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기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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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기 교수 제공
10년 여 재직한 우리 학교를 떠나 새로운 우리 학교에 자리잡은 지 1년이 되어간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나는 전공분야인 로마법과 민법이 자유에 기초하고 자유를 뜻을 알리는 학문분야라고 생각하며 나름 자유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하여 애쓴다. 자유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단어이다. 그럼에도 구체적으로 자유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분명하지 않다. 정의가 그러하듯 사람마다 자유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내가 생각하는 자유는 우리 가까이에 있다. 자유는 사회 속에서의 자유이며 상대적인 개념이다. 나만의 자유, 너만의 자유는 있을 수 없다. 자유는 다른 사람을 강제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강제를 받지 않는 상태이다. 자유는 다른 사람이 자기의 영역에 개입하지 않도록 스스로 서는 데서 시작한다. 그러기 위하여 자기의 행위의 뜻을 알고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자유는 지식과 재화가 없으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배움은 생소함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고 이를 두려움 없이 받아들여 다른 방향의 도전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 자유에 의미를 부여하는 동기를 발견하고 자유의 폭을 넓일 수 있다. 우리가 열심히 배우고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일정한 정도의 재화는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반드시 있어야 하는 선결요건이다. 가진 게 없어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없다면 자유는 의미를 잃고 개인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근세에 노예해방에 이어진 해방된 노예의 반란이 재화 없는 자유가 가치 없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자유를 유지하기 위하여 재화를 취득하고 보유할 수 있는 능력을 아울러 가져야 한다. 이는 자손에게 경제가 중요하다고 가르친 퇴계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반면에 재화를 물질적·세속적 욕심으로 폄하하고 무소유를 외치는 목소리는 사회와 격리된 나만의 자유가 될 수밖에 없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자유는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을 먹고 자란다. 믿음이 있으면 다른 사람을 강요하거나 압박할 이유도 없다. 이러한 믿음은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와 배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스스로 설 수 있다는 신뢰에서 출발한다. 보다 큰 자유를 위하여 다른 사람을 믿고 그들이 하는대로 두는 기다림의 미학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요즈음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발음이 쉽지 않은 프랑스어가 유행이다. 대화에서 이 단어를 꺼내지 않으면 뭔가 빠진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런데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나에게 아주 생뚱맞고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어색한 표현이다. 사전을 열어보면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와 책임”로 정의된다. 사전적 의미로만 보면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계층적인 개념임이 분명하다. 과연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높은 사회적 신분의 독점물인가? 노블리주 오블리주를 실천하지 않으면 좋은 사람이 아닌가? 그리고 도대체 우리는 어떤 자격에서 다른 사람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요구하는가?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최소조건을 넘어 베푸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다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다른 사람과 같은 정도로 행동한다고 하여 나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우리 모두가 성인이 될 필요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성인이 설 땅이 없지 않겠는가?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인간상은 노블리스 오블리주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 “좋은 시민”이다. 시민은 스스로 자유의 한계를 알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시민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일 필요까지는 없다. 그냥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일어서는 사람이면 충분하다. 시민은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현재에 열심인 사람이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지 않도록 자기에게 성실하고 그 가운데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개개인이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믿는다.    
사람은 자신에 대하여는 과거와 현재를 보고, 다른 사람에 대하여는 기대를 가지고 추측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현저하다. 회상은 동정과 친하며, 기대는 동경과 과장과 친하다. 그리고 설령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하더라도 이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타인의 경험은 나의 경험이 될 수 없고 인식의 대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는 다른 사람에게 바라기 전에 먼저 스스로 그 바람을 실천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그 바람을 요구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을 것을 명령한다. 공허한 자유의 슬로건에 사로잡히지 말고 다른 사람들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다. 厚於責己而薄於責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