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황병준 편집장 (hbj0929@skkuw.com)

“나라의 운명이 그곳에 갇혔다.” 영화 남한산성(오는 10월 3일 개봉) 예고편에 등장하는 문구다. 영화의 배경은 1636년 병자호란이다. 그해 겨울, 압록강이 얼어붙어 길이 되자 청군(靑軍)이 쳐들어왔다. 그들은 말을 달려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한양에 도달했다. 임금의 어가는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신하들은 어명에 따라 종묘의 신주와 사직의 위폐를 떠받들고 산성으로 몰려갔다. 일사천리로 나라의 운명이 그곳에 갇혔다.

국운(國運)의 고립은 운명이었던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는 동북아의 국제전쟁 시기였다. 일본을 통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들끓는 내부의 힘을 나라 밖으로 돌려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에 지원군을 파견했던 명(明)은 전쟁이 끝나자 국력이 쇠했고, 대륙의 중심이 기울자 청(淸)이 득세했다. 헤게모니는 명에서 청으로 옮겨갔고 그 모든 격랑의 과정 속에서 조선은 독립변수가 되지 못했다.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이 발발했던 동북아 국제전쟁 시기는 조선에 곧 피동의 시간이었다.

1636년 병자호란,
약소국 조선의 처참한 운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명과 세상에 굴복 말아야

모든 치욕이 끝내 약소국의 운명이라면 병자년의 임금은 어찌해야 했나. 그해 겨울 남한산성 외행전은 이 ‘어찌해야 하는지’를 두고 들끓었다. 김상헌을 필두로 한 척화파는 명분을 위해 싸우자 했고 최명길을 앞세운 주화파는 삶을 위해 화친하자 했다. 언설과 언설 사이에서 임금은 속히 결단하지 못했다. 입성 47일째인 이듬해 1월 30일, 임금은 불려 나가듯 걸어 나왔고 청 황제 앞에서 하릴없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도무지 어찌해야 했던 것인지, 자신의 이마가 땅에 닿을 때에도 임금은 불가해한 운명 앞에서 답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운명에 대해, 15세기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마키아벨리는 다만 말했다. “운명의 여신을 ‘때려눕혀야’한다”고. 저서 『군주론』에서 그는 지도자라면 운명을 극복해야 한다며 포르투나(fortuna)와 비르투(virtue)라는 개념을 들어 이를 역설했다. 이에 따르면 포르투나는 곧 운명으로, 불확실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외적조건이다. 하지만 지도자는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이에 맹렬히 맞서야 한다. 이때의 방책이 비르투다. 역량 또는 탁월함 등을 의미한다. ‘덕’으로 주로 번역되지만 동양에서의 지고지순한 덕(德)과는 결이 다르다. 운명의 변덕스러움을 마키아벨리는 알고 있었지만, 이에 비관하지 않고 오히려 때려눕히고자 했다.

마키아벨리와 같은 현실주의 정치철학자 막스 베버의 견해도 같은 맥락에 닿아 있다. 그는 저서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해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어떠한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dennoch!)’라 말할 수 있는 확신을 가진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그 역시 세상의 참혹함을 알았지만 이에 투항하지 않았다. 진정한 지도자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 말하며 “열정과 균형적 판단 둘 다를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구멍 뚫는 작업”을 감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약소국의 처참한 운명은 도적처럼 찾아온다. 이것은 관념 속의 논리가 아니고 역사에 드러난 경험칙이다. 1592년 임진왜란, 1627년 정묘호란, 1910년 경술국치 그리고 다시 병자년 남한산성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 말하려면 약소국의 지도자는 ‘비르투’를 길러 ‘운명을 때려 눕’힐 준비가 돼 있어야 했던 것이다. 이 땅의 지도자들은 다만 어떠했나. 그리고 지금은 어떠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여덟 글자가 만만찮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