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매장 램(LAMB)

기자명 정재윤 기자 (mjae@skkuw.com)

인파로 북적대는 삼청동을 지나 창덕궁 방향으로 발길을 돌리면, 고급스러운 상점들 대신 사람 살아가는 냄새가 풍기는 한적한 골목이 나온다. 이제는 빛이 바래 간판도 읽기 어려운 국밥집 맞은편에, 그리고 ‘상사’라는 이름이 붙은 옛 슈퍼 옆에 편집매장 램(Lamb)은 자리 잡고 있다.

편집매장이라는 도시적인 이름과는 달리 램의 외관은 투박함과 꾸밈없음 그 자체다. 멋없는 단층짜리 낡디 낡은 붉은 벽돌 건물 외벽에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얼룩이며 페인트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오래된 외벽에 걸린 세련된 간판이 어색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이곳이 바로 대리석 빌딩과 창덕궁 풍경이 조화를 이루는 계동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옛 서울의 모습이 남아 있는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동네가 마음에 들어 2002년 한가로운 삼청동 골목에 램을 열었다는 디자이너 허유 씨는 삼청동이 상업화되면서 보다 조용한 계동으로 매장을 이전했다고 말했다.

작은 가게 램은 우리나라 최초의 편집매장이라 불리지만 처음부터 의도하고 편집매장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다. “최초의 편집숍을 만들겠다는 사업가적인 생각을 가지고 문을 연 건 아니에요” 허유 씨 본인의 작품인 소량의 옷과 여기저기서 사 모은 물건들, 그리고 친구들이 만든 옷을 두고 팔던 작은 가게는 ‘조용한 곳에 특이한 매장이 있다더라’는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디자이너들이 많아지면서 점차 어엿한 편집숍의 모양새를 갖추어 나갔다. 이제는 그와 인연 있는 친구들의 옷 외에도 다양한 디자이너들의 제품들을 선택해 소개하고 있다. 램에 걸리기를 희망하는 수많은 옷들 가운데 허유 씨의 선택을 받는 제품은 디자이너 자신의 세계관이 잘 반영된 옷들이다. “하나의 세계가 담겨 있는 옷이 제가 램에 걸고 싶은 옷입니다” 현재 램에는 자신만의 독특하고도 현대적인 디자인을 선보이는 신진 디자이너들의 브랜드 19개가 입점해있다.

작년, 램은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시도를 감행했다. 직조기를 들여와 원단을 직접 짜기로 한 것이다. 램에서 열 발자국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공방에는 벽면 가득 색색깔의 실들과 직접 짠 천들이 걸려 있었다. 직조기에 앉아 익숙한 손놀림으로 천을 짜고 있던 이는 바로 허유 씨의 어머니. 손재주 좋은 어머니가 젊은 시절 태피스트리를 배웠던 경험을 살려 의상 제작에 필요한 천을 직접 짜고 있다. 직조기에 실을 감는 데만 해도 3일이 걸린다고. 이렇듯 오랜 시간을 들여 원단을 직접 짜는 이유를 묻자 허유 씨는 “정서가 느껴지는 옷을 만들고 싶어서”라 답했다. 사실 손으로 직접 실을 엮어 원단을 짜는 작업은 그 자체로 매우 정서적이다. 어떤 색으로, 어떤 질감의 천을 만들 것인지 결정하고 한 올 한 올 손수 실을 엮어내는 일은 사람의 깊숙한 감정이 닿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천을 직접 짜고 꿰매면서 숨결을 불어넣어 만들어진 옷에서는 만든 이의 자취가 은은히 배어나오지 않겠는가.

어떤 곳에서 무엇을 소비하느냐는 개인의 삶의 일부다. 편집매장은 서로 다른 물건들이 한 데 모여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면서 물건뿐 아닌 그 정서까지 소비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한 벌의 옷. 그리고 그 안에 녹아 있는 특별한 감정을 함께 담아오고 싶다면 오늘은 계동의 골목을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