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스물셋이 되기까지 나는 수많은 갈림길에서 자주 익숙한 길을 택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하지 않았다. 때로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길이 궁금해지기도 했지만, 나는 지금 선택에 충분히 만족한다며 합리화하고 안주하는 데에 도가 튼 지 오래였다.

 스위스로 교환학생을 가야겠다는 결심은 처음으로 다른 길로 발을 돌린 거였다. 지금이 아니면 못 가는 이 길을 포기하면 두고두고 뒤돌아볼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하지만 익숙한 환경에서 방향을 튼 것에는 그만큼 어려움이 따랐다. 비자 심사부터 기숙사 계약까지 쉬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출국일을 앞두고 친구들을 만나 작별 인사를 할 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렇게 소중한 것들을 두고 가도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이 새로운 길이 정말 나를 위한 길이 맞을까? 하루하루 줄어드는 한국에서의 밤마다 약간의 우울함에 빠졌다.

그렇게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 오게 됐다. 교환학생 시절, 매일이 믿을 수 없이 행복했다는 친구의 말과 내 새로운 일상은 사뭇 달랐다. 막연히 그린 것처럼 환상적이지도 않고, 서럽고 외로울 때가 꽤 있었다. 독일어로 돼 있는 기숙사 세탁기를 쓸 줄 몰라 20분 동안 번역기만 돌리고 있을 때, 물가가 비싼 스위스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9천 원이라 먹지 못할 때, 온통 낯설고 처음 겪는 일투성이에 그냥 익숙한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여기 온 지 2주가 됐을 즈음 친구들과 근교 소도시로 놀러 가는 길에 슈피츠라는 작은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알프스와 호수를 끼고 있고, 마트나 레스토랑도 없어 보이는 스위스의 시골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흐린 날이라 산도 잘 보이지 않았고, 영화 같은 풍경도 없었지만 그 장면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내가 살던 종로구 혜화동과 세상에서 가장 반대로 생긴 곳이 있다면 여기일 것만 같았다. 있는 것조차 몰랐고 궁금하지도 않았던 지구 반대편의 작은 마을에서도 사람들은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내가 멀리 떠나오지 않았다면 이런 장면은 평생 상상도 하지 못했을 거라는 걸 깨닫고는 문득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가지 않은 길. 중학교 2학년 국어 수업 첫 시간에 선생님이 칠판에 쓰신 다섯 글자였다. “앞으로 살면서 수많은 갈림길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익숙하고 잘 아는 길을 택하면 가지 않은 길에 뭐가 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너희들이 그 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도록, 때로는 익숙하지 않은 길을 택해보길 바란다.” 그 말씀을 들은 지 8년 만에 난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떠나온 거였다. 그리고 익숙한 길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풍경을 보고 경험하고 있었다. 교환학생을 오지 않았다면 이렇게 새로운 어려움은 겪지 않았겠지만, 늘 그랬듯 평범한 학부생으로 당연한 한 학기를 보냈을 거다. 그런 생각에 다다르니 낯선 이 길에 무엇이 있는지 전부 보고 느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착한 지 한 달이 돼가는 지금도 어려운 일은 여전히 많다. 며칠 전에는 내가 지금까지 일반 기차 티켓 없이 1등석 업그레이드 추가비용만을 지불하고 돌아다녔다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이제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가 용기가 없었다면 가지 않았을 길-심지어 어딜 가든 알프스가 보이는 길-에 지금 서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 길 앞에 놓인 것들이 이제는 기대되기 시작했다. 익숙함에 작별을 고한 만큼, 새로움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한 학기가 되기를! 
 

 

 

 

김수현(미디어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