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과캠 만남 - 유의어 사전 편찬자 김기형(기계 80) 동문

기자명 장지원 기자 (wontheph7@skkuw.com)

광복 이래 국어 연구와 사전 편찬에 관심이 많았던 우리나라지만 제대로 된 유의어 사전만은 없었다. 그러던 지난 2010년, 200만 개 이상의 단어를 분류한 전 7권의 <넓은 풀이 우리말 유의어 대사전>이 10년의 작업 끝에 완성됐다. 그런데 이 방대한 작업을 완성한 것은 국가기관도, 대규모 연구소도 아닌 한 공학도였다. ㈜낱말의 대표 김기형(기계 80) 동문이다.

▲ ⓒ강신강 기자 skproject@skkuw.com

국어학자 형과 석유 공학자 동생
김기형 동문은 기계공학을 공부하던 대학 시절은 물론, 졸업 후에도 줄곧 석유 화학 플랜트 분야에 종사해 온 공학도다. 국어사전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던 그가 돌연 유의어 사전 제작에 뛰어든 배경에는 80년대부터 유의어·반의어 사전 출판을 위해 연구해 온 그의 형 故 김광해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가 있었다. 유의어 사전은 그 언어의 지식을 망라하고 언어 사용자의 어휘력을 높이기 위한 활용사전이다. 표제어의 뜻을 밝히는 정규사전과는 달리, 관련된 유의어들을 분류해 제시하고 그로부터 또다시 2차, 3차 유의어를 찾아가다 보면 그 언어의 전체 의미망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국어학자의 일, 김 동문은 형의 일을 종종 도와주면서도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 교수는 동생에게 일본어 유의어 사전 한 권을 보여주었다. 어휘를 10단계에 걸쳐 의미 군끼리 분류한 계통도였다. 한국에 제대로 된 유의어 사전조차 없던 당시 외국에서는 이미 어휘 전체의 계통 분류가 이뤄지고 있었는데, 김 동문은 이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언어학 전공자에게는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나는 문외한이라 오히려 충격적이었던 것 같아요.” 낱말로 쌓아올린 지식의 과학적 체계는 국어를 멀게만 보았던 그의 관심을 돌려놓았다. 그는 과학의 의미를 나눌 과(科)자에서 찾는다. 과학이란 곧 나뉜 지식과 나누는 과정일 뿐, 대상이 언어가 된다고 해서 공학이 접근할 수 없는 분야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공장 짓듯이 만드는 사전
김 교수의 소규모 유의어 사전이 출판사 문제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을 때, 김 동문은 지금까지의 노력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전 제작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자신이 국어를 ‘잘 모르는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말한다. 김 동문은 유의어 사전을 통해 어휘 체계를 정리하는 것이 공장을 짓거나 차를 만드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자동차를 만드는데 필요한 부품들이 창고에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지 않다면 그 수많은 부품을 제대로 짜 맞출 수 없듯이, 좋은 문장을 만들기 위해서도 어휘들이 분류돼 있어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국어를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지만, 현재 국어학회의 사외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는 사전 편찬자로서 그의 독특한 위치가 반영된 결과다. “글 쓰는 사람들은 언어를 기계적으로 다루는 것을 꺼려요. 반대로 컴퓨터 프로그램을 다루는 사람들은 언어는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죠. 사전 편찬은 둘 다를 해야만 하는 일인데 말입니다.” 국어학자들이 다듬고 정리한 낱말들을 체계화시켜 컴퓨터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서먹한 두 분야 사이에서 교량을 놓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200만개 단어를 당신의 손 안으로
유의어 사전은 이용자가 필요한 단어를 쉽게 찾고 이해해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그런 편리함은 모두 사람이 모든 과정을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수정하면서 데이터베이스를 완성한 끝에야 가능한 것이다. 유의어 사전 작업에 막 착수했을 때는 서울대 국어교육 연구소와 협력해 틀을 잡았지만, 그 후 실제 단어 분류 작업은 ㈜낱말 직원들의 힘으로 이뤄졌다. 수백만 개의 단어와 그 정의를 하나하나 분류해 가는 일은 여간 손이 가는 것이 아니다.
80년대에 김 교수는 제자들과 함께 손바닥만 한 카드를 가지고 낱말 하나하나를 적어 죽 늘어놓으며 분류한 다음 타이핑하곤 했다. 컴퓨터로 대량의 정보를 한꺼번에 처리하는 현재의 사전 작업은 시간을 많이 절약했지만, 하는 일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직원들은 모니터를 빼곡히 채운 단어와 의미 군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분류하다가 어딘가 막히면 모두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다. 개별 단어의 정확한 정의가 중요한 표준국어대사전과 달리, 유의어 사전과 같은 활용사전은 이용자들이 최대한 다양한 활용법을 끌어내도록 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넓은 풀이 우리말 유의어 사전> 시리즈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개인이 접근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사전은 활용되는 데 의의가 있는 것. 김 동문은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온라인 매체로 범위를 넓혔다. 현재 ㈜낱말의 홈페이지에서는 ‘낱말창고’를 통한 검색 서비스를 제공한다. 작년에는 더 나아가 애플리케이션도 출시했다. 반의어 사전 및 방언사전은 물론, 표준국어대사전까지 결합해 포괄적인 검색이 가능하다. 특히 홈페이지에서는 낱말 망의 의미 체계를 줄글이나 표 대신 이미지 맵으로도 볼 수 있어 이해를 돕는다.

▲ 낱말 망에서 ‘가’를 검색한 결과. 보라색 관계는 유의어, 붉은색은 반의어, 노란색은 방언을 의미한다. / ©㈜낱말 홈페이지

 
마지막 활용사전 편찬자가 되더라도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다양한 사전들이 편찬됐지만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네이버를 위시한 포탈 사이트 업체들이 사전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사전은 공짜”라는 인식이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활용사전 편찬사업은 그간 우리말에 담긴 지식을 축적하고 전달해 왔지만, 이제 사용자들은 전체 사전내용의 10%도 담지 못하는 포털 사이트 사전 서비스에서 단어의 정의만 간단히 확인할 뿐이다. 현재는 국립 국어원 주도의 대규모 연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라지고 위키피디아 등의 사용자 참여 백과사전만 남은 실정이다. ㈜낱말 역시 경제적으로 자생할 수 있는 회사는 아니다. 김 동문의 본업인 플랜트 컨설팅 사업에서 30억 원이 넘는 자금을 조달했기에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김 동문은 “사전을 통한 지식 축적은 끝나가고 있다”고 담담히 인정하면서도 사전 편찬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오히려 다양한 활용처와 새로운 시리즈를 속속들이 준비하고 있다. 또 다른 장기 프로젝트인 다의어 사전 제작을 위해 5년째 연구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어휘에 난이도를 매긴 어휘력·독서력 평가는 국내의 독서교육 사업 대부분에 제공되고 있다. 기술협력을 통해 외국어 독서력 평가까지 범위를 넓히고 있고, 언어 간 유의어 사전을 연결하려는 계획도 있다. ㈜낱말과 유의어 사전 시리즈가 마지막 사전 제작사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알기에 더더욱 책임감이 막중하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들보다도, 앞으로 할 일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이 자신의 ‘재산’이라고 말한다. 종이사전의 끝을 바라보는 시대, “나 이후에 이걸 이어받아서 계속할 사람이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완벽하게 만들고 싶다”는 그의 의지가 돋보인다.
▲ 김 동문이 편찬한 <넓은 풀이 우리말 유의어 사전> 시리즈가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강신강 기자 skproject@skku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