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스무 살들의 술자리. 지방과 간장 타는 냄새가 뽀얗게 피어오르는 건데, 그 매캐하며 부드러운 냄새는 담배연기를 떠오르게 하는 거다. 희뿌연 연기가 좁은 원형 테이블을 뭉게뭉게 흐릿하게 만든다. 그 뜨거운 연기에 우린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황급히 소주를 뒤로 넘긴다. 소주 때문일 수도 있다, 발간 스무 살 우리들의 얼굴은 말이다. 희끄무래한 연기는 우리의 얼굴을 가려준다. 스무살 대학생인 우리는 기쁘게 그 연기 뒤로 우리의 본 모습을 살그머니 숨기는 건데, 그래서 스무 살들의 술자리는 외롭다. 서로의 내밀한 감정은 고기 타는 연기에 숨겨지고, 우린 한 편의 희극의 주인공처럼 연기한다. 우린 우리 본모습을 숨겨야 한다. 스무 살 우린 서로 모르기 때문이다. <노르웨이의 숲>의 주인공은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만이 도쿄에 있기에 도쿄로 대학을 간다. 우리 모두 그와 같지 않을까 싶다. 우리의 유년과 청소년을 보낸 고향의 좁고 퇴락한 골목을 떠나 그 누구도 나에게 신경쓰지 않는 서울에서 새로운 관계를 위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게 아닌가 싶다. 

대학에서 가진 술자리, 어색한 스무살들의 술자리도 그렇다. 서로를 모르는 우리는 서로를 탐색한다. 그러나 자신을 드러내진 않는다, 아니 못한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극한의 타인으로 밀어붙인다. 동기, 후배, 선배로서의 역할에 숨어 대본을 읊는다. 대학에서의 인관관계는 그런 것이다. 지금까지의 나는 잠시 숨기고, 새로운 나의 역할을 맡아 무대에서 연기를 펼치는 건데, 그 연극의 첫 장은 아마 술자리일 것이다. 

우린 어색하게 둥근 플라스틱 의자에 어정쩡하게 앉아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술잔을 만지작거린다, 서로 어색하게 눈치를 보고, 자신의 역할을 직감적으로 실감한다. 조용하지만 술자리에선 재미있는 역할이거나, 분위기메이커거나, 무게있는 애거나, 늘 유쾌하고 다가가기 쉬운 역할이거나 하는 극중의 페르소나를 직감적으로 파악한다. 대학에서의 스무살인 우린 그렇다. 서로에게 다가가기 두렵고 힘들고 부끄러울 뿐이다.

코로나19 이전의 대학생활이 전설같이 내려오지만, 코로나 이후의 우리에겐 비현실적이다. 모두 마스크를 쓴다. 마스크 뒤의 표정을 파악하는 건 힘들다. 하얀 마스크를 잔뜩 당겨쓴 이천이십일년의 우리들은 이천십구년과 이천십팔년 그리고 십칠년 십육년 그들관 다르다. 우리가 보는 건 흰 마스크뿐이다. 그 껍데기 뒤의 그 애는 무슨 애인지 우린 알 수 없다. 

술자리에 둘러앉아 마스크를 벗어도 그건 마찬가지다. 저 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표정인지 알 수 없다. 우리에게 익숙한건 흰 마스크 뿐이다. 마스크가 없어도 우릴 숨겨주는 희뿌연 고기 타는 연기는 여전하다. 

 

김현서
(인과계열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