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 논리에 의한 곡물시장 왜곡 심각

기자명 이경미 기자 (icechoux@skku.edu)

지난 해 9월, 멕시코에서 WTO 반대 투쟁을 하던 한국 농민 이경해 열사가 자결했다. 이 사건은 해외 언론에서도 비중 있는 뉴스로 다뤄졌으며 칸쿤 현지에 이 열사 임시 분향소가 세워지기도 했다. 일년 전 농민들의 분노가 지난 주 한국에서 고스란히 재현됐다. 쌀 개방 반대 시위가 있던 지난 10일 전북 정읍에서는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수십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유혈낭자한 사건의 중심에 있는 것은 식량주권이라는 태풍의 눈이었다.

유엔식량농업기구(이하: FAO)의 2002년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영양실조 인구가 8억 4천만명, 개발도상국 국민의 70%가 기아에 무방비 상태이다. FAO 자크 디우프 사무총장은 “인류가 충분한 식량을 생산하지 못한다거나 기아 퇴치 방법을 모른다는 거짓 변명에서 벗어나 모두가 관심을 보여야 할 때”라며 기아 퇴치를 위한 의지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세계적으로 카길, ADM을 비롯한 네 개의 다국적 곡물 기업이 전체 곡물 시장의 80%를 장악하고 있으나 이들을 통해 식량을 거래하는 국가는 약 20개국에 불과하다. 1995년 하버드 대학의 아마르티아 쎈 교수는 “기근은 식량부족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식량에 대한 접근성에 문제가 생길 때 발생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또한 카길사의 다니엘 암스타츠 전 부회장이 농업협상의 기본인 우루과이라운드(이하: UR) 협상 초안을 작성한 사실은 식량개방 관련 WTO 규정에 대한 불신의 근거가 되고 있다.

정부 대책은 빛좋은 개살구

현재 한국의 식량 자급도는 26.9%이며, 이 중 쌀을 제외한 수치는 5%에 불과하다. 전문가들은 한국 곡물 시장의 60%를 카길사가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한다. 통계청의 ‘2003년 농가경제조사’결과에 따르면 작년 가구 당 평균 농가부채는 약 2천7백만원으로 전체 농가부채는 40조 가량에 이른다.

우리쌀 지키기 식량주권수호 범국민 운동본부(이하: 운동본부)의 이종화 상황실장은 “농촌은 인구 유입이 중단 된지 오래이며 각종 생활 제반 시설이 부족해 인간적인 삶을 유지하기 힘들다”며 “빚농사에 지친 농민들은 도시로 와 노숙자·실업자와 같은 빈민의 처지로 전락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해 한­칠레 FTA 통과 과정에서 1백19조원을 향후 10년간 농업분야에 지원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농림부 예산을 포함한 금액으로, 농림부의 한 해 평균 예산이 약 10조원 이상인 점과 10년 동안의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면 실질적인 지원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또한 정부는 농지 6ha 이상의 쌀 전업농 7만호를 2010년까지 육성해 쌀 개방으로 인한 여파를 줄이겠다고 밝혔으나, 농민들은 이러한 규모화가 평균 190ha를 소유한 미국 농가에 비해 얼마만큼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지 의문을 표하고 있다.

관세유예화 협상

정부는 미국과 태국, 중국을 포함한 9개 국가와 쌀 개방 협상을 진행중이다. 지난 10일 농림부는 최대한 쌀 관세화 유예 입장을 고수하겠다고 밝혔으나 미국과 중국이 그 대가로 타 품목의 추가 개방을 요구, 최종 합의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올해까지 이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내년부터는 자동으로 쌀 관세화 의무를 지게 된다. 1994년 UR 협상에서는 한국적 식량산업 구조의 특수성을 인정받아 쌀에 대해 10년간의 관세 유예화가 결정된 바 있다.

이 상황실장은 “개방이 되면 우선 한국 농민이 농사를 포기하게 되고 식량 자급이 불가능 해 질 것”이라며 “당장은 외국 쌀을 싼 가격으로 먹자고 하지만 수출국과 다국적 기업들이 언제까지 싼 가격으로 쌀을 주겠느냐”고 반문했다.

실제로 1972년과 1973년 세계식량파동 당시 곡물생산량은 3% 감소했음에도 불구, 쌀과 밀의 국제가격이 각각 367%, 212%씩 올랐다. 한국에서도 1980년도의 냉해로 인해 쌀 부족 사태가 일자 수입 쌀 가격이 3배 상승했으며, 7년간 일정량을 의무적으로 수입한다는 조건을 수용해야 했다.
한편 중국은 사막화와 개발로 인한 농지·농업인구 감소로 올해 옥수수 수출을 금지하는 등 식량난이 가시화되고 있고 태국 쌀은 크고 찰기가 없어 우리 입맛에 맞지 않는다. 따라서 개방 이후에는 미국에 의한 쌀 독점이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전망이다. 

식량주권 법제 정비로 지켜야

외국의 경우 식량 자원의 중요성을 인정, 자유무역 원칙에 위배됨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해왔다. 스웨덴과 핀란드의 경우 헌법이나 공급보장법 등으로 식량자급률을 법제화해 약 130%에 이르는 식량자급률을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 민주노동당은 논평을 통해 “한국 정부의 수매제 폐지와 농지규제완화 및 비밀 협상 등은 농민의 요구는 물론 세계적 추세마저 역행하는 것”이라며 “진정한 국익은 개방이 아닌 식량자급”임을 강조했다.
흔히 3대 주권으로 식량과 군사, 에너지 주권을 꼽는다. 한국은 주요 에너지원인 석유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군사 주권 역시 전시상황 작전권이 없는 점으로 보아 완전히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다. 마지막 남은 식량 주권을 지키기 위해 정부의 장기적인 안목과 책임감있는 결단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