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연극연출가 박근형

기자명 유수빈 기자 (newbien@skkuw.com)

 

극작가이자 연극연출가인 박근형은 1985년 극단 ‘76단’에 배우로 입단, 이후 연출로 전향해 1999년 동료와 극단 ‘골목길’을 창단햇다. 그는 <청춘예찬>을 비롯해 <너무 놀라지 마라>, <경숙이, 경숙아버지>, <청년 오레스테스> 등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경복궁역 근처의 작은 다방에서 만난 그는 어쩌다 지나칠 법한 인상 좋은 아저씨 같았다. 소소한 일상에서 극을 이끌어내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김신애 기자 / zooly24@
유수빈 기자(이하 유) : 연극계에 입문했을 때는 배우로 시작했는데 극작가, 연출가로 전향한 까닭이 있나요?

박근형 극작가 및 연극 연출가(이하 박) : 처음에는 연극과 관련된 직업이 배우밖에 없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배우를 했지요. 그런데 배우로 몇 달 지내다 보니 내가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거지요. 배우는 궁극적으로 관객을 직접 만나는 사람들이에요. 무대 위에 잠깐 서 있더라도 그 사람 삶의 흔적이 보이죠. 그래서 배우가 연극의 전부인 줄 알았을 때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하지만 연극을 하는 걸 옆에서 보는 게 정말 좋았어요. 그래서 허드렛일이라도 하면서 극단에 있었지요. 그러다가 배우 말고 연극을 계속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아내 연극 연출을 하게 됐고요.

 

유 : 연극 연출가란 어떤 직업인가요?

박 : 연출가는 나름대로 연극을 아우르는 큰 계획을 세우고 있어야 해요. 연극의 전반적인 색조를 보여준다고나 할까요. 그러면서도 배우 각각의 생각을 듣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연극의 세세한 부분은 배우들이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하기 때문이에요. 배우가 자유롭게 자신이 가진 걸 다 뿜어낼 수 있게 돕는 게 연출가인 거죠. 연출가는 반쯤은 배우가 되고 반쯤은 관객이 돼서 연극을 봐요. 어떨 땐 저 배우가 ‘아, 대사 까먹었어!’라고 당황하는 마음에 공감하고, 또 어떤 때는 관객이 ‘저 배우가 떨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눈에 보여요.

다른 작가의 대본을 연출해야 할 때는, 그 사람의 의도를 따라가되 관객이 이해하기 쉽게 극을 만들려고 노력해요. 그 작가가 관객을 잘 아는 노련한 작가일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는 관객에게 더 편안하게 조금 수정해요. 번역극 같은 경우는 한국 사람의 정서와 맞도록 수정합니다. 작품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그 연극을 보는 관객은 결국 한국 사람이니까요. 외국인들은 자국 사람들 끼리 공유하는 ‘무언가’가 있는데, 그건 우리가 아무리 외국 유학을 오래 다녀도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런 부분을 삭제하거나 한국인의 정서에 맞춰 바꾸는 것이지요. 

<너무 놀라지 마라> / 극단 골목길 제공

유 : 연극이 드라마나 영화와 차별되는 점은 뭘까요?

박 : 연극에서는 배우와 관객이 직접 만나요. 막이 오를 때부터 내릴 때까지 배우와 관객이라는 살아있는 두 생명이 맞닿는 것이에요. 배우와 관객은 단순히 공연하고 그 공연을 보는 관계가 아니죠.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흘러요. 드라마와 영화는 그런 게 없죠. 또, 영화나 드라마는 장면을 카메라로 찍으면 되지만 연극은 그렇지 않아요. 연극은 ‘말’이죠. 말로 장면을 그려내요. 배우가 ‘잘 생각해봐, 여기 눈이 펑펑 오고 있어. 저 눈 오는 벌판을 뛰어가 봐’라고 말하는 걸 상상해보세요. 그러면 관객들은 그 눈 오는 장면을 떠올릴 겁니다.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없이 말로 모든 걸 다 만들어내는 연극이 영화와 드라마보다 더 차원이 높죠.

 

유 : 우스운 장면이 작품에 자주 들어간다고 들었어요.

박 : 웃음은 극장에 있는 모두를 숨 쉬게 해주는 것이에요. 관객이 좀 웃어주면 배우도 숨 쉬며 긴장감도 덜고. 웃음은 많을수록 좋아요. 웃음이 없으면 배우나 관객 모두 경직돼요. 직설적인 이야기를 하면 듣는 관객들이 좀 불편해하는데, 웃어주면 서로 좀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잖아요. 웃음은 연극에 꼭 필요한 요소에요. 아주 잔인하고 비극적인데도 웃게 한다거나, 폭력적인데도 시원하게 만들 듯 웃음 안에 칼날이 들어간다면 더 좋겠죠.

경험상 웃음이 발생하는 건 이럴 때더라고요. 보통 연극을 자주 봐온 관객들은 이야기나 대사의 흐름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는데, 그때 그들이 예상한 길에서 벗어나는 거죠. 대사 속에서 가치가 전도된 말을 하거나, 인물끼리 대화할 때 성격이나 처지가 바뀐 말을 하는 식으로요. 요즘엔 관객들의 예상에서 벗어나려고 노력은 하는데 잘 안돼요.

 

유 : 많은 작품에서 가족을 소재로 하던데요.

박 : 내가 가족 말고 다른 이야기를 만들 재주가 없어요. 많은 경험을 했다기보다는 매일 비슷비슷하게, 작은 집에서 알콩달콩하게 살아와서 그래요. 내가 쓸 수 있는 주제가 폭넓지 않아서 가족이 소재인 극을 쓴 것이에요. 또, 가족 이야기 안에은 부조리적인 요소도 많이 들어있어요. 가족은 서로 징그럽게 미워도 떨어질 수 없고, 저주하면서도 같이 있어야 하고, 사랑하지만 서로 싸워야 하잖아요.

<경숙이, 경숙아버지>

 

<유령소나타>
유 : 연극을 거의 30년 동안 하셨는데, 처음 연극할 때와 달라진 것이 있나요?

박: 많이 게을러진 것 같아요. 바쁘다는 이유로 조그만 것 하나하나를 단단하게 다지지 못하는 것 같아요. 일하긴 하는데, 옛날처럼 정열적으로 일하던 시간이 줄어든 것 같네요. 지금에 만족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옛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그저 흘러가는 거죠. 무료해요. 사는 게 별로에요. 권태롭다고 말할 수도 있고.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면 좋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네요(웃음).

하지만 오는 11월에는 극단 골목길 구성원들과 극장을 빌려서 3개월 동안 축제를 할 거에요. 이제껏 골목길 구성원들과 극장을 빌려서 3개월 동안 축제를 할 거에요. 이제껏 골목길 구성원들과 해왔던 작품들을 다시 공연할 건데, 극장 무대에 있는 갈탄 난로를 중심으로 극을 연출하려고 해요. 그리고 극작가 스트린드 베리 서거 100주년을 맞아 그의 작품 <유령 소나타>를 연출할거에요. 원작이 어려우니까 관객에게 더 편안하게 바꿔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