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수빈 기자 (newbien@skkuw.com)

 

올해도 <어매이징 스파이더맨>, <다크나이트 라이즈>, <어벤저스>가 극장가를 찾았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영웅이 등장한다는 것. 이제 한국 사람들에게 △배트맨 △슈퍼맨 △스파이더맨 등 '맨' 자로 끝나는 이름에 쫄쫄이를 입는 '영웅'들은 익숙해졌다. 그러나 우리의 조명을 받지 모샇ㄴ 채 묵묵히 일앟는 영우들이 있다. 전형적인 영웅물의 틀과 다른 노선을 걷는 이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브이 포 벤데타』 속 브이

"제 소개를 해야 하겠지만 사실 저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는 긴 모자와 검은 망토를 쓰고 다닌다. 총기의 시대에 와서는 구시대적 유물이 된 칼이 그의 허리춤에 채워져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드러내는 가장 훌륭한 상징은 그의 하얀 가면일 것이다. 다소 우수꽝스러운 단발 머리에 가늘게 찢어진 눈, 뺘므이 홍조와 긴 콧수염에 빙그레 미소 지은 얼굴은 400년 전 영국 국왕 제임스 1세를 암살하려던 가이 포크스를 본뜬 가면이다. 신촐귀몰한 브이가 지나간 자리에는 벽면에 새겨진 "V"라는 표식과 희생자들, 그리고 바이올렛 카슨(Violet Carson)이라는 꽃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의 가면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뒤에는 얼굴이 있지만, 얼굴의 주인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브이의 정체는 망토 두르고 가면을 쓴 신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체주의가 만연한 영국의 독재정을 파괴하고자 하는 신념이다. 그래서 총을 맞은 브이는 이렇게 말한다. "날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낭? 이 망토 안에는 살이나 피가 없어요. 거기엔 아이디어만 존재할 뿐입니다." '브이'라는 신념은 그를 움직이는 누군가가 바뀌어도 영원히 살아남는 것이다,

브이가 대변하는 신념의 정체는 아나키즘이다. 그는 새로운 사회 질서를 제시하지 않고 무질서와 혼돈을 주장하며, "영국은 언제나 승리한다"라는 이름 아래 다수의 눈과 귀를 틀어막는 독재자 아담 수잔의 정권에 대항한다. 이 아나키즘의 맞수는 몇몇 인간들이 아니라 체제기 때문에 그는 생대방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는 망설임 없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친밀한 관계였던 살마을 고문하기도 하낟. 그 모든 행동은 사악한 전체주의보단 더 나은, 고결한 자신의 신념으로 정당화되기에 브이는 거리낄 것이 없다.

수많은 영웅은 자신의 행동과 신념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러나 브이는 그 자체가 바로 신념이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다. 브이(V)는 전체주의에 능욕당한 정의의 복수를 위한(for Vendetta) 행동을 할 뿐이다.

한편으로 브이는 낭만적이기도 하다. 감시반을 혼내줄 때는 멋들어지게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읊기도, 주교를 살해할 때 베토벤 5번 교향곡을 트릭도 하낟. 정의라는 이름의 동상에게 그녀가 타락했다고 선언하는 등 시적인 연극을 독자들에게 선사하는 쇼맨십적인 태도도 보인다. 이는 그의 숙적 아담 수잔의 전체주의가 온갖 문화와 감성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영국 체제의 대적자인 브이는 구조적으로 낭만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왓치맨』 속 로어셰크

"시간이 지나자 마스크가 그의 뇌를 삼켜버렸지."

로어셰크는 역한 냄새를 풍기는 갈색 프록코트와 하얀 목도리를 두르고 중절모를 쓴 음침한 이물이다. 그가 자신의 피부로 여기는 가면은 하얀 라텍스에 검은 점성액을 넣어 만들어졌다. 열기와 압력에 따라 변하는 이 얼룩은 좌우 대칭으로 포개지는 데칼코마니를 연상시킨다. 이 캐릭터는 ;헤르만 로르샤흐'라는 이눔ㄹ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했다. 로르샤흐는 좌우대칭의 잉크 얼룩이 어떻게 보이는가에 달 ㅏ인격 장애를 판단하는 '로르샤흐 테스트'를 개발했는데, 이 검사에 쓰이는 문양들은 로어셰크의 가면과 대단히 비슷하다.

로어셰크는 "올바름"을 극단적으로 추구한다. 그에게 세상의 모든 건 옳으냐 그르냐로 갈리낟. 도둑질은 당연히 나쁜 짓이고, 여성의 옷을 헤집는 것도 건전치 못하다. 강도질, 살인 모두 용납할 수 없다. 폭력도 당연히 악한 행동이다. 로어셰크의 말투가 간결하고 직설적인 것도 그의 이분법적이고 명료한 사고 때문일지도 모른다.

『왓치맨』 세계에서 영웅들의 자경 활동은 금지돼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 처벌해야 할 악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자경 활동을 이어간다. 정작 자신도 범법자지만 로어셰크는 결코 범법자들에게 자비를 보이지 않는다. 그의 손을 거친 어떤 범죄자도 몸 성히 감옥으로 들어갈 수 없다. 진실을 캔다는 명목으로 손가락 한두 개를 부러뜨리는 건 기본이다. 필요하다면 전기로 살마을 감전시키기도 한다. 그의 비틀린 성격은 불우한 어린 시절 탓인데, 한때 그는 매춘하는 어머니를 두 눈으로 보고 또래 아이들에게 괴롭힘 받던 아이였던 것이다. 그의 과격한 폭력성 때문에 대중과 범죄자들, 심지어 같은 영웅들도 모두 그를 증오하면서도 두려워한다. 사람들에게 로어셰크는 스스로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미친 남자일 뿐이다. 정작 영웅 로어셰크는 자신의 행동을 "더 큰 선을 이루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행하는 사소한 악"이라고 정당화하지만 말이다.

로어셰크에게는 어떤 초능력도 없어서 그는 순발력과 무술만으로 상대를 제압한다. 일반 사람과 다른 영웅들과 차별되는 로어셰크의 능력은 그의신념을 받쳐줄 광기 어린 끈기와 기민함이다.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도, 모두가 트렸다고 말했을 때도 그는 꾸준히 자신의 신념을 실천해갔다. 그러니 집요하게 옳고 그름을 따지던 로어셰크가 세상 바깥으로 자신을 내몬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그는 거짓으로 지탱되는 세상을 견딜 수 업성ㅆ다. 진실이 올바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어셰크에게 타협은 없다.

 

『샌드맨』 속 꿈

"꿈은 인간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림자를 드리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면"

샌드맨은 눈가에 모래를 뿌려 사람들을 잠들게 하는 서양 요정이다. 그 이름을 제목을 삼은 이 책은 인격화된 개념들의 집합인 영원 일족의 셋째 '꿈'에 대한 이야기다. 꿈은 꿈의 세상인 꿈결을 지배한다. 그 세계는 온갖 상상과 아직 출판되지 않은 이야기들, 꿈과 악몽, 그리고 매일 밤마다 그를 방문하는 자들로 가득하다. 꿈에겐 '이야기의 왕자'나 '카이쿨', '꿈의 술탄' 등 다른 이름이 많지만 작중에서는 '모르페우스'라는 이름으로 가장 많이 불린다. 

꿈은 원하는 대로 생김새를 바꿀 수 있으나, 보통은 깡마른 몸에 창백한 얼굴, 새까만 산발 머리를 하고 있다. 우울하고 꼬인 성격을 반영하듯 그의 얼굴엔 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러나 그의 두 눈만은 또렷이 빛난다. 꿈의 상징은 방독면에 긴 호스를 단 기괴한 투구라서 『샌드맨』은 그를 투구 쓴 인물로 묘사하기도 한다. 꿈은 전투에 임할 때 투구를 쓰는데, 검은 망토를 두르고 하늘을 날 때는 흡사 까마귀처럼 보인다.

이야기의 왕자라는 별명처럼 꿈에겐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세련되게 각색한 신화와 전설들이 꿈과 함께 등장한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신비로운 나그네가 물 흐르듯 환상적인 사연을 풀어내는 것 같다. 독자들이 읽는 이야기 속에서 꿈은 이야기의 중심이 되기도 하고, 변두리에서 들쑥날쑥 등장하거나 꿈결이라는 거대한 무대를 제공하기만 할 때도 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꿈은 앞에서 소개한 두 영웅 ㅔ비해 훨씬 거대한 존재다. 그러나 꿈의 행동거지와 성격은 오히려 두 인물보다도 더 인간적이다. 영원한 시간을 살아가면서 세상이 너무 지루해진 그는 평소에는 뚱해 있고, 또 침울하며 소심하기까지 하다. 거기에 자존심은 하늘을 찌른다. 사랑하던 여인이 자신을 거절했따는 이유로 그녀를 만 년간 지옥에 보내버리기도 하고, 자신의 유일한 아들 오르페우스를 죽이기까지 한다. 그의 이런 꼬인 성격 탓에 생긴 원수가 훗날 꿈의 뒤통수를 때리는 것도 다반사다. 그러나 한 인간이 건 주술 탓에 지하에서 70여 년간 갇혔던 이후로는 타인들의 고통을 이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비록 만성적인 우울함에 시달리는 소인배지만 꿈은 자신의 직무만큼은 열심히 한다. 꿈이 주로 하는 일은 꿈결을 관리하는 것인데, 이는 꿈결에서 일어나는 일은 현실에도 반영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악몽을 싫어하고 길몽을 좋아하는 데 반해 그는 꿈에 귀천을 두지 않고 모든 꿈의 주민을 포옹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