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으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어찌 되었든 간에 시간이 흐르면 하나라도 느는 것이 배움이고 경험이라, 그저 흘러가게 두는 것만으로도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세상에 대해 나름의 판단을 할 줄도 균형을 잡을 줄도 아는 그런 어른, 제법 현명하게 제 삶을 꾸려나가는 법을 아는 그런 어른 말이다. 하지만 막상 시간이 지날수록 모르는 것이 더 커지는 느낌이 든다. 대학에 와서 공부를 하다 보니,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몰랐는지 새롭게 깨닫는다. 어차피 공부란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라지만, 배우고 익힐수록 ‘드디어 알겠는
제일 좋아하는 것은 칭찬이요, 극도로 피하는 것은 비판이라. 혹자는 비난과 비판을 구분하라 말하지만, 그런거 모르겠고 그 둘을 싸잡아 싫어한다. 그런 내가 성대 신문에 들어왔다. 처음 문건과 초고를 체커에게 넘기고 우수수 달린 수정 요청 메모들을 보고 괜히 우울했다. ‘그렇게 별로인가?’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메모들을 모두 반영하면 글이 더 매끄러워졌다. 누군가 좋은 글이란, 아무 문장이나 하나를 삭제하면 나머지 문장 전체가 우수수 쏟아진다고 말했었다. 이는 모든 문장이 필수적이며, 앞 뒤 문장이 서로를 야무지게
글 쓰는 과제를 마주할 때면, 항상 남모르게 미소 짓곤 했다. 적당한 참고 자료를 뒤적거리며 정리하고, 내 생각을 담아 글을 마무리하는 일은 계속해오던 일이라 그런지 실패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글 쓰는 데 성공과 실패가 어디 있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난 지금까지 써온 글이 모두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단일한 기준만을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이 얼마나 잘 드러나는가?’ 따라서 글 속의 참고 자료도, 글의 배치도 내 생각을 효과적으로 뒷받침해줄 수 있게 써왔다. 내 글을 읽을 사람은 선생님 아니면 교수님으로 정
삶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들은 인연이다. 나는 우연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연을 가장한 인연, 인연은 우연을 가장해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나와 성대신문, 성대신문의 모든 기자님들이 인연이였나보다.2022년 겨울, 멀게만 느껴졌던 서울에 올라왔다. 많은 게 낯설고 모든 게 신기했다. 대학교라는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공간에서 성균관대학교 학생으로서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처음이여서 많은 부분들이 어려웠지만 모두 다 그렇듯이 나도 대학교에 점차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수업도 듣고, 기숙사에도 살아보고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다
저는 감성적인 글보다 분석적인 글을 쓰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성대신문 면접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감성적인 글보다 분석적인 글을 더 잘 쓴다고 생각했기에 기사를 쓰는 것도 비교적 수월할 줄 알았다. 이런 생각에 갇혀 서점에 가도 베스트셀러를 차지하고 있는 이른바 ‘감성 에세이’는 나와 결이 맞지 않으리라 여기고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다. 나의 오만이었다. 내 오만은 편자주의 존재로 깨졌다. 편자주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없어 나 홀로 편자주 없는 수습 기사를 작성했으며, 기획회의에 낼 문건도 편자주가 없는 상태로 제출했다. 불현 듯 편
수습일기를 써야 하니까 다른 분들 것들을 좀 읽어봤는데,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이 다 있어서 할 말이 없어졌다... 아마 고등학생 때의 나에게 이런 글을 쓰라고 하면 하고 싶은 말로 한 페이지는 금방 썼겠지만, 대학생이 된 지금은 평소에도 별생각이 없는 것 같다. 좌우명을 ‘기대하지 않기’라고 정해서 재원이가 웃었지만, 이 말은 어떤 상황에도 쓸 수 있어서 좋다. 안 좋은 결과가 있어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 나를 즐겁게 만들기도 한다. 이번에도 신문사에 들어와 배울 것이라 예상했던 것들보다는 그 외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지면을 빌려 인사드립니다. 캠퍼스를 색깔로 물들였던 단풍잎도 어느새 발치에 쌓여가는 때입니다. 얼마 전에는 우리 학교의 논술 고사도 마무리되었습니다. 슬슬 기말고사 기간에 돌입하는 학우들을 보고 있자면 온 학교가 올해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성대신문도 이번 지면을 마지막으로 올해 발간을 마칩니다. 한 학기에 8번, 올해 동안 총 16번의 신문을 발간했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학교와 사회를 담기에는 적은 발간 횟수일지 몰라도, 그만큼 다양하고 깊이 있는 기사로 지면을 채우기 위해 기자
시간이 흐를수록 뉴스를 보는 것이 꺼려진다. 날마다 새로운 비보가 전해지며, 새로운 고통들이 전해져온다. 그런 소식들을 들을 때 우리는 비통하다. 비통함이란 슬픔과 함께 무력감도 포함하는 표현이다. 사전에 ‘비통하다’를 검색하면 ‘grief-stricken’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이때 ‘grief’는 비탄, 특히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한 것을 뜻하며, ‘stricken’은 갑작스럽게 닥친, 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즉 비통함은 죽음 등과 같이 갑작스럽게 닥치며, 어떻게 대응할 방법이 없는 슬픔을 가리킨다.몇 주 전 미약한 비통함에 시달
다음 주면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더라. 곧 겨울이다. 사람들은 초겨울이면 낙엽이 죄다 떨어져 마음이 싱숭생숭 하다던데. 날이 추워지면 마음이 오히려 짱짱해진다.11월이면 트는 캐럴처럼, 겨울에는 겨울의 몫이 있다. 반으로 접어 두르는 체크 목도리도, 보들한 니트도, 밖에 나올 때 코를 찡긋거리며 찬 공기 냄새를 맡는 것도, 손을 잡으며 ‘너 손이 왜 이렇게 차니’라고 건네는 말도 모두 겨울의 몫이다. 겨울이 갖고 있는 것들은 꼭 마음에 드는 것만 있어 날이 추워지면 마음이 들떴다. 차가운 공기에 짱짱해져 마음이 잘도 튀어 오른다. 조
나 하나쯤 없어도 괜찮지않습니다.
삼척의 해변가를 맨발로 걸은 적이 있다. 자잘한 모래들이 발가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으나 이내 파도에 휩쓸려갔다. 함께 걷던 이가 말했다. 바다에선 모든 게 부서진다고. 모래도, 파도도. 그는 몇 마디를 더 중얼거렸지만 새하얀 파도에 그 소리마저 부서졌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부서지며 드러나는 바다의 풍경이 제법 멋졌다.수습기간을 마치며 ‘결코 부러지지 않겠다’고 쓴지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내게 그간의 시간은 철저히 부러지고 또 부서지는 시간이었다. 이제는 그 시간의 가장 끝자락에 서 있다.부서진다는 것은 나의 오만함을 인정
19세기 초반 각국 정부가 대학을 사회에서 명민한 구성원들을 양성하는 연구와 교육의 전당으로 탈바꿈시킨 이래, 대학의 연구, 교육 기능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정부와 기업, 그리고 동문들이 대학에 상당한 자금을 투자, 연구자와 교육자들의 대담한 활약을 뒷받침하며, 대학당국은 강의평가와 업적평가를 통해 대학교원의 연구와 교육의 질을 높이는 압력을 행사한다. 대학은 전문직업인, 기업인, 관료와 교원을 양성했을 뿐만 아니라, 학문이 진보함에 따라 때로는 기존 직업의 성격을 현저히 변화시키거나, 아예 새로운 직업을 창출하기도 했다. 의사
‘아프간을 떠났다. 우리 9중대는 작전을 완수했다. 그때는 몰랐다. 우리가 지키려던 조국이 사라지고 훈장도 무용지물이 되리란 걸.’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다룬 2005년작 러시아 영화 의 끝을 맺는 주인공의 독백이다. 실화를 기반으로 제작된 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소련군 병사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냉전의 후반부였던 1979년,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내 친소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군사 개입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24일 대규모의 소련군이 국경을 넘어 아프가니스탄을
1959년 7월 17일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한 언론사가 주최한 '시민 위안의 밤’ 행사가 열렸다. 가수, 배우, 코미디언 등이 공연을 펼치는 일종의 지역 축제였다. 평소 직접 보기 힘든 연예인들이 다수 출연하는 까닭에 3만 명에 달하는 부산 시민들이 행사장에 운집했다.행사가 진행 중이던 밤 8시 15분경 갑자기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단 하나밖에 없는 폭 5m의 출입구(정문)로 쇄도하였다. 무대 뒤로부터 정문까지는 약 150m의 내리막 경사길이었는데 조명을 전혀 설치하지 않아 밤이 되면서
깔끔한 기사. 성대신문에서 3학기를 활동하며 내가 쓰고자 했고, 써왔던 기사를 한마디로 정리한 말이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기사는 잘 썼다는 평을 듣는다. 그러나 나의 기사는 잘 썼다고 평가받는 깔끔한 기사와는 달랐다고 생각한다.지금까지는 기사를 쓰면서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현상을 바라보고 이를 기록하는 일에 초점을 맞췄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자로서 기사를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에는 덜 주목했던 것 같다. 혹여나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은 없는지, 사실을 왜곡하지는 않았는지, 문제를 확대해석하는 것은 아닌지 등을
애도는 종용당하는 순간부터 그 의미를 잃는다.지난달 29일, 핼러윈을 맞아 이태원을 찾은 사람들 중 157명이 압사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늦은 밤 SNS에서 접한 동영상과 뉴스는 믿기 힘들었다. 5일까지 ‘국가 애도 기간’이 선포됐고, 많은 문화예술 공연이 취소되거나 연기됐다.잠시 8년 전을 돌아본다. 세월호 사고는 2014년, 필자가 열네 살 때 발생했다. 중학교에 갓 입학한 나에게도 믿기 힘들고 어려울 정도로 슬픈 일이었다. 좋아하던 가수의 앨범 발매가 줄줄이 연기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떤 친구들은 사고가 일어난 것보다는 기
나에게 맞는 신발을 신었을 때가장 잘 걸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다른 우주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에 대해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이름도 외양도 다르고 심지어는 인간인지조차 명확치 않은 ‘나’들을 넘나들 수 있다면 어떨까. 영화 은 주인공 에블린이 멀티버스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남편 웨이먼드와 딸 조이를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중요한 삶의 기억을 부정당하고, 노력에 상응하지 못한 삶을 사는 등 현실의 에블린은 곤경에 처해있다. 그런 그녀에게 멀티버스 중 하나인 알파버스의 조이, 조부 투파키가 찾아온다. 투파
인류사에서 ‘밥상’만큼이나 많은 대화가 오간 공간이 있을까? 밥과 테이블, 마주 앉은 두 사람으로 이뤄진 밥상 위 배치는 여러 유형의 장(場)으로 거듭난다. 정보 교환의 장이자 중대사를 논하는 장이고, 관계를 결속하는 장이자 논쟁과 합의를 수행하는 장이다.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언론의 원칙은 여럿 있다. 그 모든 원칙을 한 문장으로 묶는다면 “공동체의 밥상 위로 올라가라”라고 표현하고 싶다. 기자가 쓰는 이야기는 사람들이 밥상에서 나누는 대화, 사람들의 밥상 위로 올라갈 대화여야 한다.이런 원칙으로 비춰 볼 때, 최근 지면에 눈에 띄
어쩌면, 우리는 환상적인현실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