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이건 내 실패에 대한 이야기다. <성대신문>에서 일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내 ‘개똥철학’을 내 동료들에게 설파하곤 했는데, 대학 신문의 사회부 기사는 르포르타주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면 그만하라는 동료들의 질타가 돌아왔으나, 나름의 변명은 있었다. 우린 분석이 아닌, 이야기를 전달해야 한다는 것. 

적어도 나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 쪽이었다. 아무리 견고한 팩트도 사람 사이에 그어진 생각의 선을 넘을 순 없지만, 진솔한 이야기는 그 선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믿었다. 팩트와 숫자는 강력하지만, 이야기만큼 매력적이진 않으므로. 그런 생각을 가지고 2018년 강원도 ‘아바이마을’로 떠났다. 판문점 선언 이후, ‘남북 평화 무드’에 대한 기대감이 고조되던 때였다. 당시 사회부는 2면에 걸쳐 대북 관련 기사를 기획했는데, 그중 한 꼭지로 북에서 온 실향민 노인의 이야기를 담으려 했다. 마침 ‘아바이마을’은 실향민 출신의 노인이 많은 곳이었다. 6·25전쟁 이후 노인들은 북에서 가까운 곳에 모여 살기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아바이마을’이었다. 
도착해서 노인들이 모여 있다는 마을 회관으로 찾아갔다. 왜 왔는지 설명했고, 노인들을 취재하고 싶다고 말했다. 다만, 노인들은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했다. 낯부끄럽다는 이유에서였다. 몇 번 더 인터뷰를 청했으나 대답은 같다. 결국 회관을 나왔다. 저녁 무렵 석양이 유독 붉었다. 

석양을 쳐다보며, 정말 돌아가야 하는 건지 발을 굴렀다. 다만, 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기사를 꼭 마감해야 했다. 결국 나는 다시 회관으로 돌아갔다. 노인들은 저녁 겸 약주를 마시고 있었다. 이번엔 전략을 바꿨다. “멀리까지 왔으니 인터뷰는 아니더라도, 말씀하시는 것들이라도 듣고 싶다”라고 했다. 그렇게 막걸리 몇 잔을 얻어 마셨다.

술잔을 부딪치며, 나는 홀로 노인들과의 눈치 싸움을 진행했다. ‘언제 물어보지.’ 이때다 싶은 순간 마을 이장에게 물었다. “어르신은 통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북에 가족은 없나요, 다시 가고 싶진 않나요? 고향을 잃는 건 어떤 느낌인가요?” 

내 질문에 노인은 “왜 너희들은 매번 남북 이슈만 터지면 찾아오느냐”고 되물었다. 많은 언론이 남북 이슈 뒤에 ‘아바이마을’을 방문했다고 했다. ‘나는 뒷북을 치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그 이전에, 이야기 듣겠다는 명목으로 이들에게 상처를 강요하고 있진 않은지 생각했다. 슬픔도 시간에 무뎌지는 것일 텐데, ‘당신들은 여전히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강요한 것은 아니었는지. 내 좁은 생각 안에서 타인의 이야기를 쉽게 정의하려 한 건 아니었을지. 그렇게 지면에 나온 그들의 이야기를 보며 나는 부끄러웠다.

어쩌다 나는 정말로 기자가 됐다. 가을이 바쁘게 지나갔다. 나는 다시 내 좁은 세계 안에 누군가의 이야기를 가둬놓는 사람이 될 거라는 예감에 사로잡혀있다. 사람의 이야기를 사람의 일 바깥으로 몰고 가며, 뭐라고 중얼거리는 일은 없도록 하려고 한다. 나는 내 작은 목표들을 향해 겨우겨우 가보려 한다.  
 

이상환(글경제 15)
이상환(글경제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