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운드아트 전시회

기자명 정재윤 기자 (mjae@skkuw.com)

<4분 33초>. 실험음악의 선구자 존 케이지의 작품인 이 곡은 ‘휴식(TACET)’이라는 악상만이 연주되는 소리 없는 연주곡이다. 느지막한 오후에 찾은 백남준아트센터는 <4분 33초>가 흐르는 듯 한가롭고도 조용했다.
그러나 전시관 입구에 들어서자 고요함은 자취를 감추고 관람객들은 수많은 소리에 사로잡힌다. 전시관 곳곳에서 동시에 재생되는 소리들이 뒤섞여 묘한 화음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소리를 ‘전시’하고 있는 이곳은 사운드아트 전시회 ‘x_sound : 존 케이지와 백남준 이후’다.
백남준은 1962년 한 대담에서 “내 삶은 케이지와 만난 1958년부터 시작됐다”고 고백했을 만큼 케이지의 영향 아래 소리와 음악, 그리고 미술 간의 경계를 허무는 창작활동을 해왔다. 전시관 1층에는 깊은 교감을 나눴던 두 예술가가 서로에게 보내는 존경과 애정이 담긴 작품들이 ‘시청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해괴한 소음으로 가득한 사운드 레코딩 작품인 백남준의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는 음악에 대한 고전적 정의를 파괴한 <4분 33초>에 바치는 오마주다. 설치된 태블릿PC의 재생버튼을 누르면 △높은 비명 △침묵 △라디오 소리 △길거리 소리 등이 한 데 엮여 흘러나오며 관람객들의 달팽이관으로 돌진한다.

<장치된 피아노> / ⓒAlice on

케이지와 백남준의 관계가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두 작품은 케이지의 <장치된 피아노>와 백남준의 <총체 피아노>일 것이다. 케이지는 뚜껑을 제거한 피아노의 현 사이에 나사못, 플라스틱 조각 등을 끼워 넣어 피아노 오브제를 제작했다. 관람객들은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며 현과 이물질이 충돌해 빚어내는 소음을 감상할 수 있다. 케이지가 기존의 소리를 변형하려 시도했다면 백남준은 소리를 공감각적으로 형상화해 스승의 피아노를 한 발짝 더 진보시켰다고 평가받는다. 건반을 누르면 피아노에 부착된 전구에 불이 들어오고 헤어드라이어가 작동되는 <총체 피아노>는 아쉽게도 실제 작품 대신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다.
백남준, <총체 피아노> 백남준아트센터 제공
위대한 두 선구자 케이지와 백남준이 주고받은 대화에 충분히 공명했다면, 전 세계 사운드 아티스트 12명의 작품이 뿜어내는 파동에 몸을 맡길 차례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어디선가 투둑투둑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를 두드리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검은 천장으로부터 매달려있는 기다란 은빛 낚싯줄이 먹구름에서 떨어지는 빗줄기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김기철의 <소리보기-비>다. 보이지 않는 소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창작된 이 작품은 비를 눈과 귀로 동시에 경험하도록 만들어졌다. 가만 보니 빗방울을 받는 그릇처럼 보였던 것은 검은 스피커. 스피커에서는 작가가 비 오는 날 종묘에서 채집했다는 빗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빗소리에 몸을 적시고 발걸음을 옮기자 웅장함마저 느껴지는 거대한 탑이 나타났다. 스위스 작가 지문(Zimoun)이 제작한 <230개의 장치된 모터>는 거대한 타악기와 다름없는 종이상자 탑이다. 상자 마다 부착된 모터가 상자의 표면을 끊임없이 두들기며 소리를 만들어내는 이 작품의 내부에 서있으면, 230개의 모터가 동시에 만들어내는 리듬에 맞춰 심장박동이 동기화되는 느낌이다.
<230개의 장치된 모터> / ⓒAlice on

수많은 소리들이 가득 차있던 전시관을 빠져나오면 입장하기 전 느꼈던 교외의 고요함이 어색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전시관을 나와 길 위에 서자 종전에는 들리지 않았던 리드미컬한 소리들이 귓가로 찾아왔다. 하교하는 학생들의 조잘대는 소리, 타닥타닥 운동화가 아스팔트에 부딪히는 소리, 저 멀리 자동차에 시동이 걸리는 소리 … . 무심코 지나쳤던 자그마한 소리들은 이제 한 편의 노상(路上) 교향곡으로 변모해 존 케이지와 백남준의 숨결과 함께 음파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전시기간 : 7월1일까지
   (매달 둘째, 넷째 주 월요일 휴관)
△전시장소 : 백남준아트센터
△관람요금 : 성인 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