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에겐 "남친 있어요?" 남자에겐 "여친있어요?". 나는 종종 상대와 이러한 질문을 주고받으며 어색한 정적을 무마하기도 한다. 헤테로(이성애자)의 비율이 상당한 우리나라에서는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인사치레용 질문이지만 사실 이 질문에는 무모한 전제가 내포돼 있다. 여자는 남자를, 남자는 여자를 만나야만 한다는 가정 말이다. 일상적인 언어들이 누군가에게는 비수가 될 수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해준 소설을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박상영 작가의 연작소설 이다. 그중 에서는 쌉싸름한 사랑의 맛을 느낄
작년, 내가 한창 학교 앞 헬스장을 열심히 다닐 때의 일이다. 내가 다녔던 A 헬스장은 학교랑 가깝고 요금이 아주 저렴한 대신 시설이 좋지 않고, 깔끔한 편은 아니었다. 당시 나는 거의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운동을 했었는데 내 바로 전 시간에 운동을 하시는 60대 아주머니가 계셨다. 그 아주머니는 항상 일회용 샴푸를 쓰고 그 껍질을 샤워장 바닥에 버리고 가는 안 좋은 습관이 있으셨다. 나는 샤워를 할 때마다 그 아주머니가 버리고 간 쓰레기를 주워 버리곤 했었다. 그리고 매번 생각했다. ‘부끄럽지도 않나? 참 뻔뻔하다!’ 거의 잊
여기 죽어가는 노작가가 하나 있다. 노벨 문학상을 받았지만 수십 년 넘게 자택에 틀어박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주의 작가 프레텍스타 타슈다. 타슈는 속칭 연골암이라 불리는 ‘엘젠바이베르플라츠’ 증후군에 걸려 살날이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 전 세계의 기자들은 죽음을 앞둔 대문호를 인터뷰하기 위해 새떼처럼 몰려든다. 타슈는 그중 극소수를 엄선해 자신과 인터뷰할 기회를 하사한다. 기자들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은 타슈가 지독한 인간 혐오자라는 사실이다. 허위에 대한 혐오감으로 가득 차 있는 타슈는 문학과 독자, 나아가 인간의 허위를 낱
사람은 누구나 이상적인 연애를 꿈꾼다. 나를 완전히 이해하고, 공감하고, 취향과 관심사가 같아 언제나 대화가 즐거운 사람.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수많은 연인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싸우고, 고통받는다. 그럴 바에 나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인공 지능과 사귄다면 행복하지 않을까? 2014년 개봉한 SF 로맨스 영화 는 이 발칙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잔잔하게 풀어낸다.주인공 테오도르는 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 서비스 회사의 직원이다. 그는 하루 종일 남들을 위해 아름답고 따스한 말을 써 내려가지
당신은 당신의 가족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죽어가는 당신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맨정신으로 눈과 혀를 뽑아 신에게 바칠 수 있는가? 질문에 답하기를 망설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기꺼이 희생하겠노라고 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름 앞에서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개념들은 희미해진다. 사람들은 이것이 가족애의 힘이라고들 한다.2019년 출시된 공포 게임 에서는 80년대 대만의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유명 극작가인 두펑위, 가수이자 여배우인 궁리팡, 아역 스타를 꿈꾸는 어린 딸 두메이신까지. 이들
12월의 첫날, 과제를 하기 위해 들른 한 카페의 플레이리스트가 온통 캐럴이었다. 캐럴이 들릴 때면 올해가 거의 다 지나가 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사람들은 한 해를 마무리할 때 스스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올해는 후회 없는 한 해였을까?” 이 문장 속 불청객은 ‘후회’다. 한 해를 돌아보며 후회되는 일을 묻는다는 건, 다시 말해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당신들에게 다시 한번 묻겠다. “올해는 후회 없는 한 해였는가?”이 질문에 어떤 답변이 돌아올지 정확히 알 방법은 당연히 없다. 다만 이
에서 집단은 무엇인가. 유명 미스터리 작가인 할런 트롬비가 자신의 생일에 살해된다. 용의자는 할런의 자식들과 간병인 마르타다. 모두 저마다의 알리바이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영화는 시작한다.영화에 등장하는 주된 집단은 할런의 자식들이다. 이들은 개개인이 하나의 집단을 대표하는 동시에 ‘트롬비 가족’이라는 공통의 집단을 형성한다. 할런의 자식들이 모두 모여 이민 정책에 대한 논쟁을 펼치는 모습을 보면 각자가 어떤 집단을 대표하는지 알 수 있다. 예컨대 할런의 첫째 사위는 불법 이민자들은 합법적으로 들어오지 않은 것에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통념적으로 우리는 지도가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며, 따라서 누군가를 위하거나 무언가를 대변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리 브로턴은 그의 저서 『욕망하는 지도』에서 지도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인류의 욕망을 투영한 채 그려져 왔으며, 지배적 권력이나 권위와 매우 밀접하다고 말한다. 유럽 열강들에 미지의 세계를 보여주며 탐험과 정복의 열망을 자극하던 지도는 18세기 프랑스에서는 관념적이던 국가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시각화함으로써 민족주의를 촉진했고, 20세기에는 새로운 세계의 중심을 지정하며 정치적 욕망
2003년 발표된 스웨덴 철학자 닉 보스트롬의 논문 「ARE YOU LIVING IN A COMPUTER SIMULATION?」은 다음 세 명제 중 하나는 반드시 참이라 주장한다. 1) 인류가 포스트 휴먼에 다다르지 못하고 멸망했거나 2) 인류가 포스트 휴먼에 다다랐으나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사용하지 않았거나 3) 포스트 휴먼에 다다른 인류가 수많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돌렸거나. 만약 세 번째 명제가 참이라면, 우리는 어쩌면 게임과도 같은 수많은 시뮬레이션 세상 속 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한편 여기 인생 역시 게임과도 같이
수많은 사회 문제가 범람하는 요즘 시기에 종종 ‘슈퍼 히어로’와 같은 영웅이 나타나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망상에 빠지곤 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비단 필자뿐만은 아닐 것이다. 현대인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각종 사회 부조리 및 갑질, 취업난 등에 시달리고 있다. 또한 이러한 사회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인식 기저에 무의식적으로 점차 초능력자와 같은 영웅의 등장을 소망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사람들은 어떤 작품을 찾을까? 비록 작품 속이라 하더라도 주인공이 사회에서 각종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다 보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의 두 저자인 김하나와 황선우는 각자 1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1인 가구로 지내오던 중, 문득 새로운 형태의 삶이 필요함을 느낀다. 김하나는 이를 “고단함이 혼자 사는 삶의 가뿐함과 즐거움을 넘어섰다”고, 황선우는 “산 정상에서 하산하듯 자연스럽게 변했다”고 쓴다. 통념은 이를 결혼할 시기라 칭할 테지만 그들이 한 선택은 다르다. 공동명의로 아파트를 매입하고 긴 시간 쌓아올린 각자의 영역을 비우고 채워 넣으며 두 삶을 합친 것이다.약 10년 전 처음 만나 연을 이어온 그들은 종종 놀라울 만큼 꼭 들어맞
지금은 당신이 죽기 5초 전이다. 서서히 시야가 흐릿해지고 오로지 둔탁한 심장 박동 소리만 당신의 귀를 울린다.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눈앞에는 무엇이 보일까.흔히 인간이 죽음을 앞두게 되면 주마등을 본다고 한다. 자신이 살아온 삶의 인상 깊던 기억들이 원통형 등(燈)에 그려진 그림처럼 눈앞을 지나치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마등은 철저히 개인적인 시선으로 전개되는 다큐멘터리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은 를 통해 우리에게 타인의 주마등을 볼 수 있는 경험을 선사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스스로 죽음이자 파괴자가 되
어떤 종목의, 또 어떤 선수를 응원하든 스포츠팬이라면 쉽게 넘어가기 어려운 말 한 마디가 있다. “이제 저 선수는 한물가지 않았어?” 이같이 날카로운 문장들은 의외로 사실에 근거를 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응원하는 선수가 예전에 비해 저조한 성적을 기록할 때 곧바로 들려오는 비판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는 선수들의 활약은 물론 그들의 모든 이야기까지 사랑하는 팬들의 거부감을 야기한다. 때때로 선수에 대한 팬들의 사랑은 객관적인 시각을 잃기도 하며, 불가능할 것을 알지만 응원하는 선수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최고의 성적을 거두기만을 바
‘그땐 그랬지’라는 말은 하나의 문화가 된다. 이 말을 하는 이들은 과거와는 많이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씁쓸함을 느끼기도, 지난날 열정의 순간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한다. 김영하 작가가 1997년 출간한 『전태일과 쇼걸』은 운동권이던 두 남녀의 현재를 담았다. 대학에서 만난 두 남녀는 강성한 운동권이었다. 서로 마음이 맞던 둘은 어느새 연인이 돼 함께 청춘을 보냈다. 연인을 ‘형’이라 부르는 모습은 그 시절의 전형처럼 느껴진다. 졸업과 동시에 자연스레 헤어진 둘은 7년이 지나 서울극장에서 마주친다. 영화
선선한 초여름을 뜨거운 젊음으로 가득 채우는 대학 축제 시즌이 다가왔다. 화려한 축제 시즌의 포문을 여는 건 다름 아닌 우리 학교다. “요즘 축제하지 않니?” “나 학생 때도 싸이가 왔는데.” 흐뭇하게 과거를 추억하는 어른들의 초여름에도 축제의 기억이 배어있나 보다. 풀 내음이 풍겨오면 잔디밭에 슬슬 설치되기 시작하는 무대장치처럼 우리 삶은 변치 않는 것투성이다.변치 않는 것은 오랜 친구처럼 안락함을 준다. 이맘때가 되면 벚꽃이 피겠지, 여름이 오면 하루하루가 맑아 기분이 좋겠지. 당연히 오리라는 믿음과 함께 기대도 설렘도 찾아온다
너무도 당연해 그것이 일상이라 느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너무 당연했던 것이었기에 그 소중함을 자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존재할 수 있다. 당장 내일부터 내 모든 일상을 영위할 수 없는 상태에 직면한다면 우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앞으로의 삶을 위해 어떤 선택을 내릴까.영화 의 주인공 윌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다. 그가 사랑하던 모든 일들은 이제는 더 이상 그의 일상이 될 수 없었다. 그가 사랑하던 자신의 일, 즐겨하던 운동 등 그를 채워온 당연했던 모든 것들은 이제 그의 삶을 채우지 못했다. 그
본 칼럼은 영화 의 내용과 결말을 담았음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영화 은 감상 직후에는 그 여운이, 다른 매체를 통해 전문가의 해석을 들은 뒤에는 해석에 의한 충격이 크기 때문이다. “아빠한테는 뭐든지 말해도 되는 거 알지? 아빠도 다 해본 거니까 뭐든 얘기해도 괜찮아. 그런 일 있으면 말해줘, 알았지?” 두 부녀가 떠 있는 아름다운 바다와도 같이, 부모의 아량은 한없이 넓다. 이 장면을 보며 나의 삶에 절대적인 지지자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를 생각했다. 그런데 이 말을 남긴 뒤 아빠가 떠나버린다면
거리에서 몸을 숙인 채 괴상한 자세로 멈춰 있는 사람들, 허리가 뒤로 꺾일 정도로 누워 잠든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펜타닐’을 검색하면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마약 중독자들의 모습이다. 지난해 미국에서 10만여 명이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했는데, 원인의 67%는 펜타닐 중독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마약이 무엇이길래 저리 처참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퍼지는 것일까?’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면 마약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먀약 중독에 대한 경각심만을 취하길 바란다. 마약 중독은 치료할 수 있지만, 몸은 평생 마약을 기억한다고 한다. 다
‘지금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 원하는 대학에 가고 싶어 세 번째 수능을 준비하던 시절, 매일 같이 쓰던 스터디 플래너 한편에 눌러 쓴 문장이다. 대학 입학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두고 쳇바퀴 돌아가듯 반복되는 일상을 살던 나에게 그 문장이 주는 무게감은 상당했다. 누군가는 4시간을 자도 지치지 않고 저렇게 열심인데, 나는 왜 6시간이나 자고도 이리 힘들어하나 스스로 다그친 순간도 많았다. 간절히 원하는 소중한 목표가 있다면 잠도 줄이는 게 당연했다. 노력하는 이의 모습은 분명 아름답다. 그 속에는 남들이 가히
연말이라는 설렘이 가득했던 지난해 말, 나는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연극 를 감상했다. 연극을 자주 보는 것은 아니지만, 원로배우 이순재 씨가 고전 명작인 를 연출했다는 소식에 예매해 두었던 것이다. 연극을 보고 난 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소유진 배우의 연기가 인상 깊었다’는 것이었다. 소유진 배우가 중년 여성 아르까지나를 능청스러우면서도 깊이 있게 연기하자 모든 관객의 이목이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뿜어낸 에너지가 극장을 가득 메웠다. 동시에 소유진 배우가 연기한 아르까지나 역할의 영향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