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이창현 기자 (vlakd0401@skkuw.com)

남한산성 자락에 ‘성문밖학교’란 이름의 대안학교가 있다. 바로 옆 개울에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우거진 풀숲의 내음이 가득하다. 비록 아이들의 수는 적지만 그렇기에 일상의 사소한 이야기들도 정겹게 떠돈다. 그곳에서 아이들이 넓은 세상을 바라보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길 바란다는 권재형 교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어린 시절에 어떤 아이였는가.
저는 풍부한 감성을 가진 아이였어요. 제가 어릴 적 살던 동네에 사람들이 피하는 각설이패가 있었어요. 그런데 저희 부모님은 피하시기는커녕 항상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셨죠. 저희 집 근처로 각설이패가 올 때면 아버지는 옷을 갖춰 입고, 어머니는 식사를 준비하시는 등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셨어요. 저는 펌프로 그들이 씻을 물을 길었죠. 그래서 친구들에게 아버지가 거지 왕초 아니냐고 놀림을 받곤 했어요. 저는 아버지께 그들과 관계가 있느냐고 여쭤봤는데 끝까지 말씀을 안 해주셨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아이들에 대한 연민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이런 부모님 아래서 자라서 그런지 저 역시 연민, 미안함 같은 감정을 잘 느꼈던 것 같아요. 한번은 이사를 가며 전축과 마당에 키우던 잉어를 챙기지 못하게 됐는데 그것들에 미안함을 느끼기도 했어요.

어릴 적부터 교육자의 꿈을 가지고 있었는지.
초등학교 2학년 미술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교사의 꿈을 가졌던 적이 있어요. 미술 선생님께서는 마지막 수업 시간에 당신을 그려보라고 하셨어요. 당시 선생님께선 다리에 깁스를 하고 계셨는데, 저는 그 모습을 그대로 그렸죠. 그런데 선생님께 검사를 맡으러 교탁 앞으로 나가니 다른 아이들은 모두 선생님의 다리를 멀쩡하게 그린 거예요. 제 차례를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에 얼마나 긴장되고 걱정이 많았는지 몰라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오히려 당신을 걱정해준 거냐며 절 기특해하셨어요. 그때 긴장이 풀리며 ‘아, 나는 커서 저런 선생님이 돼야겠다’라는 마음을 먹었죠. 그런데 중학교 때부터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등록금을 제때 내지 못했어요. 그래서 교실에서 수업을 듣기는 했지만, 출석부에는 출석 처리가 돼 있지 않고 등교정지 도장이 찍혀있었죠. 공립 학교라서 등록금 미납이 선생님들께 폐가 되는 게 아님에도 그런 조치를 받은 게 어린 마음에 참 서운했어요. 그래서 학교 선생님이라는 꿈을 어느 정도 내려놓았죠.

대학을 떠나 노동 문화 운동을 시작한 계기는.
원래는 대학에 가지 않고 바로 취직해 집안에 보탬이 되고자 했어요. 하지만 대학은 나와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당시 열풍이 불었던 전자공학과에 진학했어요. 그런데 전공보다는 역사, 철학 등 다른 분야에 빠져들게 됐죠. 특히 전태일 평전을 읽고는 당시 우리 사회 노동 현장의 문제를 남의 일로 여길 것이 아니라 내 삶 속 고민의 출발점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학생 운동에 투신하다 입대했고, 제대 후에는 연탄 배달 등 여러 일을 하며 지냈어요. 제 마음은 이미 학교를 떠나있었지만, 부모님께서는 제가 학업을 이어 나가길 바라셨죠. 그래서 학교를 졸업해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할지 아니면 사회 문제에 투신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당시 학생사회는 *사회구성체 논쟁이 벌어지고 학생 운동의 조직 계열이 양분되는 혼란스러운 시기였어요. 그래서 저는 비록 학교는 떠나더라도 학생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무언가 역할을 해야겠다고 다짐했고, 노동 문화 운동을 시작하게 됐어요.

대학 밖에서는 어떤 일들을 했는지.
한국문화운동연구소라는 노동자 문화운동 단체에 소속돼 활동했어요. 연극, 풍물놀이 등 문화 활동을 준비하고 노동자 앞에 나서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일종의 경험에서 오는 자신감을 얻게 됐어요. 그때의 제 성격은 ‘소심한 감상주의자’였어요. 하지만 ‘낯선 사람들 속에서도 내게 주어진 역할을 해낼 수 있다’는 자기 최면을 계속 걸다 보니 그런 제 성격이 조금은 변하게 됐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 연극패 활동에 매너리즘을 느껴 그만두게 됐어요. 사람이 중요하다는 내용의 연극에서 어머니를 여읜 ‘봉구’ 역할을 맡았는데, 극 중에 봉구가 어머니의 유서를 읊는 장면이 있었어요. 그런데 여러 현장을 돌다보니 익숙함에 젖어 일반적이지 않은 대사마저도 기계적으로 읊는 제 모습에서 내가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 질문을 던지기도 했어요. 그래서 차라리 연극이 아니라 노동 현장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싶어 지금 살고 있는 성남에 정착했어요.

노동 현장에서 멀어진 계기가 있었는지.
아끼던 대학 후배가 노조 활동 중 분신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후배가 하고자 했던 일을 제가 이어나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주로 저녁 시간엔 노동자들을 만나 연극 모임을 하거나, 노동조합에 방문해 풍물놀이 등 문화 교육을 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그게 서른 살 전후 제 삶의 모습이었죠. 그런 활동들을 통해 저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는 새로운 세상의 가치를 이야기하고자 했어요. 그런데 정규직 노조 가 비정규직 노조의 문제를 외면하는 모습을 보며, 더 불합리한 노동 조건에 처한 이들을 단지 사회적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이유로 무시하는 처사가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어요. 그리고 제 목표도 끝이 보이지 않으니, 노동 해방과 같은 가치에 집중하느라 정작 ‘나’라는 존재를 잊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후 노동 현장을 떠나 IMF로 일자리를 잃은 동료들과 함께 문화센터를 만들었어요. 경영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던 탓인지 월세를 내기 급급했고 오히려 빚을 지게 됐죠. 그래서 빚을 갚고자 제가 가진 능력을 살려 한 공동육아 모임에서 아이들에게 장구, 그림 등을 가르쳤어요. 그러다 운이 좋게도 잘 가르친다고 소문이 나 더 많은 곳에서 아이들을 만날 수 있게 됐죠.

학교 설립 당시에는 조력자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연유로 교장직을 맡게 됐는지.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 됐는데, 근처에는 중학교가 없어 용인으로 이사를 가려했었어요. 그런데 어떤 목사님이 동네에 천사의 집이라는 시설을 차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사는 걸 알게 됐어요. 당신 자식들 외에 부모와 떨어지게 된 아이들도 함께 말이죠. 하지만 시설 환경이 썩 좋지 않았고, 시설에 산다는 이유로 아이들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동네에서도 평판이 좋지 못했어요. 동네 주민으로서 아내와 함께 시설 환경 개선에 도움을 주며 아이들을 돕고자 했어요. 그러던 와중에 아내가 용인의 아파트를 정리하고 집을 하나 장만해 그 아이들을 도우며 지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어요. 마침 목사님도 대안학교를 만드는 게 꿈이라고 하셨고, 그래서 저도 돕겠다고 해 학교가 열렸어요. 제가 처음부터 학교를 운영했던 것은 아니고, 처음에는 조력자 역할로 시작한 거죠. 오전에는 장구 수업을 다니며 생활비를 벌고, 오후에는 학교에 나가 일을 도왔어요. 그러다 함께 모여 학교를 운영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게 됐고, 학교 운영 자체가 어려워졌죠. 그래서 나라도 남아야지 하다 보니 어느새 대표 교사이자 교장이 됐네요.

교명에 담긴 학교의 교육 목표를 설명해달라.
학교가 위치한 남한산성 문밖이라는 지리적 특성과 아이들이 성문 밖에서 세상을 넓게 관조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미를 모두 담고 있어요. 학교 로고도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죠. 학교 로고는 각 글자의 글씨체, 색깔, 크기가 모두 다른데 성문밖학교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획일화되지 않은, 새로운 가치를 만들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어요.  아이들이 중점적으로 학교에서 배웠으면 하는 건 바로 자립심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에요. 일견 모순돼 보이는 두 가지는 공존할 수 있는 가치예요. 남에게 쉽게 의지하는 게 아니라 마주한 문제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사람들과 그 결과를 나누면서 말이죠. 학교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체험 활동은 두 가치를 아이들에게 심어주기 위한 거예요. 암벽 타기는 제힘으로 올라가야 하는 동시에 밑에서 줄을 잡아주는 친구를 믿어야 하는 활동이에요. 승마도 스스로 호흡을 다듬지 않거나 말과 신뢰를 쌓지 못하면 떨어지게 되죠. 이런 관계에서 오는 정서적 교감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이들에게 큰 힘이 되리라 믿어요.

교장으로서 중요시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어떤 책에서 본 ‘자유의 반대는 관성’이라는 말이 인상 깊었어요. 관성이 개인이 가진 자유에 대한 의지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는 거죠. 그래서 저희 학교의 아이들이 관성에 빠져있는 게 아니라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이 아니더라도 세상에 의문을 가지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대단한 영웅이 되자는 게 아니라 사람다움을 잃지 말았으면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직장에서 부당한 걸 지시하면 대부분은 현실에 타협을 하곤 해요. 근데 그건 그 개인이 나빠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그런 무력감이 살아가는 요령처럼 각인돼 있어서예요. 무력감을 떨쳐내려면 혼자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지혜를 나누고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연대가 용기가 아닐까 싶어요. 아이들이 용기 있는 삶을 살아가길 바라요.

지난 11년 간 교장으로서의 삶을 돌아본다면.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하고 싶은 말을 언제든 소신껏 할 수 있는 관계 속에서 있으면서도 생활에 크게 불편함이 없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돌쇠라는 제 별명에서 알 수 있듯, 저와 갈등이 있었던 사람들에게 고집이 세다는 말을 듣곤 했어요. 어떤 학부모는 학교에서 유급된 아이를 학교에 데려와 검정고시 합격만 시켜주고, 학교의 다른 교육 프로그램은 시키지 말아 달라고 했어요. 저는 적어도 우리 학교에서는 그럴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죠. 사실 대안학교에서는 이렇게 학부모의 의견과 달리하는 게 학교의 존폐를 위험하게 해요. 공교육과 달리 다른 학교를 택하면 그만이니까요.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 학교가 추구하는 교육의 가치를 지금까지 잘 지켜내고 있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지.
교장과 교사에 쓰인 ‘교’자는 각기 다른 한자예요. 교장에는 학교 교(校)자가 교사에는 가르칠 교(敎)자가 쓰이죠. 그래서 교장은 학교를 관리하는 사람이고,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어요. 저는 교장의 역할을 맡고 있지만, 외부에선 교장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아요. 단지 학교를 관리하는 높은 사람이 아니라 진짜 선생님으로 기억되고 싶기 때문이죠. 2~3년 후에는 포장되지 않은 세상의 이야기로 아이들에게 물음을 던질 수 있는 동화책을 써보고 싶어요. 저는 늘 아이들에게 “난 너희가 읽고 싶어 할 책을 쓰고 싶어”라는 말을 하곤 했거든요. 아이들에게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사람으로도 기억되면 좋겠네요.

◇사회구성체 논쟁=80년대 중반 한국의 학생운동 진영에서 제기된 이념 논쟁.

 

촛불 문화제에 참가한 권재형 교장과 아들의 모습.
ⓒ권재형 교장 제공
야외에서 진행되는 영어 수업 모습.
성문밖학교의 전경.
승마 수업의 모습.
ⓒ권재형 교장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