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펜 화가 김성룡 씨 인터뷰

기자명 서준우 기자 (sjw@skkuw.com)

그의 그림 속 사람들의, 동물들의 생생한 눈빛이 매섭게 우리를 쏘아본다. 날카로운 볼펜의 필치로 내면의 아픔을 극도로 끌어올린 듯한 그 눈빛을 바라보자니 왠지 마음이 편치 않다. 볼펜만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그림들은 친절하거나 따뜻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모습이기에 쉽게 외면하지 못한다. 현실의 면면을 굴곡진 인생이 녹아든 감성으로 걸러내 화폭에 담는 화가, 김성룡 씨를 만나봤다.

서준우 기자(이하 서) 그림을 시작한 계기는 무엇이었나
김성룡 볼펜 화가(이하 김) 어렸을 땐 오히려 문학에 관심이 많아 글쓰기를 더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그림을 그리면서 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시면서 집안 사정이 나빠졌다. 중학교 때부터 포장마차 일에서 집짓는 일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있는 가게에 걸린 그림이 시선을 끌었다. 옛 명화를 베껴 그린 그림이었는데 그날따라 유달리 잘 그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문득 나도 그림을 그려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때부터 물감을 사서 혼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잘 그려지더라. 그렇게 그림을 그려온 지 20여 년이 넘었다.

서 볼펜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나


김 볼펜을 집어든 것도 그림을 시작한 것만큼이나 우연이었다. 온종일 고된 일을 해 번 돈으로 틈틈이 그림공부까지 하려니 경제 사정이 좋지 못했다. 물감이 다 떨어졌는데 섣불리 다시 사야겠다는 엄두를 못 냈다. 그러던 중 바닥에 떨어져 있던 볼펜을 주워들어 그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볼펜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밑그림부터 채색까지 볼펜만을 이용한 사람은 당시엔 내가 처음이었을 거다.

서 최초가 되는 것,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김 지금은 볼펜을 쓰는 화가가 많아졌지만 그때만 해도 나뿐이었다. 선대의 사례가 없으니 참고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 막막한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어렵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오히려 그 막막함이 좋았다. 그림 그리기 시작한 이후로 그림은 나의 전부였기 때문에 사소한 난관에 좌절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길에 내가 첫발을 내디딜 수 있다는 게 기뻤다. 볼펜을 이용하니 덩어리진 물감으로 표현된 기존의 서양화에서 느낄 수 없는 분위기를 낼 수 있었다. 처음엔 기존 미술과 너무 분위기가 달라서인지 비난도 많이 받았다. 그렇지만 그런 반응이 있을 때마다 이 길을 계속 가야겠다는 생각은 더 강해졌던 것 같다.

서 재료가 볼펜이기에 생기는 작업과정의 독특한 점이나 효과가 있다면
김 그림을 그릴 땐 유성 볼펜을 사용한다. 볼펜의 치명적인 단점은 한번 그리고 나면 수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수정이 불가능한 만큼 볼펜이 종이에 닿기 전에 머릿속으로 구상을 완전히 마치고 화폭에 옮겨야 한다. 또 필기구로 적합한 작고 가는 볼펜으로 그림을 그리자면 하루에 6~7시간 열심히 손을 움직여도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꼬박 한 달은 걸린다. 그렇지만 볼펜이 그리는 거칠고 날카로운 선만이 주는 독특한 느낌이 있다. 그림을 통해 등장인물의 내면세계를 적나라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나의 의도와 볼펜의 거친 질감이 잘 맞는다. 100호 캔버스를 볼펜만으로 꽉꽉 채우는 건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테이프를 칭칭 감아 볼펜을 손에 고정시키고 종이에 마구 휘갈기는 기법 자체가 즐거워져 버렸다.

서 볼펜만을 이용해서 그리는 것인가
김 최근에는 다양한 재료를 혼용해서 그린 그림이 더 많다. 성격 자체가 하나에 오랫동안 얽매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크릴 물감, 색연필 등의 재료를 사용해 그림에 색다른 느낌을 주기도 하고 회화와 별개로 판화 작업도 하고 있다. 그렇지만 물감과 같은 채색도구를 이용해 밑그림을 그리더라도 그 위에 볼펜의 필치를 더해 개성을 드러내는 작업은 빠트리지 않고 있다.

서 작품의 분위기가 대체로 어둡고 낯설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김 처음에 그림을 그릴 때 한국의 근대사를 소재로 많이 그렸다. 일부러 어두운 분위기를 내려고 의도하지는 않았다. 우리나라 역사 자체가 슬픔과 한을 많이 담고 있어 그렇게 보이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미술의 핵심은 현실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려다 보니 아무래도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잊혀진 일들을 주로 다뤄왔다. 말하고 나니 소재 자체가 밝은 분위기를 내기엔 어려운 것들이다. 어둡고 낯선 느낌을 받는 또 다른 이유엔 처음 보는 것에 대한 생경함 탓도 있는 것 같다. 그림의 기법이나 형식이 익숙지 않은 구석이 많아 혹자는 불편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서 궁극적으로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


김 그림을 통해 표현하려고 했던 내 느낌이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림에 담긴 작가의 의도가 보는 이에게 온전하게 전달되기는 쉽지 않다. 영화관에 가면 사람들은 마음에 안 드는 영화라도 2시간 가까이 시청한다. 그렇지만 그림은 찰나의 순간에 시선을 사로잡지 못하면 보는 이가 눈길을 돌려버린다. 전시회를 열어도 관람객이 휙 둘러보고 나가는데 20분 남짓이면 충분하더라. 관객의 시선을 묶어두지 못하고 그림으로 의도를 전달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를 위해선 잠깐 새에도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다. 내 그림은 그런 부분에선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그래 왔지만 앞으로도 다루고 싶은 소재는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이다. 때로는 버려진 동물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 인구가 70억에 육박하며 양적·질적 팽창을 거듭하는 지금,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해에 대해서도 다뤄보고 싶다. ‘왜 세상의 어두운 면을 주로 다루느냐’ 묻는다면 ‘밝은 부분은 사람들이 이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서 사연 많은 20대를 보낸 인생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면
김 요즘 대학생들이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알고 있다. 그래도 일주일에 책을 한 권씩은 읽었으면 좋겠다. 학창시절, 일에 지쳐 집에 늦게 들어와도 하루에 책 한 권을 읽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부터 쌓여온 지식들이 나만의 감성으로 걸러져 작품에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고, 그것이 지금까지 그림을 그려올 수 있었던 원천이라고 느낀다. 컴퓨터 앞에서 앉아 단편적 지식을 습득하는 데 열을 올리기보다 다양한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그 주제에 대해 고민해보길 권한다. 언젠간 축적된 고뇌가 몸에서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순간이 올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