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선정 기자 (sunxxy@skkuw.com)

 

문화인과의 동행 - 안규철 조각가

ⓒ안규철 제공
ⓒ안규철 제공

일상적 사물을 낯설게 재현해 관객을 멈춰 세우기

자신의 경험대로 해석하고 감상하는 태도 필요

“미술가가 지금 해야 하는 질문은, 아무도 하지 않은 질문이다”라고 말하는 작가가 있다. 안규철 조각가는 가까운 곳에 있는 평범한 사물들 속에서 이야기를 찾는다. 사람들에게 너무 익숙해 무심코 스쳐 지나간 사물을 조금씩 비틀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안 작가는 대학에서 조소를 공부한 뒤 7년간 기자로 글 쓰는 일을 했다. 이후 1980년대 사회정치적으로 변화의 바람이 불던 시기에 모더니즘에 반발한 진보적 미술 운동 진영이던 ‘민중미술’ 계열의 미술 집단 ‘현실과 발언’으로 활동하다 유학을 떠난다. 그는 ‘현실과 발언’이 예술 안에서 배제돼 온 사회 비판적 기능을 회복시켰으며 이를 특정한 형식으로 풀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거듭했다고 평가한다. 그는 오늘날 동시대 미술의 역할로서 ‘민중미술’이나 ‘모더니즘’ 등 작품의 만드는 형식을 규정해 가능성을 한정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질 것을 강조한다. 

졸업 후 작가가 아닌 기자의 길을 걷게 됐는데. 
당시에 작업을 하려면 유학을 가거나 대학원에 가야 했다. 졸업 후 작업을 하고 싶었지만 집안 사정상 생계를 위한 직장이 먼저 필요했다. 그러다 건축 잡지 <공간>에 참여하며 6개월 정도 책 만드는 일을 배웠다. 후에 <중앙일보>의 미술 잡지인 <계간미술>로 이직했다. 그렇게 7년간 일하며 글쓰기를 통해 이미지를 언어로 번역하는 개념적 사고를 획득하게 됐다. 또 잡지에 기고하는 미술계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미술계를 좀 더 넓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됐다. 

‘현실과 발언’은 어떻게 참여하게 됐는가.
기자 생활 당시 ‘현실과 발언’ 초기 동인 최민, 성완경, 김윤수 선생 등과 가까워졌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미술이 사회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명제에 동의했다. 또 모임의 동인 중 같은 서울대 미대 연극반이던 민정기 선배 덕분에 자연스럽게 1985년 합류하게 됐다. ‘현실과 발언’ 내에 조각 분과를 만들어 몇몇 동인들과 전시를 한 번 열었다. 이외에도 사회 현실과 미술의 역할에 대해 밤새 토론하거나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현실과 발언’에 잠깐 참여했다 유학을 가게 됐는데.
미술 안에서 진보적 운동을 해봤자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는 회의감이 들었다. 당시 미술계는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이 대립하고 있었다. 서구 모더니즘은 근본적으로 진보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의 모더니즘은 미적 형식으로는 진보적일지라도 내용은 전혀 진보적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그림을 그리는 방식은 진보적 서구의 방식을 답습하려 하지만 ‘군부독재는 폐지돼야 한다’와 같은 진보적 내용은 전혀 담아내지 않았다. 그런 얘기를 담아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반면 젊은 작가들이 만들어내는 작품은 불편한 이야기를 담아내도 형식적으로는 리얼리즘이라는 보수적 방식을 사용하며 스스로 미술의 가능성을 한정하고 있었다. 이 모순을 넘어서고 싶었다. 백남준 선생의 작품은 당시 고민하던 작업관의 전환점이 됐다. 사회 비판 의식과 예술의 가치가 공존하는 예술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을 넘어 다른 차원의 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유학을 가게 됐다. 

유학 생활은 작업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독일에서 생활하며 나를 ‘이방인’이나 ‘타자’로 보는 시선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내가 ‘한국적인 것’, ‘전통적인 것’을 반영한 작업을 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나는 그것에 거부감을 느꼈다. 그래서 특정 상황이나 사람을 입체적으로 재현하는 기존의 재현적 조각 방식에서 벗어나 이미 만들어진 일상적 사물을 해체하거나 과장했다. 소재에 있어서 의자, 망치 등의 사물은 어느 나라든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 안에 담긴 의미가 한국과 독일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일상적 사물에 조금씩 변형을 가하는 작업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귀국 후 *개념미술 작가로 이름을 알렸는데, 관객들은 개념미술은 어렵다는 반응이 많다. 
관객 사이에서 내 작품을 보고 ‘난해하다’, ‘복잡하고 불친절하다’는 불평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작품과 작품해설을 1:1로 제시하는 작품이 친절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관객은 그 설명을 들으면 “그렇구나”하고 돌아서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관객이 주인이 돼서 해석하길 바란다. 미술은 독립적인 인격체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보고 구체적으로 사고해 자신의 판단에 자신감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을 온전히 자신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치우고 자리를 비워준 것이다. 관념적·시각적으로 익숙하던 가방, 모자, 망치 등의 사물이 뒤틀리고 변형되면 관객은 낯섦을 느끼고 잠시 멈춰선다. 여기서 관객과 작가 간의 소통이 시작된다. 하지만 조급하게 몰아가는 현대사회에서 골똘히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좋은 작품은 이 과정에서 관객을 멈춰 세워 그들이 질문을 던지게 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현실과 발언’ 40주년 전시의 <69개의 약속>은 선거 포스터로 만들어진 회화 작품인데. 
<69개의 약속>은 선거 포스터에서 색을 추출해 *모노크롬처럼 보이게 한 회화 작품이다.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와 일민미술관이 선거와 관련한 작품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기획됐다. 입후보한 사람은 포스터가 중요한 홍보 수단이다. 우리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포즈를 취하고 옷을 갖춰 입은 그들의 이미지를 보게 된다. ‘어쩌면 이미지 정치에 넘어가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해 포토샵 작업으로 선관위가 보관 중인 69개의 선거 포스터의 평균 색값을 추출했다. 추출된 색과 가장 가까운 색을 만들어 캔버스에 칠했다. 그리고 포스터 원본의 구호를 가까이 봐야 보일 정도로 희미하게 그려 넣었다. 얼굴과 말이 사라진 그림은 엇비슷한 색만 남게 됐다. 결국 정치인들이 하는 ‘내일에 대한 약속’, ‘잘 먹고 잘살게 해준다’는 약속은 시간이 지나며 흐릿해지고 서로 간 차이가 모호하다는 것을 표현했다.

여전히 미술은 사회 비판적 기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세상이 예전보다 좋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위험하고 부조리한 것들은 남아있다. 오히려 '현실과 발언' 창립 당시에는 군사정권이나 정치 집단 등의 뚜렷한 비판의 대상이 있었다면 지금은 그 대상이 모호하고 더 복잡해졌다. 현대의 미술가들은 그 안에서 꼭 필요한 말들을 찾아서 표현하는 책임감을 짊어진다고 생각한다. 그게 관념을 뒤집는 질문이 될 수도, 누군가를 향한 위로가 될 수도 있다. 다만 매체의 발달로 언론을 접하고 말을 한다는 것이 쉬워졌다. 말이 너무 많아 되려 소음이 되는 시대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려는 말이 이미 포화 상태인지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미술가는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도 세상을 보고, 마땅한 논의가 필요하지만 아직 발굴되지 않은 주제를 테이블 위에 꺼내놓는 역할이다. 

어떤 태도로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길 바라는가. 
우리는 구름이 지나가는 광경을 보면 무슨 뜻인지 묻지 않고 넋 놓고 감상을 하게 된다. 그런 식으로 작업이 관객에게 감각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면 한다. 조심스러운 비교지만 외국에서 만난 관객은 전문가가 아닌데도 작품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해석하며 내게 질문을 한다. 하지만 국내의 관객들은 현대미술 작품이란 예술적인 영감에 의해 만들어지는 특별한 세계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잘 모르는 채 질문을 하면 망신을 당할지 모른다는 걱정에 지나쳐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작품은 외계에서 떨어진 특수한 물체가 아니라 작가가 견고하게 만들어 놓은 소통의 장이다. 관객이 작품과 자유롭게 소통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