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손민호 기자 (juvenile0223@skkuw.com)

성대신문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겐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기자의 꿈을 키우기 위해, 다양한 경험을 쌓기 위해, 학내 사안에 대한 관심으로, 그리고 따뜻한 글을 쓰기 위해 등. 이처럼 성대신문에 들어오게 된 사연은 모두 다르다. 창간 60주년을 맞아, 성대신문에서 꿨던 기자의 꿈을 현실로 실현시켜 어엿한 언론인이 된 선배들을 만나보려 한다. 동아일보 윤완준 기자와 한국일보 박소영 기자. 이들이 전하는 생생한 취재 현장 이야기와 기자가 말하는 기자의 삶을 들어봤다.

동아일보 윤완준(독문 95) 기자 인터뷰
“진실을 통해 삶을 성찰하는 기사를 쓰고 싶어요”

지난 19일 저녁, 정부서울청사 근처에서 동아일보 정치부 외교안보팀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윤완준(독문 95) 기자를 만날 수 있었다. 한창 남북관계 현황에 대한 기획을 준비하고 있는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 직전까지도 여러 취재원을 만나느라 바쁜 모습이었다. 기자 생활을 한 지도 어느덧 10년 차에 접어드는 그는 △사회부 △문화부 △정치부에 소속돼 국회부터 문화재청, 청와대까지 다양한 출입처를 드나들며 취재했다.

어떻게 동아일보 기자가 됐나.
고등학교 때부터 글 쓰는 직업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어렴풋이 기자가 돼보겠다는 생각에 1995년 성대신문에 입사했다. 보도부 기자 시절 ‘삼성 재단의 우리 학교 인수’와 같은 학내의 굵직한 사안을 다루며 기자의 역량을 키웠다. 6학기의 학보사 생활을 마친 뒤 어학연수와 출판 업무 등 언론인과는 다른 삶을 살기도 했으나, 원래 품었던 기자의 꿈을 놓은 순 없었다. 그렇게 다소 늦은 나이인 30세에 동아일보 기자가 됐다.

현재 외교안보팀 기자로 일하고 있다. 기획 회의부터 신문 배포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궁금하다.
외교안보팀의 경우 매주 전 기자단이 모여 기획 회의를 하는 사건팀과는 달리 따로 기획 회의가 없다. 대신 아침마다 기사에 어떤 내용을 담을지를 정리해 보고하는 발제가 있다. 이후 편집국장과 부장단이 참여해 이뤄지는 간부회의에서는 ‘게이트키핑 과정’을 거쳐 지면에 필수적으로 실릴 기사를 고른다. 우리 부서는 보통 오후 2시 반에 지면 안이 나오고 이에 따라 취재가 시작된다. 오후 5시에 기사 작성이 마무리되면 교열을 거쳐 오후 8시 반에 지방으로 배포될 신문이 인쇄된다. 이후 새롭게 발생한 사건을 추가해 밤 10시에 재인쇄 작업에 들어간다.

지난해 6월 ‘최대석 사퇴 미스터리 추적기’라는 독특한 기사를 작성했다. 취재 과정에서 겪었던 일화를 말해 달라.
지난해 1월 박근혜 대통령 인수위원회의 유력 인사인 최대석 교수가 돌연 사퇴했다. 미스터리하게 끝난 이 사태에 관심이 있었고 사퇴 이유를 밝히고 싶었다. 3개월간의 추적 끝에 기사화가 가능하다고 판단했고, 데스크 단에 기사 작성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데스크 단은 인수위원회 이해당사자들의 의견도 들어볼 것을 지시했다. 당사자뿐 아니라 다양한 처지에 놓인 취재원들을 만나면서 해당 사안과 관련된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다. 진실을 추적하면서 탐사보도를 했다는 성취감이 들었다.

작성한 기사에 대한 피드백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2006년 7월 기사의 피드백이 가장 인상 깊었다. 당시 강원도 수해 현장을 취재하던 중 산악인들이 고립된 주민을 구조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담아 감성적인 르포 형식의 기사를 작성했다. 기사를 읽은 시민들은 “오랜만에 감동적인 기사를 봐서 눈물이 난다”며 긍정적인 평을 달았다. 한편 가장 혹평을 받았던 기사는 2008년 광우병 시위 무렵의 기사다. 당시 출입처였던 문화재청으로부터 “시위과정에서 경복궁의 기와가 깨졌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추가 취재 없이 이를 그대로 기사에 싣자, 시위대가 기와를 깼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앞으로 어떤 기사를 작성하고 싶은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사회를 좀 더 변화시킬 수 있는 기사를 쓰고 싶다. 독자가 기사를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할 기회를 가진다면 좋겠다. 예전에 어느 출판사 사장이 책은 성찰, 재미, 정보를 줄 수 있어야 하지만, 이 중에 두 가지만 갖춰도 좋은 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때 두 가지 요소 중에 반드시 들어가는 요소가 성찰이며, 이것이 없으면 더 이상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사도 마찬가지다. 독자에게 정보나 재미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성찰할 기회도 마련해주는 글이 좋은 기사다.

- 한국일보 박소영(정외 05) 기자 인터뷰  
“고된 순간 하나하나 다 소중한 배움입니다”

2005년 3월부터 2007년 5월까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5학기 간의 학생 기자 생활. 박소영(정외 05) 기자는 성대신문 사회부 시절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의 객관성 검증 △노숙자 자활 사업 △한미 FTA 협상 문제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다뤘다. 그녀는 여러 취재원을 만나 다각도의 취재 경험을 쌓아가며 기자의 꿈을 키웠다. ‘바늘구멍 통과하기’라는 언론사 입사 시험에 당당히 합격한 그녀는 2011년 2월, 한국일보 기자가 됐다.

쓰디쓴 수습기자 시절, 약이 돼 돌아오다
“한국일보는 수습 생활이 혹독하기로 유명한 곳이에요.” 소문은 6개월의 수습기자 생활 내내 단 한 번도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다. 매일 신문을 발간하는 일간지인 한국일보에서는 수습기자도 직접 취재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수습 트레이닝 시절 신문사 운영이나 취재 방법에 관한 교육만 받았던 주간지 성대신문과는 다른 곳이었다.
그녀는 경찰팀에 소속돼 100일간 경찰서에 상주하며 취재 훈련에 투입됐다. 하루 수면시간은 고작 2시간. 아침 7시까지 밤사이 발생한 사건을 보고하기 위해선 적어도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야 했다. 권역별로 배분받은 경찰서를 돌면서 당직 형사들로부터 새로 들어온 사건들을 입수했다. 취합한 정보를 보고하면 곧이어 선배 기자의 취재 지시가 떨어졌다. 해가 저물도록 기자회견 장소와 시위 현장 곳곳을 오가며 사건을 취재했다. 기사 마감이 끝나면 그녀는 또다시 경찰서를 돌며 얻은 새로운 정보를 선배 기자에게 보고했다. 그렇게 야간 보고까지 마무리되면 항상 새벽 2시를 넘기기 일쑤였다.
6개월 내내 혹독한 생활을 하다 보니 그녀는 점차 지쳐갔다. 한밤중에 경찰서에 들어가서 형사들에게 말을 붙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때로 냉대를 받으면서까지 정보를 캐내야 하는 일은 굉장한 스트레스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계속 한국일보 기자로 남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을까. 바로 ‘배움’이다. “빡빡했던 만큼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사람을 대하는 법을 터득해 나갔다. “낯선 이의 냉대를 잘 견뎌내는 방법과 사건을 입수하기 위해 어떻게 효과적으로 질문할지를 배워나갔죠.”

어려웠지만 값진 세월호 실종자 가족 취재
그녀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수습 기간을 마치고 기획취재부를 거쳐 어엿한 사회부 기자가 됐다. 그리고 1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봄날, 진도 앞바다에 여객선 한 척이 기울고 있었다. 사회부 기자들은 비상대책회의를 열었고, 실시간으로 사고 소식을 접하며 기사를 작성했다. 그녀 역시 사고가 난 세월호와 청해진해운 소속 선박에 관한 짧은 보도 기사를 썼다.
“소영아 네가 내려갈래?” 다 같이 모여 저녁밥을 먹는 가운데 사회부장이 제안을 건넸다. 그녀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간단한 세면도구와 옷을 챙겨 경찰팀 부팀장과 함께 목포로 향했다. 그녀는 팽목항 장례식장에서 실종자 가족의 사연을 취재했다. 살아 돌아올 것이란 실낱같은 희망마저 사그라질 무렵. 정부의 발표에만 의존하는 대다수 언론의 보도 행태에 분노한 가족들은 언론 인터뷰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마침 그녀는 시신 이름이 잘못 밝혀져 팽목항으로 되돌아와 밤을 지새우는 김민영 양 아버지의 사연을 접했다. 그러나 취재는 결코 쉽지 않았다. “한 페이지를 할애해 쓰지 않으면 인터뷰에 응해주지 않겠습니다.” 김 양의 어머니는 한 치의 왜곡 없이 쓰겠다는 그녀의 설득에 단호하게 답했다. 노력 끝에 그녀는 데스크 단과의 협의를 거쳐 2면에 들어갈 한 페이지 분량의 기사를 배분받았고, 인터뷰는 성사됐다.
취재가 끝나갈 무렵인 지난 4월 21일, 김 양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지금 젊은 세대들이 들고일어나야 돼.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이렇게 허망하게 자식을 보낼 수 있어요.” 이 멘트는 경희대 학생 용혜인 씨의 주도로 진행된 ‘가만히 있으라’ 운동의 단초가 됐다. “눈물로 끝나선 안돼... 기자도 나중에 허망하게 자식 보내지 않으려면.” 그녀가 작성한 기사의 제목에는 김 양의 가족과 함께 지내며 들었던 메시지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었다. 그렇게 세월호 참사 당시 취재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그녀의 가슴에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