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함을 찾아 베를린에 왔다. 교환학생 면접 준비를 위해 썼던 메모장엔 온통 그런 문장이 가득이다. 왜 베를린이냐는 질문에 더 다양한 조각을 더 선명하게 모으고 싶어서라고 답했다. 나는 쉽게 애틋해지는 습관으로 좋아하는 것들을 쉽게 닮는다. 작년 여름에는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조각 중 어느 하나도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래서 베를린에 가고 싶었다. 그 때는 여기서 모을 수 없는 조각이 베를린에 있다고 믿었다.막연한 믿음은 아니었다. 스무 살, 서울을 돌아다니며 어른이 된 기분과 대도시에 접속하는 기분을 즐기던 시절, 처
나는 지금 프랑스의 랭스 지역에 있는 네오마 비즈니스 스쿨에 교환학생으로 와 있다. 아는 불어라고는 봉쥬르와 메씨밖에 없고, 아는 장소라고는 파리밖에 없었는데도 프랑스를 선택했다. 더 정확히는 ‘잘 몰랐기에’ 프랑스를 선택했다. 한국에서의 삶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나를, 그럼에도 물음표만 가득 안고 버둥거리는 나를, ‘너 어떻게 하나 보자’는 심정으로 낯선 곳에 던졌다. 사는 곳을 바꾸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면 비로소 나의 구부러진 물음표가 단단한 느낌표가 될 수 있을지 궁금했다.처음 학교에 갔던 국제 학생 환영의 날, 나는 내
스물셋이 되기까지 나는 수많은 갈림길에서 자주 익숙한 길을 택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하지 않았다. 때로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길이 궁금해지기도 했지만, 나는 지금 선택에 충분히 만족한다며 합리화하고 안주하는 데에 도가 튼 지 오래였다. 스위스로 교환학생을 가야겠다는 결심은 처음으로 다른 길로 발을 돌린 거였다. 지금이 아니면 못 가는 이 길을 포기하면 두고두고 뒤돌아볼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하지만 익숙한 환경에서 방향을 튼 것에는 그만큼 어려움이 따랐다. 비자 심사부터 기숙사 계약까지 쉬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출
이제는 진짜 쉬어야겠다 싶은 순간이 있다. 수많은 선택지 속에서 끊임없이 내가 선택한 길을 후회하고, 의심하고, 고민하게 된다. 결국 놓아주는 것도, 여유를 가지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나는 그렇게 도망치듯이, 정답을 찾아서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떠났다.미국에 도착한 지 어느덧 두 달 반,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던 것들에도 익숙해져 간다. 이제는 마스크를 쓰는 게 더 어색하고, 팁 계산도 어렵지 않게 해낸다. 절대 예정 시간에 맞춰 도착하지 않는 버스에도 익숙해져 5분씩 늦게 계산하는 것도 익숙하다. 어느 날은 캠퍼스 배수 통
지루하고 긴 비행 끝에 집에서 8000킬로 떨어진 섬나라에 첫발을 디뎠을 땐 깜깜한 밤이었다. 공항 밖에서 마스크 없이 얼굴을 훤히 드러낸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을 마주치고 나서야 내가 영국에 와 있음을 실감했다. 그렇게 도착한 첫 도시인 런던에서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보내며 느낀 영국인들의 첫인상은 모두가 하나같이 친절하다는 것이었다. 걸어가다가 길을 조금만 막아도 모두의 입에서 ‘쏘리’가 나왔고, 눈을 마주치면 다들 방긋 웃어 보였다. 사진으로만 보던 유명한 관광지가 눈앞에 펼쳐지고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아름다운
세상에는 내가 예상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교환학생으로 체코 브르노에 파견 온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이제는 트램을 타는 것, 마스크를 벗고 돌아다니는 것, 이곳의 풍경 모두가 익숙하다. 언어만 좀 다를 뿐 이제는 체코 브르노 시가 아닌 대한민국 경기도 브르노 시에 있는 느낌일 정도로 이 곳에서의 생활은 이제 일상으로 자리잡았다. 나는 내가 교환학생으로 타지에 나가서 보내는 생활에 이렇게 잘 적응할 줄 전혀 몰랐다.사실 나의 교환학생 준비 과정은 다른 사람이 보기엔 매우 한심해 보일 정도로 허술했다. 명확한 계기도, 목표도 없
어떻게 지내? 교환 학기가 시작되고 10주가 지나도록 듣는 질문이다. 왜 갔어? 지금도 듣지만 아마 교환 학기가 끝나고 나서 더 많이 들을 질문이다. 두 질문은 타인이 나에게 가장 많이 묻기도 하지만 내가 나 스스로 가장 많이 묻는다. 왜 온 거지? 그리고 어떻게 지낼 거지?처음 교환학생을 준비할 때 나는 이 두 가지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인천 공항 출국할 때가 되어서야 엄마를 붙잡고 서럽게 울었을지도 모른다. 퉁퉁 부은 눈으로 샌프란시스코 행 비행기에 올라 플로리다 잭슨빌에 도착할 때까지 먹지도, 마시지
나는 3월에 있는 1주일 간의 봄방학 동안 서부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LA, 샌프란시스코, 라스베가스까지 10일간 갈 곳을 구글지도에 저장하며 그날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코로나와 함께 무산되었다. LA행 비행기표를 예약할 때만 해도 미국에서 코로나는 전혀 심각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상황은 미국 곳곳에서 확진자가 급증하며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갔다. 봄방학에 여행을 가도 될지, 학생들이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게 괜찮을지 걱정이 되었다. 봄방학 당일, 뉴욕시티로 가는 버스가 11시 30분 출발이었기에 11시
떠나기 전 수십 번 들었던 질문이었다. 코로나 시국에, 백신도 없던 당시에 외국에 가서 생활하겠다니.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무모하다싶기도 한 도전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비행기를 타고 네덜란드로 향했다.나만한 캐리어 두 개를 들고 처음 로테르담에 도착했을 때, 저녁이었지만 여름이라 해가 길어 따뜻한 햇빛을 받을 수 있었다. 로테르담은 네덜란드 안에서 그래도 나름 큰 도시이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생각보다 더 작았고 평화로웠다. 자전거를 안 타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웠고, 학교에 있는 분수에서는 백조나 거위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기숙
외국에서 생활하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된 것은 호주 워킹홀리데이 시절부터였다. 한국에서 공부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했지만, ‘20대에 최대한 경험할 수 있을 만큼 경험하자’는 것이 목표였던 나는 자연스럽게 교환학생을 하고자 마음먹었고 지금 체코에 ‘브루노’란 도시로 왔다.내 꿈을 하나 말하자면 나는 ‘쿨’한 ‘아시안’ 미디어 문화를 하나 구축하는 것이다. 많은 언론에서는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가 빌보드를 평정하고 기생충이 골든 글러브 4관왕에 도달했다고 극찬하지만(그리고 그들이 달성한 성취의 가치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은 아니
현재 나는 9개월째 독일에서 교환학생을 지내고 있다. 독일에서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비자를 받기 전 코로나 때문에 외국인청이 문을 닫았고, 비자를 받는데 6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인종차별이 심해지자 한동안은 밖에 나가는 걸 꺼리기도 했다. 봄학기에는 코로나로 인해 락다운을 했다. 대부분 시간을 집에서 보냈던 것 같다. 학교 측에서 기숙사를 임의로 바꿔 한여름 무거운 짐들을 나르기도 했다. 다양한 사건이 있었음에도 독일에 9개월째 남아있는 이유는 할 일이 줄어든 만큼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밴쿠버에서의 나날은 온갖 사건·사고의 반복이었다. 출국 전 5주 넘게 집을 찾아 헤맨 것을 시작으로 도착하자마자 교통카드를 잘못 사 100달러를 날릴 뻔하고, 사흘 만에 핸드폰을 깨 먹고, 닷새째에 yellow fever와 sugar daddy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한 달 만에 교환 연장을 결심해서 비자 신청을 위해 뛰어다니고(이 연장이 나중에 또 말썽을 피웠다), 친구와 보드를 타러 갔다가 인대가 늘어나서 종합병원을 방문하고, 사고로 쇄골이 박살 난(!!) 친구를 도와 귀국시키고, 겨울비 속에서 두 번을 이사했다. 이 모든 일
20살, 대학에 입학한 나는 친구들과 함께 여름방학에 패기 있게 유럽 여행을 나섰다. 그리고 영국에 홀딱 반해 이 나라에 꼭 다시 오리라 마음먹은 뒤 3년 후 영국 셰필드 대학교 교환학생이 되었다.셰필드 대학교에서의 생활은 생각한 것 그 이상으로 아름다웠고 소중했다. 사실 교환학생은 한국에서 바쁜 일상에 치여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을 것 같을 때 도피로 선택한 것이었다. 20살 때 그 설렘과 행복이 너무 그리웠고 영국에 다시 가면 그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떠난 영국에서 나는 너무 소중한 것들을 많이 얻
작년 가을, 그러니까 남들은 이미 개강하고 1달이 되어가던 즈음이다. 나는 내 덩치보다 큰 짐을 두 개나 끌고 출국길에 나섰다. 한국보다 개강이 1달가량 늦는 그곳, 바로 일본 나고야에서 나의 반년 동안의 교환학생 생활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는 법. 같은 곳에서 떠나온 우리들은 종종 교환학생이라는 특별한 시간의 끝이 얼마나 남았을지 종종 가늠해보곤 했다. 그리고 우리는 나름의 근거와 함께, 꽤 오랜 시간이 남았다고 자부했다. 그것은, 한국보다 개강이 늦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종강이 더 늦는 일본의 학
지난 학기 나는 교환학생 신분으로 독일에서 5개월을 지냈다. 다섯 달 동안 독일에서 쌓은 유럽의 감각은 한국 땅을 밟기가 무섭게 사라지기 시작했고, 귀국 이후로는 이미 흐려진 기억을 붙잡으려 고군분투했다. 전공 책에서 보던 독일어가 시야에 매섭게 몰아치던 첫날부터, 각종 치즈와 맥주를 탐하는 사이 점점 귀가 트이고 억양이 그럴듯해지던 하루하루는 그냥 흘려보내기에 너무나도 아깝고 소중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단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 바로 케이팝 파티다.나는 독일 남부에 위치한 튀빙겐(Tbingen)이라는 작
체코에 도착한지 2주, 어느덧 꽤 적응을 했다. 사실 벌써 한 2달은 산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교환학생으로 온 도시는 '브르노(Brno)', 체코에서 프라하 다음으로 큰 도시다. 처음 막 브르노 중앙역에 도착했을 때 '이게 뭐야!'싶게 투박했지만 돌아다녀 보니 소소하고 안락한 매력이 있다.여기는 한국보다 개강을 3주 정도 늦게 해서 도착하고 1주일 간은 교환학생을 위한 OT가 진행됐다. 여러 나라에서 온 외국인 친구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는데, 먼저 안녕하쒜요라며 한국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친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