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과캠 만남 - 소설가 이유(수학 88) 동문

기자명 김수현 기자 (skrtn1122@skkuw.com)

 

수학과 문학, 언뜻 보면 자석의 양극처럼 보이는 두 가지를 끌어와 삶에 녹여낸 이가 있다. 바로 소설가 이유(수학 88) 동문이다. 그녀가 담담하게, 그러나 삶의 힘듦과 아픔이 드러나도록 치열하게 써내려간 작품은 많은 이들을 위로하고 있다. 여린 미소 뒤에 누구보다 단단한 심지를 지닌 그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사진 │이호정 기자 sonamuda@

책을 사랑한 소녀, 수학을 만나다
이 동문은 책을 사랑하는 소녀였다. 강남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그녀는 친구들이 학업에 열중할 때 학교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었다. “학군이 좋다는 이유로 위장 전입까지 하며 입학한 친구들이 있었어요. 모두 선행학습은 기본으로 하고 왔죠. 조그마한 구멍가게 딸이었던 전 그때까지 제대로 된 공부란 걸 해본 적이 없었어요.” 입시경쟁이 점점 치열해지던 시절, 신축 건물로 가득한 학교에서 오래된 느낌을 간직한 도서관 건물만이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곳에 있는 책들을 끊임없이 읽었죠. 그냥 도서관 안을 휘적휘적 걸어 다니기도 했고요.” 그녀의 머릿속엔 여전히 도서관 풍경이 남아있다. 언제든지 떠올릴 수 있는 도서관의 냄새나 느낌들, 바람이 불면 일렁이는 담쟁이넝쿨. 그리고 그녀가 읽어 내려간 수백 권의 책들.

책 속에 파묻혀 지내던 소녀는 돌연 수학의 세계를 택했다. “딱히 무언가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근데 고1 때 수학을 담당하는 담임선생님을 만나게 된 거예요. 선생님이 정말 멋진 분이셨어요. 딱히 재밌는 것도 없는데 땀을 뻘뻘 흘리며 수업하는 모습에 저런 사람도 있구나 싶었죠.” 담임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수학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성적은 떨어졌다. 심지어는 제대로 푼 점수가 찍어서 나오던 점수보다 낮았다. 오기가 생긴 이 동문은 ‘누가 이기는지 끝까지 해보자’는 심정으로 공부를 계속했다. 친구들이 과외를 받을 때, 그녀는 문제 하나를 잡고 열흘을 끙끙 매달렸다.

끝까지 파고드는 집념으로 그녀는 결국 열릴 것 같지 않던 수학의 문을 열었다. "수학이 재밌는 게 하나를 계속 파면 눈이 열려서 다른 부분도 보이게 돼요. 예를 들면 방정식을 미친 듯이 파다 보면 통계, 미적분 등 다른 부분도 얼추 보이는 거죠. 그 순간이 너무나 짜릿해요.” 수학의 묘미를 깨달은 그녀는 대학에서도 수학을 전공한다. “저를 수학으로 이끈 고1 담임선생님께서 성균관대 수학과를 나오셨어요. 그래서 많은 고민 없이 성균관대 수학과를 택한 것 같아요. 동경하는 사람과 공통점이 생긴다는 건 굉장히 설레고 기분 좋은 일이니까요.” 책을 사랑한 소녀는 그렇게 우리 학교 수학과 학생이 되었다.

혼란스러운 대학 시절
막상 대학에 들어오자 이 동문은 허망한 느낌이 들었다. 대입이라는 목표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등대를 잃어버린 배처럼 그녀는 대학이라는 바다를 표류했다. 방황하던 그녀는 성대신문사의 문을 두드렸다. 어린 시절 글을 사랑했던 그녀에겐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건 쓰디쓴 탈락의 고배였다. “당시 수학과 남자 동기랑 같이 시험을 봤어요. 같은 과라서 둘 중 한 명만 뽑겠다는 거예요.” 성대신문 수습기자 모집에 떨어진 그녀는 더는 글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전공 공부에 더욱 매진하라는 어떤 ‘계시’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이 동문이 입학한 80년대 후반은 대학 사회 전반이 학생 운동으로 뜨거웠던 시기였다. 시내에 나가면 항상 최루탄 냄새가 바람에 배어 코끝을 스쳤다. 모두가 시내로 나갔다.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으면 누군가 뛰어들어와 소리쳤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그녀는 처음엔 혼란스러운 상황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 학교 불문과 88학번 김귀정 열사가 학생 운동 중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그녀도 거리로 나섰다. 그녀를 비롯해 그 시절 청년들은 그렇게 힘든 시간을 살았다. 후에 이런 기억들은 그녀의 창작세계에 깊게 스며들었고 그녀의 작품 속에 배어 나왔다.

이유 있는 선택, 소설
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수학교재 출판사에 취직했다. 대학 시절 만난 남편과 가정을 이룬 그녀의 삶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무언가 부족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글을 쓰지는 않았지만 항상 책을 읽었어요. 일을 시작하고도 지속적으로 책을 읽었고요. 그러다 다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을 만났어요.” 무라카미 하루키의『상실의 시대』. 그녀는 그 책을 항상 품에 끼고 다니며 탐독했다.

여느 때처럼 일을 끝낸 후, 카페에 들러 책을 읽고 집에 돌아가던 길이었다. “집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 왠지 허전한 느낌이 들었어요. 뭔가 했더니 카페에 책을 두고 왔던 거예요. 바로 카페로 돌아갔죠. 하지만 책은 자리에 없었어요. 상실의 시대를 상실한 바로 그 순간, ‘아, 글을 써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녀는 다시 펜을 들었다. 회사에서 짬을 내어 글을 썼다. 그녀의 습작은 그렇게 쌓여갔다. 스스로도 이제 등단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신춘문예 최종 심사에서 그녀의 꿈은 번번이 가로막혔다. “정말 포기하고 싶단 생각이 한가득이었어요. 하지만 너무 아쉬워서 쉽게 놓을 수가 없었죠. 정말 곧 닿을 것처럼 눈앞에 있는데…”

그녀는 결국 꿈을 이뤘다. 2010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낯선 아내』가 당선되어 등단한 것이다. 언어의 세계를 떠났던 소녀는 어른이 되어 다시 그 세계에 발을 들였다. 어른의 품속엔 세상에 외치고 싶은 이야기가 한가득이었다.

문학동네소설상 제21회 수상작『소각의 여왕』, 이 동문의 첫 장편집이다
Ⓒ문학동네

『소각의 여왕』이유를 담다
그녀는 가슴에 품은 이야기를『소각의 여왕』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내보였다. 그리고 3년 동안 수상작을 내지 못 했던 ‘문학동네소설상’을 받았다.『소각의 여왕』은 고물상을 운영하는 아버지 지창과 딸 해미, 두 부녀의 이야기다. 경기가 나빠진 탓에 고물상 영업은 위기에 처한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 지창은 폐금속에서 돈이 되는 희귀 금속을 추출하는 기계를 만드는 일에 몰두해 고물상 일을 등한시한다. 결국 돈을 벌기 위해 딸 해미는 죽은 이들의 방을 정리하는 유품정리사 일에 뛰어든다. 작품 속엔 해미뿐만 아니라 해미가 일하며 만나는 수많은 청년의 고된 삶이 서로 엉킨 채 녹아들어있다. 그 안에는 이 동문의 경험과 세상을 향한 목소리가 생생하게 담겨있다. “『소각의 여왕』엔 ‘우리가 겪었던 힘든 시기를 왜 지금 젊은이들이 다시 겪어야 하지’라는 의문이 담겨 있어요. 대학 시절 느꼈던 것들이 직장 생활을 하며 많이 옅어진 줄 알았어요. 하지만 제 안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았던 거죠.”

작가 특유의 속도감 있는 전개와 응축된 서사는 읽는 이를 단번에 사로잡는다. 이는 그녀가 수학을 전공하며 얻은 것이다. “제가 수학을 오랫동안 접하면서 얻은 사고체계가 이 글에 녹아든 거죠. 더는 부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빼는 연습에 익숙했으니까요.”

그녀는 또한 책 속의 현실을 최대한 담담하게 그리려 했다. “장편은 작가나 화자의 언어를 쭉 따라가야 하잖아요. 독자는 그 길이만큼 글에 항복해야 하는데, 거기서 느끼는 억압감이 있거든요. 저는 그 억압감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글을 쓸 때도 감정을 주입하거나 강요하는 식의 표현은 쓰지 않으려고 해요.”

작품 속 해미가 마주한 현실은 끝까지 잔인하다. 하지만 해미는 담담하게 현실을 마주한다. “끝까지, 끝까지 모든 걸 앗아가는 잔인함. 그게 현실이죠. 해미는 저 자신이 투영된 모습이면서 곧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예요. 내가 작가로서 인생 후배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했어요. 굳건히 현실을 마주하는 해미라는 인물을 통해 그들을 위로해 주고 싶었어요.”

차기작으로 단편집을 준비하고 있는 그녀는 글이 가진 힘을 믿는다. “글자에서 영혼이 보이고 사람이 보이는 것. 그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잖아요.” 작가의 삶을 시작한 그녀는 소설이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 안에 아우성치는 목소리는 그런 두려움을 이겨내고 계속해서 그녀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이 동문(왼쪽에서 두 번째)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문학과 사진 융합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유 동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