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캠 만남 - 쇼 호스트 김효석(회계 86) 동문

기자명 장소현 기자 (ddloves@skkuw.com)

“딱 오늘만! 매진 임박! 다음 기회에는 정말 이 가격으로 만나보실 수 없을 겁니다.” 누구나 홈쇼핑에서 한 번쯤 이 멘트를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멘트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매출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쇼 호스트’다. 분당 4200만 원의 매출을 달성해 쇼 호스트계의 달인으로 불리는 김효석(회계 86) 동문을 만나봤다.

 

 

가난도 앗아가지 못한 열정
어릴 적부터 아나운서가 꿈이었던 김 동문은 가난한 집안 사정 탓에 현실적인 이유로 회계학과에 진학했다.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하려고 했는데 성적이 부족한 거예요. 그런데 누가 회계학과에 진학하면 취업이 잘 된다 그러더라고요. 꼭 아나운서가 된다는 보장도 없고 집안이 어려워서 들어가게 된 거죠.” 그렇지만 그가 아나운서에 대한 꿈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학업과 성대방송국 활동을 병행하면서 그는 꿈을 키워나갔다.

그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등록금을 스스로 벌어야만 했다. 과외가 금지됐던 시절, 단 기간에 큰돈을 벌기 위해 김 동문은 세일즈 일을 시작했다.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 당시 등록금이 6, 70만 원인데 제가 200만 원 정도를 벌었으니까 꽤 많이 벌었죠. 그때부터 영업의 재미를 알았어요.” 김 동문은 우연한 계기로 세일즈 일을 시작하게 됐다. “종로를 지나가는데 그 당시에 ‘월수 200’ 이렇게 쓰여 있는 거예요. 그렇게 속아서 간 거죠. 그게 사실 거기서 제일 잘해야 200만 원을 벌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목표를 200만 원으로 잡으니까 받아냈죠. 선배들 다 이기고 제가 2등 했어요.”

그의 첫 세일즈 품목은 소화기였다. “사실 소화기는 다 겨울에 팔아요. 그런데 저는 한여름에 소화기를 팔아야 했죠. 같이 했던 형들은 너무 더운 날에는 안 팔았었는데 저는 너무 간절해서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죠.” 처음 세일즈를 시작하는 것이었기에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처음엔 찾아가는 곳마다 문전박대를 당해 물건을 꺼내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판사판이었다. 대학 시절 체격이 좋았던 김 동문은 양복을 입고 있으면 사람들이 30대 중반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그는 그 점을 세일즈에 이용했다. “너무 당당하니까 잡상인이라고 생각을 못 해요. 그렇게 사장실까지 들어가서는 다리에 기름을 부어서 허벅지가 기름으로 흥건해지면 불을 붙여요. 그리고 가방에서 소화기를 꺼내서 불을 끄고……. 한 마디로 쇼를 한 거죠.” 차력사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은 그의 ‘불 쇼’는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소비자에게 신뢰를 주고자 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좋은 결실엔 꾸준한 노력이 바탕이 된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전역했을 때는 11월 말이었다. 방송국 공채는 이미 모두 끝난 상황이었다. 다음 공채까지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돈을 벌기 위해 보험회사에 입사했다. 그의 첫 회사 생활은 인사부에서 직원들의 급여를 관리하며 시작됐다. 회계학과 시절 꾸준히 배워 온 그래프와 계산이 빛을 발했다. “그 때 회사에서 대부분의 작업을 엑셀로 했었는데 당시 엑셀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데 나는 학교에서 엑셀을 배웠으니까 금방 적응할 수 있었죠.”

그렇게 일을 하며 스스로 생활비를 번 김 동문은 평소에도 꾸준히 발성 연습을 하며 아나운서의 꿈을 키웠고 마침내 평화방송에 채용됐다. 그는 평화방송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으며 방송국 최초로 본인의 이름을 내건 방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IMF가 터지자 그는 경제적인 압박에 새로운 꿈으로 눈을 돌리게 됐다. 당시로서는 물건 파는 직업이라며 인식이 좋지 않았던 쇼 호스트에 새롭게 도전한 것이다. “아나운서로 잘 나가고 있었는데 쇼 호스트를 한다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저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찬성했어요.” 자신의 능력을 믿어주고 지지하는 지인들에게서 용기를 얻은 김 동문은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다.

이전 두 직업은 그의 쇼 호스트 도전에 큰 밑거름이 됐다. “보험회사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타인을 대하는 법에 대해 제대로 배울 수 있었어요. 아나운서로서 활동했기에 생방송에서도 노련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고요.” 이 두 노하우가 합쳐지니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났다. 당시로서는 프로그램 당 3, 4억 원 매출이 일반적이었으나 그는 입사 3개월 만에 프로그램 당 10억 원 매출이라는 큰 성과를 이뤄낼 수 있었다.

홈쇼핑에서 전주 특산물 찰보리빵을 판매하는 김효석 동문(왼쪽).
Ⓒ<한국경제> 홈페이지 캡쳐

끝없는 배움과 도전
그의 모든 직업은 말로 통한다. 때문에 그가 말에 가장 많은 신경을 쓰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특히 말을 하는 것은 본인이지만 듣는 대상은 상대라는 점을 강조한다. “말을 잘 한다는 건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는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를 잘 알 수 있는 질문을 해야 해요. 질문을 통해 내가 원하는 콘텐츠를 뽑아낼 수 있거든요.” 직업에 대해 본인만의 뚜렷한 가치관을 가진 그였지만 배움에는 끝이 없었다. “실무로는 아나운서, 쇼 호스트를 거치면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는데 이론적인 베이스가 약하더라고요.” 신문방송학 석사 과정을 마친 그는 지도 교수님의 조언에 따라 박사 학위에 도전했다. 탄탄하게 이론을 쌓은 그는 현재 쇼 호스트 학원과 대학에서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쇼호스트 학원에서 강의 중인 김효석 동문.

말은 나누고 꿈은 더하고
본인의 꿈을 위해 끊임없이 도전한 그는 이제 자신이 가진 것을 사회에 나눠주고 있다. 아나운서 시절, 시각장애인을 위한 낭독 자원봉사를 했다. 그는 많은 도서 중에서도 자신의 능력이 가장 잘 발휘될 수 있는 『장길산』을 맡았다. 기존에는 녹음 도서를 남자 성우가 맡은 경우 여성 인물의 목소리도 직접 흉내 내서 녹음했다. 때문에 듣는 입장에서는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이런 사정을 안 김 동문은 상대적으로 여성의 비중이 적은 책을 택했고 여성 인물이 등장하는 부분에는 직접 여자 아나운서를 섭외하기도 했다. 그의 장길산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녹음도서 중 대여순위 3위의 쾌거를 이뤄내기도 했다. 지금도 그는 노숙자와 독거노인을 위한 사랑의 쌀 나눔 봉사를 하고 있다. 김 동문은 단지 봉사활동을 이력서에 한 줄 올리기 위해서 하기보다 함께 봉사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집중하라고 조언했다. “좋은 활동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길 바라요.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새로운 꿈이 생길 수도 있어요. 단순히 다른 사람을 도와주러 갔다가 오히려 도움을 받을 수도 있는 거죠.”

끊임없는 노력으로 현재 위치에 이른 그에게도 여전히 꿈이 있다. “지금은 교육 사업을 하고 있으니 제대로 된 제자를 양성하고 싶어요. 학벌과 인맥에서 벗어나 오로지 실력과 노력으로 인정받는, 그런 제자 1000명을 만드는 것이 제 목표에요.”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에게 새로운 도전은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마이크임펙트' 행사에서 강연 중인 김효석 동문.
Ⓒ‘마이크임팩트’ 홈페이지 캡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