등치고 사기라도 쳤나? 국가에 손해를 끼치기라도 했나?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치기라도 했나? 맹세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다만 열심히 살았을 뿐이다. 그래, 맞다. 열심히 살다 보니까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아나운서가 되려고 국장님에게 채찍까지 든 것이다. 누가 나를 비난할 수 있지? 사귀던 남자 친구 버리고 검사랑 결혼한 명숙 언니가? 외제차 때문에 다른 남자와 바람난 은혜가? 남자 하나 잘 만나서 인생 행복하게 살아보려는 경은이가? 자기보다 예쁜 여자에게 질투심 느끼고 줏대 없이 살아가는 연옥이가? 내가 보기에 나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기들은 군대 간 남자 친구 1년이라도 기다려봤나? 모두 말만 기다린다고 하지 몰래 바람이나 피우고 다니면서. 죄다 가식이고 위선이다. 남자 친구 품에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모습이 스스로 역겹지도 않을까?
역까지 걸어와 지하철을 탔다. 토요일이라 승객이 많았다. 나는 승객들 틈에서 참고 또 참았다. 달리는 지하철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참고 또 참았다. 이제 지하철을 탈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빠의 외제차가 있으니 데이트할 때는 그것을 타면 된다. 학교도 한 학기밖에 안 남았으니 몇 개월만 참으면 된다. 졸업하고 아나운서가 되면 부모님께 졸라서 차를 뽑을 것이다. 출근할 때 타고 다녀야지. 경쟁에 패하고 욕망에 찌든 서민들이나 타는 지하철이랑은 이제 영영 이별이다. 졸업만 하자. 몇 달만 참자. 방송국 입사는 확실하니까 이제 걱정할 일도 없다. 나는 더 이상 취업과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방황하는 고학번이 아니다. 내 미래는 어느 정도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다. 졸업하면 아나운서가 될 테고, 오빠는 유명한 항문외과 의사가 될 테고, 나는 지방 방송국이나 종합편성채널에 있다가 경력이 쌓이면 공중파로 옮길 테고, 오빠랑 결혼해서 강남에 집을 얻어 살 테고, 오빠가 벌어오는 돈까지 합하면 한 달에 최소 800만 원이 넘을 테고, 둘이 열심히 벌어서 나중에 땅을 사고 건물을 사서 노후를 준비할 테고, 자식들 다 키우면 오빠랑 둘이 풍족하게 노년을 즐길 테다. 됐다! 이 정도면 완벽한 인생이다. 누가 봐도 숭고하지 않을까? 아나운서라는 직업, 의사 남편, 키도 크고 외모도 완벽한 연인, 둘 다 명문대 출신, 어디에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양가 집안, 스스로 노력해서 성공을 일군 인생. 아마 내가 자기 계발 서적을 낸다면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다. 책 제목은 뭐라고 지을까? 적당은 금물, 목숨을 걸자? 그래, 이것으로 하자. 표지에 내 예쁜 얼굴이 나오도록 해야지. 사람들이 생각하겠지. 이 여자는 얼굴도 예쁘고 학벌도 좋고 머리도 똑똑하다고. 책날개에 내 경력도 써야겠다. 아나운서 출신이라고. 생각만 해도 기쁘다. 최보슬, 이제부터 숭고해지는 것이다. 쪼잔해지지 말고 숭고한 이상을 추구하자. 외모도 숭고해지고, 성품도 숭고해지는 것이다. 영선 언니처럼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 되자. 외면적으로나 내면적으로 끌리는 사람이 되자. 사람들의 기억 속에 끝까지 남아야지. 숭고, 역시 숭고함이 필요하다. 최보슬, 숭고해지자!

 

당선소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졸업합니다. 학교를 떠난다니 후련하고 아쉽네요.
'88만원세대의 은밀한 매력'이란 제목은 영화감독 루이 브뉘엘의 '부르조아의 은밀한 매력'에서 훔쳐 왔습니다.
당선 소식을 듣고 제 소설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비루하고 조악하네요. 이런 글을, 받아준 성대신문사와 읽어준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올해는 많이 춥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