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캠 만남 - 이종석(행정 78) 동문

기자명 손경원 (skw8663@skkuw.com)
이종석(행정 78) 동문
사진 | 손경원 기자 skw8663@skkuw.com

 

연구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빼곡한 책들은 그의 완숙한 학문적 성취를 보이는 듯했다.
변화한 북한이 궁금하다는 그는 ‘10·4 선언 11주년 기념 민족통일대회’로 11년 만의 평양 방문 준비에 한창이었다.
NSC 차장, 통일부 장관을 거치며 한반도 평화를 위해 일해온 이종석(행정 78) 동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불의에 분노했으나 앞장서지 못하던 대학생
자주국방 강조하는 공직자 되기까지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저항의 눈을 갖다

남양주 시골에서 자란 이 동문은 어려서부터 세상일에 관심이 많았다. “초등학생 때부터 신문을 탐독하며 정치에 관심을 가졌어요. 물론 당시 가지고 있던 사고는 미숙했죠. 학교에서 가르치고 사회에서 떠드는 대로 받아들였어요. 북한 체제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넘쳐나던 시대라서 저도 ‘때려잡자 공산당’을 외쳤어요.” 어렸을 때 그의 꿈은 행정가였다. “당시 대부분의 시골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고시를 통과해 공직에 나서고자 했어요. 그래서 대학 전공도 행정학과로 선택했지요.”

그렇지만 어지러운 사회 시류는 그의 삶 안에 저항의 불씨를 일으켰다. 군부세력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이 활발했던 1980년 ‘서울의 봄’에 그는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2학년을 마친 상태라 휴학을 하고 군대에 갈 계획이었어요. 복학 후 고시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서였죠. 고향에 돌아왔는데 ‘서울의 봄’이 터졌어요. 그때 아는 선배가 총학생회를 했는데 저보고 학생운동을 도와달라고 부탁했죠. 저는 그날 바로 상경해서 총학생회의 학생운동을 도왔어요. 주로 성명서 쓰는 일을 했죠.” 그해 4월에 있었던 우리 학교 신입생들의 병영집체훈련 폐지 투쟁은 대학가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성균관대는 테러리스트라고 불릴 정도로 전두환 정권에 강렬하게 투쟁했어요. 경찰들은 캠퍼스에 최루탄을 터트리며 학생들을 쫓았지만, 학생들은 혜화동로터리로 진출하고 거기에서도 밀려나면 4·19 탑까지 이동하며 저항했죠.”

그러나 그는 학생운동에 앞장서는 사람은 아니었다.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은 있었으나 용기가 부족했어요. 그래서 ‘서울의 봄’ 당시에도 앞이 아닌 중간에 서서 시위했죠. 복학하고 나서는 학생운동을 하는 후배들에게 술이나 사주고 당시 불온서적이었던 김지하의 시 오적으로 토론하는데 자족했어요.” 대신에 그는 도서관에서 한국 현대사와 사회과학 서적들을 탐독해나갔다. “행정학과였지만 행정학 책은 한 권도 읽지 않을 정도였죠. 그러던 중 83년 가을에 성대사회과학연구소에서 주최한 통일 논문 현상공모에 나가게 됐어요. 한반도평화통일에 대한 일 고찰-주한미군 철수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는데 70년대 중반에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운 것에서 착안했어요.” 그는 박사과정과 석사과정 학생을 제치고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 “친구들이 제가 대단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치켜세웠어요. 생각해보면 제가 대학원을 정치학과로 진학하고 이후 북한과 통일 문제를 연구한 것도 이때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실사구시 자세 속에서 역량을 키우다
졸업하고 그는 금성사에 입사했지만 2년 반 만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혼란스러운 시대에 제 진로와 미래도 불투명했어요. 사회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 노동운동에 뛰어들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용기가 부족해 그러지도 못했죠. 대안으로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어요.” 그는 우리 학교 정치외교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당시 우리 학교 정치학 대학원은 진보적인 학풍이 있었어요. 당시 신조류 이론인 권위주의론·종속이론 등을 연구하는 교수님들이 있었죠. 진보적인 교수님 밑에서 공부하고 싶은 저는 두말할 여지 없이 우리 학교 대학원을 선택했어요.”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그는 동아시아 정치학 연구에 뜻을 뒀다. 그러나 동아시아를 탐구하려면 우선 한국과 분단문제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었다. “북한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서는 한국 정치를 온전하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북한 공부를 시작했고 석·박사 논문을 모두 북한과 관련해서 썼어요. 결과적으로 동아시아까지 연구를 확장하지 못하고 북한 연구자가 됐어요.” 그는 대학원 시절 ‘가짜 김일성론’을 반박하는 논문을 썼다. 당시 국내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진 ‘가짜 김일성론’이란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한 김일성은 해방 전에 사망했으며 북한의 김일성은 그의 이름을 빌린 가짜 인물이라는 이론이다. “북한의 초기 정권 수립 과정을 연구하다 보니 김일성 정권이 탄생한 데에는 김일성의 항일 무장 투쟁 경력이 차지한 부분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일제강점기 김일성의 진위를 파악해보고자 했죠.” 그가 연구 끝에 내린 결론은 북한의 김일성이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한 김일성과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북한 매체는 객관적일 수 없다는 생각에 일본과 중국의 자료를 많이 참고했어요. 엄혹한 시절인지라 북한 자료 보기가 어렵기도 했죠. 일제 토벌대나 일제 검사 자료,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회고록을 기반으로 ‘김일성은 진짜다’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시간이 지나자 ‘가짜 김일성론’은 거짓이고 그의 이론이 정설로 굳어졌다. “‘가짜 김일성론’을 주장한 이명영 교수님이 학사 시절 행정학과 지도교수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어요. 제가 그분 강의를 들은 게 아니라서 연구소 취직 전에 학적부를 떼면서 우연히 알게 됐죠. 저는 스승의 이론을 깬 나쁜 학생이었던 거예요.”

그는 *실사구시를 학문적 신조로 삼았다. “체질적으로도 거짓말을 못하고, 군사독재 시절에 북한을 연구하려다 보니 더욱 진실에 입각한 글을 쓰려고 했어요. 조금만 잘못해도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갈 수 있는 분야였으니까요. 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객관적으로 연구하려던 방식이 제 학문의 철학이 된 것 같아요.” 박사학위 취득 이후 그는 민간 외교·안보 연구기관인 세종연구소의 통일전략연구실에서 일하게 됐다. 그는 세종연구소에서 8년여 동안 남북관계와 북·중 관계를 연구해 이 분야 최고의 권위자가 됐다.

‘자주’가 곧 국익이다
세종연구소에서 근무하던 그는 참여정부의 대통령인수위원으로 처음 공직을 맡게 됐다. 그가 맡았던 임무는 NSC(국가안전보장회의)의 확대개편 설계였다. “오늘날 주요 안보 사안은 국방부·외교부·통일부 모두와 연관되어있어요. 북핵 문제만 봐도 이를 알 수 있죠. 이러한 범부처 사안들을 각 부처의 이해관계가 아닌 대통령의 시각에서 해결하기 위해 NSC 확대개편이 필요했어요.” 이후 그는 외교·안보의 전략적 구상과 정책을 구현하기 위해 존재했던 NSC 사무처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다.

그가 NSC 사무차장으로 있던 당시 참여정부는 이라크 추가 파병 문제로 진통을 겪었다. “미국의 이라크 추가 파병 요청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큰 고뇌를 안겼어요. 이라크 전쟁은 명분 없는 전쟁이었지만 국익을 생각하면 추가 파병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당시 한국은 북핵 문제로 미국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어요.” 추가 파병을 결정한 이후에는 파병 규모와 파병 부대의 성격이 문제였다. “미국은 대규모 전투병 파병을 요청했지만 저는 반대했어요. 우리 군인들의 안전과 우리나라가 이라크 전쟁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규모 비전투병 파병을 주장했죠. 그러나 외교부나 국방부는 이번이야말로 한미동맹을 강화할 기회라며 대규모 전투병 파병을 주장했어요. 저와 외교부·국방부가 말하는 국익이 달랐던 거죠.” 결국 대통령의 결정에 따라 참여정부는 2004년 이라크에 소규모 평화재건부대인 자이툰 부대를 파병했다. “결과적으로는 우리 군인들이 단 한 번의 전투도 치르지 않는 성공적인 파병이었어요. 그러나 파병 과정에서 참여정부는 진보와 보수 모두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죠.”

전시작전권 환수 문제도 이라크 추가 파병과 마찬가지로 다른 부처와 이견이 있었다. “지구상 어느 나라도 전쟁 났을 때 군사를 지휘하는 전시작전권이 다른 나라에 있는 경우는 없어요. 자주국방을 강조한 저와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에 있는 전시작전권을 환수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국방부는 국방력 약화를 우려했죠. 그래서 전시작전권 환수를 2012년으로 연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아직도 우리나라는 전시작전권을 돌려받지 못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전시작전권 환수를 계속해서 미뤘기 때문이다. “우리 군이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나라를 방어한 다음에 미국에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거예요. 지금처럼 모든 것을 미국에 맡기는 태도는 자주국방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앞으로 비핵화 문제가 해결되면 조기에 전시작전권을 되찾아 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후 이 동문은 대통령의 신임을 얻어 통일부 장관에 올랐다.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장관이 되기 직전 해에 인사청문회법이 개정되어 국무위원 내정자들도 인사청문회를 거치게 됐는데 첫 번째 대상이 그였기 때문이다. 그는 병역, 위장전입, 탈세 등에서 결격사유가 없었지만, 야당과 보수언론은 그의 사상을 물고 늘어졌다. “저를 반대하는 측에서는 제 사상이 붉다고 주장했어요. 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죠. 저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일해 온 사람이에요. 북한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었죠.” 그는 인사청문회를 이겨내고 통일부 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통일부 장관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다. 당시 북한과 미국의 대립 속에서 우리나라 통일부는 사면초가에 처해있었기 때문이다.

험난한 여정 끝에 연구실로 돌아오다
미국과의 대립 끝에 북한은 2006년 말 핵실험을 감행했다. 이에 그는 책임을 지고 장관직에서 물러나 원래 직장인 세종연구소로 돌아왔다. “가끔은 NSC와 통일부에서 공직을 맡았던 4년이라는 기간 동안 세종연구소에서 계속 일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해요. 학자로서만 보면 아무런 연구도 못 하고 책도 쓰지 못해 아쉽기도 하죠. 그러나 공직을 맡으면서 저는 통일·외교·안보와 관련한 실무 경험을 했고 전략적 자세와 사안을 바라보는 눈을 키웠어요. 지금도 연구할 때 공직에서 키운 그 힘을 느끼고는 해요.”

최근에 그는 북한 전문가로서 TV 프로그램 ‘썰전’과 같은 언론 매체에도 출연해 변화하는 남북 관계에 대한 분석을 내놓고 있다.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한반도에 평화 정착 가능성이 커졌어요. 한반도의 두 냉전 구도인 남북 대결과 북미 대결이 한 번에 종식되고 있으니까요. 김정은 위원장이 서울에 오는 것도 필요해요. 김정은 위원장이 서울에 오면 한반도 평화 국면이 더 공고해질 수 있어요.” 그의 남은 바람은 한반도의 확고한 평화다. “남북이 서로의 이익을 나누며 교류하다 보면 동질감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우리에게는 반만년 간 이어진 DNA가 있기 때문이죠.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어요.”
 

*실사구시=사실에 입각해 진리를 탐구하는 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