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종로 한복판을 돌아다니고 있다. 각종 외국어 학원과 취업 학원을 전전긍긍하면서. 열심히 책장을 넘긴다. 뒤처지지 않도록 쏟아지는 정보를 꾸역꾸역 담으면서.

우리들의 삶은 언젠가부터 예스러움과 여유로운 독서로부터 한 발짝씩 물러나고 있다. 이로부터 멀어진다고 해서 삶이 풍요로워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무료한 공강 시간에, 혹은 시험이 끝나고 의미 없이 노닥거리지 말자. 가벼운 발걸음으로 인사캠 근처의 고궁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한적한 궁을 거닐며 읽을 책도 옆구리에 한 권 끼고 말이다.

시험공부로 한껏 복잡했던 머릿속을 한적한 고궁에서 천천히 식혀볼 수 있을 것이다.

지민섭 기자 jms2011@skkuw.com 김지은 기자 kimji@

경복궁
단아.
…….
고궁 안에 들어가면 나도 고궁 바깥의 나를 잊게 돼. 이렇게 가까운 곳에 궁궐이 있다는 것을 잊고 지낸 게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내겐 새로운 발견이었어.
…….

근정전에서 바라보는 백악도 처음 보는 산 같더라. 내가 자주 바라보곤 했던 넓은 연못 한가운데 섬처럼 떠 있는 향원정도 처음 보는 정자 같았지. 그것만이 아니야. 보슬비가 내리는 경회루는 신비해 보이기까지 했어. 비가 내리고 있었을 뿐인데 고궁은 그렇게 달랐어.
…….
언젠가, 언젠가 말이야. 너를 그곳으로 데려갈게.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중

 

덕수궁
전하께서는 커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스스로 답하셨다.
내가 노서아 가비*를 좋아하는 이유는 말이다……. 이 쓴 맛이 꼭 내 마음을 닮아서이니라.
…….
그리고 다시 커피 한 잔을 더 청하셨다.
……. 잠이 오질 않는구나. 가비를 많이 마셔서겠지. 가비를 많이 마셔서라도 잠들고 싶지가 않은 나날이었다.
…….
참 이상한 일은 가비를 아무리 많이 마셔도 잠이 쏟아지는 밤이 있고 가비를 입에 대지 않더라도 잠들지 못하는 밤이 있다는 거야. 그런데도 과인은 계속 가비 탓만 해왔느니라. 이 검은 액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노서아 가비: 러시아식 커피(Russian Coffee)

-김탁환의 <노서아 가비> 중

 

운현궁
“아이고-아이고!”
한 마디에서 시작된 그 곡성은 삽시간에 퍼졌다. 내전 사랑 할 것 없이 그 곡성은 삽시간에 전파되어 온 궁내가 곡성으로 화하였다.
…….
“운명하셨다!”
“가셨구나!”
“대감 가셨구나!”
…….
밖으로는 불란서, 미국, 청국 들을 내려누르고, 안으로는 자기의 백성의 복지를 위하여 그의 일생을 바친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별세한 날이다.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 중

 

창경궁
-관람객 여러분께 안내말씀 드립니다. 폐관 시간이 임박했으니 입장하신 관람객께서는 한 분도 빠짐없이 출구 쪽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
건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북쪽에 위치한 전각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곳은 경춘전이었고 뒤로는 상록수들이 담장까지 빽빽이 들어서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요. 순찰 마칠 때까지.”
나무숲 사이로 깊이 들어서서 그들은 바닥에 나란히 주저앉았다. 두 사람의 모습은 자연스레 어스름 속에 섞여들었고 땅에서 올라오는 흙냄새와 나무가 풍기는 특유의 향이 주위를 감돌았다.

-이도우의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중

 

창덕궁
구명한의 이야기에 시형이 문의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문의 안쪽에는 휑한 마당과 길이 놓여 있을 뿐 별다르게 눈 여겨 볼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가만히 보니 정말 왕족들이 드나들었다고 하기엔 그 높이와 폭이 좁고 무엇보다 지나치게 단조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문을 기왕 만들라치면 보다 화려하고 멋스럽게 만드는 것이 일반의 이치 아니겠는가.
…….
게다가 이 둔탁하고 괴기스런 돌문이 궁의 담장 중간에 놓여 있는 것, 그리고 문의 앞뒤엔 그야말로 황량한 길과 공터만이 있을 뿐 무병장수 기원과 관련된 건물이나 조형물이 없다는 것 역시 이 문에 대한 의문을 쏟아지게 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박희선 <불로문의 진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