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야속 다방>

기자명 엄보람 기자 (maneky20@skkuw.com)

오후 여섯시의 약속다방. 오늘도 역시 손님은 없다. 사장은 만화책에 코를 박은 지 오래. 다방 레지 양희는 애꿎은 사연 신청 종이로 학을 접는다. 디제이 박스 안에서 빈둥대던 필석은 다방 안으로 들어서는 여자를 보며 헛것인가, 눈을 꿈쩍인다. 그녀가 또렷한 사투리로 묻는다. “장사하는 거, 맞지예?”
합천 출신 시골 처녀 스물여섯 살 김신애. 오늘 대구에서 열 몇 번째 선을 보고 홧김에 기차에 올라 상경했다. 신애 주위를 맴맴 돌며 자꾸만 치근대는 서른두 살 노총각 류필석. 멀쩡한 직장 잘 다니다가 디제이로 전향한지 어언 수년째다. 때마침 양희와 사장이 출타를 해 둘만 남은 상황. 능글맞은 이 남자, 어수룩한 이 여자, 어쩐지 서로가 궁금하다.

“선 보는 거 진짜루 싫어예” 밥하고 빨래하고 동생들 돌보며 살란 대로 살았더니, 이제는 골라주는 사람한테 시집까지 가란다. “내가 진짜 이렇게 살고 싶었나 싶고, 왜 여기서 태어났나 싶고, 가슴이 까맣게 타는 것 같으면서 막막하고 갑갑하고…” 고개를 떨구는 신애의 두 눈이 무릎에 놓인 책 제목에 머문다. ?행동하는 여성의 지침서, 깨어라 여성? 서울로 대학을 가 연애결혼에 성공한 친구 미자가 선물한 책이다. 그녀처럼 살고 싶었노라 말하는 신애에게 필석은 디제이박스 안의 세계를 보여준다. 신애의 떨리는 손이 레코드판 위에 턴테이블 바늘을 내려놓자 “Starry, starry night”, <빈센트>의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비좁은 음악다방, 더 좁은 유리 공간 안에서 둘은 잠시나마 바깥세상의 걱정을 잊는다.
그런데 갑자기 거짓말처럼, 비보가 닥친다. 오늘내일하는 파파늙은이 신세였던 약속다방이 결국 그날부로 간판을 내리기로 한 것이다. 졸지에 마지막 손님이 된 신애도, 실업자가 된 필석도 어안이 벙벙하기는 매한가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신애까지 폭탄선언을 하고 나섰다. 망설임 끝에 필석이 연락처를 묻자 “저 결혼해요. 오늘 선 본 사람하꼬”라는 대답이 돌아온 것이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건지. 필석은 그저 디제이로 살고 싶었을 뿐이고, 신애는 자기 삶을 한 번쯤 선택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꿈꾸던 세상을 영영 체크아웃하게 생긴 둘은 주섬주섬 기념품을 교환한다. 신애는 『깨어라 여성』을, 필석은 <빈센트> 레코드판을 그들의 ‘마지막 손님’에게 건넨다. 그리고 다음날, ‘ㄱ’받침이 떨어져 달아난 지 오래인 ‘야속다방’이 쓸쓸히 간판을 내렸다.
아련하게, 아름답게 마침표를 찍는 연극에 시비를 걸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찜찜한 진실 한 조각이 영 마음에 걸린다. 능동적인 삶을 목 놓아 외쳤던 신애는 『깨어라 여성』을 단 두 페이지 읽었을 뿐이며, 디제이 일을 그토록 사랑했던 필석은 <빈센트>가 곡명인지, 가수 이름인지조차 분간을 못한다. 분명 좋아하는 일이라고, 살고 싶은 삶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들은 야속한 세상을 이기기 위해 무슨 노력을 했나?
우리의 물음이 향해야 할 곳은 이미 막이 내려진 무대 저편이 아니다. 산 날보다 살 날이 많은 젊음이기에, 우리는 자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겠다”며 고래고래 외친다. 세상이 내 맘을 몰라준다며 가슴을 콩콩 친다. 그런데 막상 “해봐”라는 말을 듣는다면. 당신, 두렵지 않은가. 야속하다고 칭얼댈 수 있는 다른 비빌 언덕을 찾아 분주히 눈을 굴리고 있지는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