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이 춤추는 한글 대탐험’ 스케치

기자명 박소영 기자 (zziccu@skku.edu)

교실에서 학생들이 알파벳을 배우고 있다. 선생님은 선창한다. “A!”학생들은 일제히 따라 외친다. “A!” 이윽고 한 학생이 선생님 옆으로 나와 두 발을 똑바로 딛고 서 알파벳 ‘A’를 만든다. 다음 단어를 배울 순서. 선생님은 외친다. “B!”흡사 앵무새처럼 학생들은 선생님의 입을 좇아 외친다. 이번엔 학생 세 명이 나와 알파벳 ‘B’를 만든다. 이제는 ‘ㄿ을 배울 차례.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이들은 일제히 등을 돌리고 앉아 알파벳 노래를 부른다. “A, B, C, D, E, F, G……” 영어를 중시하고 한글이 소외된 사회를 풍자한 ‘말과 글이 춤추는 한글 대탐험’의 도입부다.

지난 10월 5일 있었던 이 공연은 1991년부터 매년 한글날을 기념하여 한글의 아름다움을 현대 무용으로 표현한 밀물현대무용단의 15번째 작품이다. ‘한글로 풀어 본 댄스 뮤지컬 훈민정음’이란 부제를 가진 공연의 초반부는 신나는 음악과 춤들로 가득했다. 공연은 책상과 의자 등 작은 소품들의 활용이 돋보였다. 책상을 움직여 소리를 내며 박자를 맞추고 일제히 책상 위에 올라서서 압도적인 배경을 만들거나 의자를 일렬로 늘어놓고 그 위에 선 출연자가 다른 출연자들의 춤을 조종하는 연단 역할을 해 내기도 했다. 커다랗고 동적인 움직임 위주의 안무는 관람객들의 시선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했다.

교실에서의 안무가 끝나자 배경은 각종 외국어 간판이 난무하는 거리로 바꼈다. HITE, YBM, KFC등 우리 주변에서 익숙하게 접할 수 있는 외국어 간판들이 이제는 주인공 ‘한글이’를 압박해 왔다. 이윽고 한글들이 파편처럼 거리로 뿌려지고 이어지는 독무에서 관객들은 파편화 됐던 한글을 다시 만났다. 출연자가 서서히 허리를 굽혀 ‘ㄿ을 만들 때, ‘드디어’라는 표현이 들어맞을 만큼 한글은 새롭게 발견됐다. 우리가 언제 한글 그 자체의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추어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박재은 기자 modernna@skku.edu
우리는 항상 한글의 기능적 우수성만을 언급했지 정작 글자 각각이 가지는 형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보지 못했다. 초반의 경쾌하고 강한 비트의 음악은 간데 없이 엄숙하고 장중한 전통 가락과 함께 한글은 출연자들의 몸짓으로 새롭게 형상화됐다. 세 사람이 모여 만든 ‘ㅍ’, 두 사람이 손을 높이 치켜들고 맞대어 만든 ‘ㅊ’등 정적이고 조용한 움직임이 글자 하나하나를 창조했다. 명확한 글자 모양을 만들어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흔들림 없는 균형과 바른 자세, 그리고 협동된 움직임이 요구된다. 상대방의 무릎 위에 올라가 손을 잡고 몸을 기울여 ‘ㅅ’을 만드는 모습은 한글의 획이 상호보완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역동성이 느껴지는 힘찬 안무가 이어지자 몸짓으로 재 탄생한 한글이 마치 춤추듯이 각인됐다. 마침내 한글은 존재의 가치를 주장하겠다는 듯이 힘차게 관객 쪽으로 다가섰다. 마지막으로 철골구조 위에 올라간 출연자들이 일제히 몸으로 ‘한글’이라는 글자를 만든 순간, 관객들의 탄성과 함께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공연이 끝나고도 그 흥분이 한동안 가시지 않을 만큼, 인상적인 마무리였다. 한글을 지키고, 계승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무용으로 한글의 입체적 형태와 아름다움을 나타낸 이번 공연은 신선한 충격과 함께 대중들이 쉽게 한글을 느낄 수 있게 한 계기가 됐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