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최인영 (ciy0427@skkuw.com)

11월이 시작되자마자 커피 프랜차이즈에서 앞다투어 ‘2020 다이어리’를 내놓았다. 처음으로 참여를 결심한 나는 달성 목표를 위한 쿠폰 개수를 보고 그날부터 내 얄팍한 대인관계에 기대어 쿠폰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결국, 얻긴 얻었다. 새해를 시작하기 한 달도 더 남은 시점부터 다음 해를 준비하기 시작한 것 같아 뿌듯했다.

그래서 지금도 그 다이어리를 보며 뿌듯한가? 질문의 대답은 하나다. ‘아니’ 다. 되려 빈 다이어리를 지금부터 채워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는 너무 빨리 다음 해를 준비한 것 같다.
 

신, 아브락사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는 우리가 지금껏 알았던 신과는 다른 신이 나온다. 신이라 한다면 순수한 어느 하나만을 상징하거나 비슷한 서너 개를 함께 상징한다. 데미안 속의 신, 아브락사스는 선과 악을 상징한다. 전혀 다른 두 개를 의미하는 신이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아브락사스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양쪽 모두이면서 그 이상이었다. … 최고의 선이자 극한의 악이었다.’ 소설에 따르면 자기 자신과 투쟁하는 모든 인간은 아브락사스에게 날아간다. 하지만 이 날아감은 결코 순탄치 못하다. 자신을 탐구하는 인간은 자신의 세계 하나를 깨야 하기 때문이다. 싱클레어는 소설 내내 자기 자신을 탐구해나가며 마침내 아브락사스를 향해 자신을 이끌어준 데미안과 입을 맞추고, 그와 닮게 된다.

알은 세계다?
그렇지만 생각해보자. 아브락사스를 위해 날아가는 우리는 과연 제때 날아가는 것일까? 하나의 세계를 깬다고 해서 우리는 아브락사스에게 바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인가? 알껍데기에도 영양분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그게 사실이라면 남은 알껍데기는 아깝지 않나?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쪽지에 써서 준 유명한 문장을 다시 읽어보자.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은 아브락사스다.’ 투쟁하는 것도 어려운데, 그 투쟁의 대상이 한 개가 아닐 수도 있다니. 여러 개의 세계를 깬다고 해도 신에게 바로 날아가는 것도 아닐 수 있다니. 복잡하다.
 

그래서, 알에 투쟁하는 새에게
하지만 어쩌면 이 복잡한 계산은 우리가 악착같이 모은 ‘2020 다이어리’가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우린 아직 2019년이라는 시간적 세계를 깨지 않은 채 다음 세계를 준비한다. 우리의 투쟁의 대상이 적어도 시간적으론 우리 나이에 하나를 더한 숫자라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다수는 ‘올해 한 게 뭐 있지?’라는 다이어리의 마지막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워한다. 이로써 하나 더 명확해진다. 우린 투쟁도 잘 못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투쟁을 준비하는 모든 새는 어쩌면 너무 빨리 다음 세계를 준비해서 세계마다 나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세계를 다 깼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하지도 못한 세계에 갇힌 걸 수도 있다. 어쩌면 투쟁하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남이 알껍데기를 깨줘서 다음 세계로 쫓겨난 것일 수도 있다. 투쟁 실패를 설명하는 경우의 수는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알에 투쟁하는 새에게 하고 싶은 말은, 투쟁에 져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나’라는 세계를 깨는 것은 나라는 존재를 알아가는 일이다. 너무 낙심하지 말자. 또 무언가의 세계가 내 뜻과 달리 끝나도, 뜻대로 끝나도, 아마 우린 다음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새일 테니까.

최인영 차장
최인영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