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이응민 기자 (emlee1114@naver.com)

자수할 것이 있다. 그것에게 애정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의 움직임을 내 손으로 멈추게 한 적이 있다. 살아있는 것을 기계처럼 대했다. 나는 기사를 죽인 적이 있다.

기사는 살아있는 것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생각의 움직임, 취재의 움직임 그리고 글을 쓰는 행위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숨을 쉬게 된다. 부끄럽게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 게으름이라는 오만한 핑계에 애써 지기를 자처하며 숨을 멎게 했다. 

기계처럼 기사를 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글쓰기에만 매달리는 것이다. 처음 신문사에 들어오며 되뇌었던 문장이 기억난다. “생각을 잘 전달할 수 있는 글 쓰는 기술을 연마해보자” 하지만 이는 오판이었다. 모든 글은 그 너머에 생각이 존재한다. 좋은 글이 되기 위해서는 너머의 생각이 얼마나 잘 살아있는지가 중요하다. 탁월하고 탄탄한 논거를 통해 설득력을 가진 생각은 마음껏 살아있게 된다.

본인의 생각이 살아있는 기사를 쓰는 것. 신문사의 많은 기자들이 회의를 하는 이유이자 ‘자신의 기사’를 쓰고자 하는 원동력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 자체의 깊이를 키우고 빈틈없는 사실들을 모아 주장하는 것이 기사의 요지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신문사 활동을 하기 전, 기자는 관찰하고 알리는 자에 그친다고 생각했다. 과거에 꽤 히트했던 드라마 ‘피노키오’에서는 기자의 할 일을 이렇게 말한다. “기자는 빙판길에 넘어지는 사람을 당장 돕기보다 그 일을 관공서가 알 수 있도록 기사를 써서 대대적인 빙판길 보수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관찰하고 보도하는 것의 중요성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기자의 전부라 한다면 신문사 활동을 통해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당당히 반박하겠다. 기사에는 생각이 담겨있고 생각이 살아있을 때만이 관찰과 보도를 넘어 다른 이의 행동을 이끈다. 그것이 기자의 문제 제기 방식이며, 기사라 일컫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사의 움직임을 멈췄던 지난날들에 대한 후회도 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앞으로 나에게 할당된 지면이 지난날의 후회에 빠지기보다 깨달음을 실천할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호에 다룬 명예총장 제도와 규정에 대한 이야기는 생각이 마음껏 살아있도록 쓰는 기사에 대해 당차지만 미약한 시작이길 바란다.

작별을 고하기엔 너무 이르고, 당당한 시작을 알리기엔 늦은 지금 즈음. 시작과 끝은 닮아있고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이 아니기에 앞으로 남은 활동에는 살아있는 기사로 지면을 채우리라. 
 

 

 

 

이응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