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올해가 3ㆍ1운동 100주년,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고 인구에 많이 회자되고 있다. 1910년 나라가 망한 이래 9년 만에 그야말로 거족적인 시위가 벌어지고 이어서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될 임시정부를 만들었던 것은 독립운동사에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3ㆍ1운동의 놀라운 점은 단순히 평화 시위, 거족적인 시위라는 데 있지만은 않고, 요즘같이 소식을 곧바로 전달할 SNS나 통신수단이 미비했던 1919년에 동시다발적으로 전국에서 시위가 벌어졌다는 데 있다. 서울, 부산 등 특정 지역에서만 벌어졌다면 1980년 5월의 광주처럼 쉽게 짓밟히고 끝났을 텐데 전국에서 동시에 발생하니 일제가 당황하여 대응하기 어려워했고, 총독부를 넘어 일본 정부 차원에서 대조선 정책이 논의되어 통치방식마저 바꾸게 된 것이다.

3ㆍ1운동이 불러온 성과는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이다. 31운동 직후 서울에서 한성정부,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각각 수립되었는데, 독립운동의 사령탑이 분산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논의가 이루어져 법통은 한성정부에, 인원 구성은 대한국민의회에, 장소는 상하이에 두어 3개 정부를 통합하여 최종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게 된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은 이때 처음 만들어졌는데, 지금의 국회에 해당하는 임시 의정원에서 국호 제정을 두고 논의한 결과였다. 임시정부의 교통 총장을 지내게 되는 신석우 선생이 먼저 대한이라는 이름을 제안했는데, 짧게 쓰이고 망해버린 이름이라 하여 반대가 많았고 대신 오랫동안 쓰인 조선이라는 이름이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고 재주장하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최종적으로 대한이 국호가 되었다. 

한편 민국이란 제국의 제(帝)를 민(民)으로 바꾼 것으로, 앞서 신해혁명으로 청 제국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중화민국에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민국이란 공화국과 같은 말이다. 망국 이후 한동안 독립운동의 한 축을 구성하던 왕정복고 운동, 즉 복벽주의가 이 시기에 이르러 자취를 감춘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후기 활동에 비해 초기 활동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직후 일제가 프랑스 조계 내에 있던 임시정부 청사를 불시에 습격해 요인들이 급히 피신하느라 주요 문서들을 챙기지 못하는 바람에 그대로 약탈당했기 때문에 1932년 이전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원래 임시정부가 프랑스 조계에 정착한 이유가 외국의 조차지이므로 일제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기 때문인데, 그 의거로 일본군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이 사망하는 등 일제에 너무 큰 타격을 줘서 일제가 외교적 마찰을 각오하고 프랑스 조계에 난입했던 것이므로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 임시정부는 외교에 집중했던 후기와 달리 초기에는 국내 연계 활동에 집중하여 연락기관으로 교통국을 두고 행정제도로 연통제를 실시했다. 교통국은 아일랜드인 조지 쇼가 운영하는 중국 단둥의 이륭양행 2층에 중앙거점을 설치했는데, 여기서 배편으로 상하이와 연락을 원활히 취할 수 있었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여기서 한반도 북부에 한정되긴 하지만 평안도, 황해도를 거쳐 경성에 이르는 구간에 교통소, 교통지국을 설치하고, 함경도에도 별도의 교통국을 설치하여 국내와 상하이 사이의 연락을 도모하였다. 연통제는 지금의 도-시-군/구에 해당하는 행정조직으로서, 각 행정단위에 수장을 두되 일반적인 행정업무를 수행하진 않고 임시정부의 법령, 명령 등을 전달하거나 운영 자금의 모금, 인력의 모집, 독립운동 관련 제반 정보의 수집 등을 수행하였다. 

교통국과 연통제 모두 설치 초기 의욕적으로 진행되었으나 일제의 철저한 감시와 탄압으로 각 조직의 국장, 통신원, 특파원, 직원 등이 조금씩 피체되면서 활동이 와해되기 시작했고 결국 1921년을 전후로 구축해둔 조직이 붕괴되어 임시정부의 활동 자체가 소강상태에 접어들게 된다.

글 l 오현웅(일반대학원 사학과 석사과정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