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박수빈 기자 (tvsu08@skkuw.com)

 

인사캠 만남 - 박순서(사회 88) 동문

사진 | 이지원 기자 ljw01@

 

좋은 보도의 완성은 
당사자의 뉘우침
다큐멘터리, 밀알이 돼 
세상을 바꾸기를

“틀을 바꿔버려요.” 박순서(사회 88) 동문은 인터뷰 기사의 정형화된 양식에서 탈피해보라며 미소 지었다. 
“정해진 형식에서 벗어나면 더 재미있어질 거예요.” 그의 조언은 그의 삶과 닮았다. 
KBS 기자이자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그리고 작가로서 틀을 깬 개척자의 삶을 산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꿈보다 낭만적인 현실을 쫓던 대학생
사회학과와 박 동문의 만남은 우연했다. “1지망이었던 무역학과에 떨어지고 2지망이었던 사회학과에 진학했어요.” 박 동문은 당시의 집안 형편을 고려해 재수하지 않고 2지망으로 합격했던 우리 학교 사회학과에 진학했다. “공부는 재미있었어요. 고등학생 때까지는 사회의 구조에 대해 고민해볼 기회가 없었는데 사회학이 그런 기회를 만들어줬죠. 세상을 바꾸겠다는 어쩌면 건방질 수도 있는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는 민주화 운동 흐름의 끝자락이었던 80년대 후반 사회학과의 분위기를 회상하며 말했다. “사회학과는 사회악과라고 불리기도 했죠.” 사회학과는 학생들의 격동적인 민주화 운동으로 사회에 해가 된다는 뜻의 ‘사회악과’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박 동문과 사회학과와의 만남은 민주화 운동 참여로 이어졌다. “거창한 뜻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민주화 집회에 참가하기도 했어요. 그때는 깊은 고민도 없이 그게 옳다고 생각했어요.” 대학 시절 그는 사회과학대학 학생회 활동과 민주화 운동을 병행하느라 공부에 소홀하기도 했다. “군대를 다녀온 이후부터는 학점을 높이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어요.” 박 동문은 졸업을 위해 계절학기 수업을 수강하기도 했다며 취업과 직결됐던 당시의 현실적인 고민을 털어놨다.

“돌이켜보면 대학 생활을 조금 더 잘 보내볼 걸 하는 생각이 들어요.” 박 동문은 무비판적으로 기존의 분위기를 수용하기만 했던 지난날이 아쉽다며 조심스레 심정을 밝혔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스스로 공부를 통해 사회를 판단해보려는 노력 없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했다는 점이 아쉬워요. 적극적으로 다양한 정보를 알아보며 나만의 가치관과 방식을 만들어야 했는데 청춘의 시기에 그런 노력을 게을리했다는 반성을 하게 돼요.”

박 동문은 방송국에 취업하라는 당시 여자친구의 조언을 듣고 언론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1학년 때 학생회 차원에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준비하며 지금의 아내를 처음 만났어요. 첫 만남 때 저 친구와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박 동문은 본격적인 취업 준비를 시작하기 전 영어 공부의 필요성을 느껴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어학연수는 굉장히 즐거웠어요. 그 생활이 너무 좋아 그곳에서 공부를 이어가고 싶을 정도였어요. 결국 지금의 아내가 직접 호주로 찾아와 설득한 끝에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죠.” 이후 박 동문은 한국으로 돌아와 기자 부문을 선택해 방송국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언론고시 소모임에 들어가 공부하며 7개월 동안 언론고시를 준비해 KBS에 입사했어요. 기자라는 직업은 꿈이라기보다는 순전히 취업의 결과였던 것 같아요.”

확신과 함께 불의를 파헤치다
“기자 생활은 육체적으로 힘들기는 했지만 적성에 잘 맞고 재미있었어요.” 기자가 된 직후를 회상하던 박 동문은 불의를 보면 끝까지 쫓아가 취재했다고 말했다. “주로 고발 취재를 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현장을 묻는 질문에 박 동문은 2002년 풍산금속 폭발사고가 떠오른다고 답했다. 

“*방위산업체였던 풍산금속의 한 공장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 세 명이 숨진 사건이 있었어요. 하지만 당시 사고 규모에 비해 크게 화제가 되지 않고 묻힌 감이 있었죠. 첫 사고로부터 한 달이 지난 후 공장이 있던 부산에 방문했는데 그때 만났던 공장 내부인이 또 다른 폭발사고가 발생했다고 말했어요. 취재를 위해 유관 기관에 전화해봤지만 사고 발생 사실을 모른다는 답변만 돌아왔어요.” 하지만 박 동문은 포기하지 않고 취재를 이어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회사 측에서 방위산업체라는 점을 악용해 철저히 속이고 감췄던 거였어요. 사고 현장에 있던 직원 세 명이 모두 중상을 입었던 큰 사고였는데도 말이죠. 사건이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구급차조차 부르지 않고 일반 차량으로 사고 피해자를 후송했어요.” 박 동문의 보도로 이 사고는 세상에 드러났고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어졌다.

“취재를 위해 질문하면 처음에는 모두 무조건 부정하곤 해요. 하지만 최초 제보자는 거짓말을 했을 리가 없다는 믿음으로 취재를 이어가죠.” 박 동문은 취재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동력은 ‘확신’이라고 밝혔다. “제보자가 정보를 털어놓을 수 있도록 믿음을 주고 또한 내가 그 사람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 중요해요.”

박 동문은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사건을 취재하며 자연스럽게 좋은 보도에 대한 고민을 이어갔다. “제 보도로 인해 구속됐던 업체 대표가 있었어요. 1년 동안 감옥에 있다가 출소했다고 전화가 왔었는데 오히려 제게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더라고요.” 박 동문은 취재 당사자로부터 생각지 못한 사과를 받는 경험을 여러 차례 겪으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밝혔다. “좋은 보도의 완성은 취재의 대상자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기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의 거대한 악과 싸우는 게 아니에요.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좋은 보도의 완성이죠. 어떻게 보면 아주 작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한 사람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에요.”

탐사 다큐, 새로운 생각을 심어주다
박 동문은 기자 생활을 이어오며 사회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했다. “기자 생활을 하며 개인적으로 뉴스의 한계를 느꼈어요. 2분 남짓한 브리핑으로 사람들의 인식 자체를 바꾸기란 쉽지 않았죠.” 이후 박 동문은 *탐사보도에 다큐멘터리적인 성격을 결합한 탐사 다큐멘터리로 관심 영역을 넓혔다.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은 가지만 꺾어내는 것이었어요. 우리에게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자양분이 필요했죠. 생각이 바뀌어야 사회가 바뀌어요. 그런 점에서 다큐멘터리는 굉장히 효과적인 장르죠.”

박 동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빅 데이터(Big Data), 세상을 바꾸다’는 데이터 저널리즘을 향한 그의 관심에서부터 시작됐다. 이때 데이터 저널리즘이란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통계적으로 분석해 보도하는 저널리즘을 뜻한다. “데이터 저널리즘을 통해서라면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것, 혹은 자신조차 모르던 것들을 알아볼 수 있어요.” 그는 점차 저널리즘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데이터의 위력이 커질 것이라 예상하며 빅데이터에 관한 취재를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다큐멘터리는 한국 언론에서 최초로 빅데이터를 집중 조명한 것으로 큰 화제를 낳았다.

“좋은 취재를 위한 고민이 데이터 저널리즘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빅데이터까지 뻗어갔어요.” 다큐멘터리 방영 이후 빅데이터는 한국 사회에서 큰 화두가 되기 시작했다. 다큐멘터리의 연장선으로 집필했던 그의 빅데이터 관련 도서는 청소년 권장 도서로 손꼽힌다. “융복합 인재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어요. 아래 세대가 미래를 제대로 준비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한편 박 동문은 목동에서 거주했던 때를 떠올리며 다큐멘터리 ‘승자독식의 자화상’의 제작 배경을 설명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 집 밖에 나와 무심코 앞을 바라봤는데 중학교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자기 몸집보다도 더 큰 가방을 메고 지쳐서 언덕을 올라오는 게 보였어요.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팠죠.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하나 탄식했어요.” 박 동문은 그 학생이 바로 한국 사회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무거운 짐을 등에 멘 채 지쳐 살아가고 있어요. 그게 입시일 수도 혹은 취업 준비일 수도 있죠.” 그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우리의 행복을 앗아간 무한경쟁 시대의 문제점과 소수의 승자만이 모든 것을 독식하는 사회구조를 조명했다. 작은 단추로부터 시작된 그의 다큐멘터리는 큰 파장을 만들어냈다. “수많은 학부모로부터 눈물을 흘리며 시청했다는 메일을 받았어요. 제가 전달한 울림이 조금씩 쌓여 일상으로의 변화가 생기길 바라요. 그것이 밀알이 되어 한국 사회가 점차 좋아질 거라고 믿어요.”

안전하고 성숙한 사회가 되기를
“기자 생활을 하면서 재난 현장을 많이 가봤어요. 여객기가 추락한 곳은 너무 처참해서 차마 바라볼 수조차 없었어요. 그중에서도 가장 안타까웠던 사고는 세월호 참사였어요.” 박 동문은 세월호 참사 1주년 특집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저는 한국 사회에 관한 염증 같은 게 있어요. 비극적인 사고들은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도 빨리 잊혀왔어요. 재난 이후 사회의 문제점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결코 성숙해질 수 없어요. 같은 재난을 되풀이할 뿐이죠.” 다큐멘터리 방영 이후 박 동문은 한 소방본부의 요청으로 재난 심리 교육 자문위원을 도맡았다. 그는 재난 상황에서의 인간 심리에 과학적으로 접근해 대한민국의 재난대응 시스템을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다음 날 사회적으로는 큰 애도의 물결이 일었어요.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여전히 출근길에 과속을 하는 등 다른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일에 관한 경각심이 부족한 상태였죠.” 그는 당시의 한탄스러웠던 심정을 밝혔다. “사회를 바꾸는 건 거창한 곳에 있지 않아요. 스스로가 바뀌어야 해요. 하지만 일상의 폭력은 오늘도 일어나고 있죠. 한국 사회를 바꾸는 건 꽤 오래 걸릴 것 같네요.”

Why Not?
좌우명을 묻는 질문에 박 동문은 잠깐의 침묵 이후 “Unfold your own myth”라 답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고민해보고 열정적으로 준비하면 그 속에서 길이 보여요. 스스로를 탐구하며 좌충우돌 인생을 겪다 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할 거예요.” 이어 좋아하는 일에 도전하기를 주저하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부탁하자 그는 호탕하게 “Why Not?”이라 외쳤다.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선물이에요. 저도 기자로 살아오며 다양한 도전을 해왔지만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좋아서 한 일이죠. 물론 자신의 이상과 사회 발전이 양립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드는 것이 동력으로써 바람직해요. 그런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박 동문은 다양한 경험을 해보며 본인만의 안목을 길러야 한다며 언론인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남겼다. “진실과 거짓은 혼탁하게 섞여 있어요. 이분법적인 사고에 현혹되지 않고 거름망처럼 오물을 걸러낼 수 있어야 하죠. 기자는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갖는 직업인 만큼 책임감을 가져야 해요.”

방위산업체=정부의 지정을 받아 총포류 등 국가방위와 관련된 군수품을 생산하는 업체.
탐사보도=감춰져 있는 사실이나 현상을 조사 및 발굴해서 세상에 공개하는 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