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선진 (hupfen@naver.com)

자과캠 만남 - 최재붕(기계 83) 동문

사진 l 박주성 기자 psj970726@
사진 l 박주성 기자 psj970726@

 

“기술만으로는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제 연구의 중심은 인간입니다.”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 출연하고 베스트셀러 포노 사피엔스를 집필한 4차 산업혁명 전문가.

모교와 후배들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우리 학교 기계공학과/서비스융합디자인협동과정 교수 최재붕(기계 83) 동문을 만났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견문을 넓혀
학교에게 받은 만큼 후배들에게 돌려주고 싶어

 

자유로운 영혼으로 자라나다
최 동문의 유년 시절은 명륜동 파출소 골목에 있던 집에서 시작했다. 우리 학교 경제학과 교수였던 아버지 때문이었다. 나이 터울이 있는 형 역시 우리 학교 경제학과를 다녔다. 덕분에 그의 어린 시절은 온통 우리 학교와 함께였다.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도 많이 했고, 중학교 3학년 때 형을 따라 학교 축제에 가기도 했어요. 금잔디 광장에서 가수들이 노래 부르는 걸 보고는 대학이 이렇게 좋은 데구나 생각했죠.”

최 동문은 여기저기 호기심이 많은 학생이었다. 성북동 산속을 매일같이 뛰어다니며 자연을 관찰하고, 백일장과 미술대회가 열리는 날에는 두 대회 모두 참가했다. 시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글 쓰는 연습을 했고, 미술부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전자 키트와 플라스틱 모델을 조립하기를 좋아했고, 모형 항공기대회에 나가 혼자서 비행기를 만들기도 했다. 다방면에 관심이 많아 과학 공부를 특별히 열심히 한 것은 아니었지만, 최 동문은 늘 공학자를 꿈꿨다. “과학과 미술 어느 쪽을 더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미술을 더 좋아해요. 과학을 좋아하기 시작한 것도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려면 과학적 사고와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였죠. 그래서 미술가나 과학자가 아니라 ‘디자인을 하는 공학자’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교수가 되겠다는 꿈도 늘 마음 한쪽에 있었다. 가르치고 연구하는 직업에 매력을 느꼈고 아버지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아버지가 항상 나라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 면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사회를 생각하는 교수가 되고 싶었어요.”

인생의 첫 행운은 고등학교 시절에 찾아왔다. 아버지가 보증을 서다 가세가 기울고 과외 금지법이 시행돼 혼란스럽던 시기가 그에게는 역설적이게도 행운으로 작용했다. 상황은 어려웠지만, 최 동문은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아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혔다. “저를 챙겨줄 사람이 없었죠. 과외도 금지되다 보니 실컷 놀 수 있었고요. 그 바람에 혼자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고 더욱더 자유롭게 지냈어요.”

 
‘놀 줄 아는’ 대학생
최 동문은 두 번째 행운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고 우리 학교 기계공학부에 입학한 일을 꼽았다. 최 동문은 경쟁에 대한 부담보다는 여유로운 마음가짐을 가지고 이런저런 활동에 발을 들였다. 학교 체육 대회에서는 매번 선수로 뛰었고, 술자리에도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들에게는 ‘얄미운’ 존재였다. “당일치기로 공부하고 시험은 100점 맞아서 친구들 열 받게 하는 학생, 제가 그런 부류였죠.” 성균서도부와 연합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공과대학 공부는 진도를 쫓아가기 바쁘거든요.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공대생으로서는 배우기 어려운, 전공 외적인 영역을 접할 기회가 많이 생겼어요. 사람들과 부대끼며 인간관계를 배우고 사회와 문화에 관해 이야기했죠.”

최 동문은 전공에 대한 고민도 계속했다. “수학과 물리에 기반한 공학이나 역학 과목을 들었지만, 즐기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들어야 해서 의무적으로 들은 게 컸죠.” ‘애플’과 ‘IBM’ 컴퓨터가 출시되는 등 추세가 바뀌면서 그의 관심은 오히려 프로그래밍 쪽으로 향했다. 대학원에 진학해 더 많은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학사 학위 논문에 컴퓨터 프로그램을 접목했고, 석사 논문을 쓰면서는 본격적으로 IT 기술에 관심을 가졌다. “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6년 반이 걸렸는데, 그 중 4년 정도는 딴 짓을 하면서 잡지식을 많이 쌓은 것 같아요. 캐나다 유학 시절 동기들을 보면서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느꼈던 게 큰 영향을 끼쳤죠.”

캐나다 워털루대에서 박사 과정을 보내며 최 동문은 활발한 *Co-op 프로그램과 디지털 플랫폼 혁신을 목격했다. “가까이 지내던 한 친구가 워털루대 재학생이 창업한 회사에 Co-op 프로그램으로 파견을 나갔어요. 저한테 제품 테스트를 도와달라고 하기도 했는데, 그 회사가 결국 우리나라 버스의 교통카드 단말기에 쓰이는 정보 저장 시스템을 만들었어요. 나중에는 핸드폰 ‘블랙베리’도 개발했죠.” 우리 학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사례들을 접하며 그는 계속해서 혁신에 흥미를 느꼈다. 북미 최초의 한국인 학생회 홈페이지를 만들어 많은 한국인이 캐나다에서도 한글로 뉴스를 읽을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전통적인 기계공학 이외의 여러 영역에 관심을 가지며 그는 1997년 박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석·박사 공부를 하는 동안 최 동문은 크게 힘들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스스로 활용할 수 있는 전문지식을 쌓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저는 교수로서 논문 작성을 강제하는 일이나 지나치게 엄격한 심사에는 찬성하지 않아요. 논문은 욕심내는 만큼 쓰는 것으로 생각하거든요. 제 석·박사 논문을 쓸 때도 스스로의 실력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정말로 뛰어난 사람이 됐다는 표시가 아니라, 이제 독립적으로 연구를 해도 좋다는 면허가 주어진 거라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고 접근하면 석·박사 모두 대단히 어려운 게 아니에요.”

 
‘날라리’ 교수, 뻔한 건 싫어
최 동문이 과거 학부생으로서 마주했던 기계공학부와 현재 교수로서 바라보는 기계공학부는 많이 달라졌다. “예를 들어 배관이 휘어지지 않도록 하는 설계를 하려면 과거에는 수학 공식을 외워야 했어요. 지금은 학생들이 ‘이거 컴퓨터로 시뮬레이션 돌리면 되는데요. 수학 공식을 왜 외워야 하죠?’라고 말합니다. 사실 원리를 이해하고 있으면 검색하고 활용하는 일은 쉬워요. 문제를 해결하는 표준이 달라진 셈이죠.” 현재 기계공학부는 교육위원회를 열어 운영 방식을 디지털로 전환하는 논의를 진행 중이다. “우리 학교는 특히 활발히 변화해가는 학교죠. 기계공학부는 특히 그렇고요.”

“고전적인 기계공학만을 가르치던 그 시절의 교수님들 눈에 지금의 저는 ‘날라리’일 거예요.” 캐나다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최 동문은 전형적인 교수보다는 통합적으로 사고하는 교수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새로운 붐을 일으킨 사람이 많았거든요. ‘야후’의 제리 양, ‘애플’의 스티브 잡스를 보며 저도 혁신적인 정신을 지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최 동문에게 우리 학교 기계공학부 故 김영진 교수는 특히 고마운 사람이다. “교수가 되겠다는 저를 이끌어주신 분이고, 스티브 잡스와 함께 제 롤모델이세요. 그리고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연구를 함께한 분을 제게 소개시켜주시기도 했죠.” 2005년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최재천 교수와 함께 진행한 공동연구를 통해 최 동문은 융합적 사고를 배웠다. 개구리, 까치, 세스랑게의 삶의 방식부터 시작해 ‘인류의 진화’를 다루는 융합 연구에 테크니션으로 참여하면서부터 최 동문은 ‘과연 인간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고민을 계기로 2008년부터는 삼성전자 연구소의 미래 제품디자인 연구에 참여했다. “교육학, 디자인, 심리학 전문가들과 함께 IT 기술을 접목해 미래의 하루 일상을 그려보는 작업을 했어요. △온도와 습도를 감지해 식물에 자동으로 물을 주는 화분 △음주 측정용·호신용 스마트폰 디바이스 △VR 기술을 이용한 실내 사이클 게임 기구 등을 구상했죠.”

 
공학도가 해야 할 일은
연구를 계속하다 보니 눈길은 자연스레 사람에게로 갔다. 포노 사피엔스또한 사람들이 신문과 TV를 보지 않고 새로운 소비 방식을 택한 이유를 궁금해하며 썼다. 최 동문은 결국 사람이 중심이라고 했다. “연구 또한 사람과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과학과 인문학의 융복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최 동문은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알게 된 내용을 자기 일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우리 학교에도 나노, 배터리, 소재 등 각 전문 분야에 뛰어난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 기술들을 잘 융합해서 인류에 기여하는 연구를 한 적은 별로 없었어요. 우리나라는 융합연구가 많이 부족한 상황이죠. 가장 큰 문제는 그나마 있는 융합연구도 공학자들끼리 한다는 겁니다. 사실은 철학, 심리학을 공부하시는 분들이 인간 전문가인데 말이에요.” 최 동문은 이런 분야에서 초석을 까는 것을 본인의 일로 여겼다. 전문가들 간의 의사소통을 매개하고 성과를 내는 일에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원동력을 대학 시절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졌던 경험이라 말했다. “제 전공 분야를 잘 살려야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 외에도 이것저것 파봤던 시간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만약 한 분야만의 전문가였다면 사회 전체에 메시지를 전하는 일은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최 동문은 공학도로서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과 미래 사회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에 대해 올곧게 말해야 함을 강조했다. “사실 ‘우버’나 ‘배달의 민족’ 등의 혁신은 일어나지 않는 게 인간을 위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변화는 언제나 받아들이기 불편하고 어려우니까요. 그렇지만 사회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일이 공학도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인간에 관해 관심을 가지세요”
최 동문은 우리 학교를 ‘삶의 터전’으로 생각한다. “기계공학부에 83학번으로 입학한 이후 유학 시절을 제외하고는 계속 학교에 있었으니 집보다 학교에 있었던 시간이 더 많을 거예요.” 우리 학교에 교수로 취직했을 때의 소감을 묻자 최 동문은 “학교에서 여러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감회가 남달랐어요. 저는 다른 학교 교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거든요. 우리 학교 교수가 안 된다면 회사에 다니거나 창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라고 답했다. 강연, 집필, TV 출연 등 활발한 활동을 하는 이유 또한 학교와 후배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설명했다.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졸업생들이 많이 찾아와요. 고맙다는 말도 많이 전해 듣고요. 성균관대 홍보대사가 됐다는 마음으로 더 활발히 다니고 있어요. 후배들이 학교에 자부심을 느끼고 뿌듯해했으면 좋겠습니다.”

최 동문은 후배들에게 인간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기를 당부했다. “인간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내가 관심 있는 분야에서 열심히 연구하세요. 실력과 추진력,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낼 힘을 키워야 해요.” 최 동문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다짐을 전했다. “지금 어른들이 쓰고 있는 지구는 미래의 주인으로부터 빌려온 것이라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주인이 될 여러분을 위해 열심히 길을 닦아놓고 있겠습니다.”
 
*Co-op 프로그램=실무교육을 집중적으로 실시하는 교육방식으로, 학습과 기업 현장실습을 번갈아 수행하는 형태의 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