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철원 국어국문학과 교수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고전시가 과목을 수강하거나 개론서를 읽을 때면 으레 나오는 말이 있다. 고전시가는 ‘시’이면서 ‘노래’였다는 얘기다. 기억력이 좋다면 ‘시언지 가영언(詩言志 歌永言)’이라는 옛말도 떠오름직하고, 시가를 ‘옛노래’로 적어놓은 몇몇 책의 이름도 생각날 것이다. 이 용어에 따르면 고전시가는 문학이자 음악이라는 복합성을 지녔다.
그러나 이상했던 일이 있다. 고전시가의 현장이랄까, 콘텍스트를 알기 위해 국악과 전통음악 공부를 우선 열심히 해야 한다는 주장이 문학 전공자들 사이에서 꽤 힘을 얻기도 했다. 예전에 가곡창이니 시조창을 배우겠다고 여기저기 공연도 보고 소리를 배우는 이들이 여럿 있었다. 틀린 생각만은 아닌데, 그러면서 ‘시’로서 고전시가를 바라보는 방법론을 만드는 일에 소홀하고, 고전시가 연구가 점점 힘을 잃고 퇴색되어간다는 느낌도 얼핏 들었다.
서점을 가 보자. 깔끔한 장정과 고운 삽화로 부장한 고전소설들이 있다. 어린이들에게 읽히기도 좋다. 한문학 고전은 또 어떤가? 각을 잘 잡은 사진과 술술 읽히는 문체가 보기 좋다. 구비문학이나 역사, 철학 쪽까지 말하면 더 비참해지니 이만 그친다. 고전시가 만큼 인문학의 대중화 열풍에 편승 못하는 무능한 분야도 없고, 인문학의 위기에 둔감한 쪽도 없을 듯하다.
물론 이 문제의 책임을 ‘시+가’ 가운데 ‘가’에 집착해온 연구 동향 하나에만 물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전공자조차 도저히 읽고 따라가기 어려운 음악적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그저 고전의 당대성을 되살려 읽자는 취지 하나로 정당화해온 경향이 고전시가 연구의 사회적, 대중적 소통을 막는 데 큰 역할을 맡지는 않았던가 싶다. 고전시가 전공자와 국악하는 분들끼리는 대화가 잘 될 법도 하지만, 문학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그분들께는 왜 그런 걸 고민해야 하느냐는 핀잔거리로 치부되는 것도 몇 차례 보았다. 누구의 잘잘못이라기보다 관점이 달라서이다. 결국 연구 대상만 같을 뿐, 동종 업계라고는 할 수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텍스트를 오늘날의 맥락에서 시로서 어떻게 읽고 반응할지 고심하는 게 더 낫지 않은가? 시가라는 이름에서도 ‘가’보다는 ‘시’가 먼저 나온다. 몇 달 혹은 몇 년을 익혀야 겨우 귀와 목이 트이는 가창문화의 장벽을 넘으면, 고전시가에 현대 사회와 문화의 무엇을 달라지게 할 힘이 절로 생길까? 그럴 턱이 없다. 고전시가는 노래이지만, 그저 노래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음악적 의미에서 노래라는 점만을 우선해도 옳지 않다.
가창문화, 당대성으로서 무엇보다 중요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시되어 왔다. 그러나 그 때문에 현재성을 잃어가고 있다. 터놓고 말하자면, 이미 잃었다. 시조나 가사가 아직도 지어지고 문인들이 나온다고는 하지만, 그 성과가 의고적(擬古的) 취미를 벗어나 오늘날의 문제와 과제에 얼마나 부응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풀이도 온전치 못한 향가와 속요야 더 말해 무엇하랴? 그나마 향가는 삼국유사에 대한 관심의 언저리에 아직 자리가 남아있지만, 속요는 그마저도 챙기지 못했다. 눈물겹지만 모두 고전시가 전공자들이 자초한 탓이다.
고전은 그저 존재하니까 중요한 건 아니다. 오늘을 사는 누구에게나 답이 없는 어려움은 있다. 고전을 펼쳐보면 그 어려움은 누구나 겪는 것이다. 그로부터 얻는 공감과 위안이 고전의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답까지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 건 잘 팔리는 자기 개발서 몇 권만 들쳐보면 그뿐이다. 고전시가는 ? 교육을 위해서나, 연구를 위해서나 - 내 문제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공감과 위안을 찾는 방향으로 읽어야 한다. 그런 것이 우리가 시를, 노래에서 얻고자 하는 기본적인 효과가 아니었을까? 훌륭한 불교 글에는 불교 용어가 잘 나오지 않는다는 말처럼, 좋은 고전시가 관련 글에는 낯선 용어나 불필요한 개념어가 없는 법이다.

▲ 서철원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