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진가연 기자 (iebbi@skku.edu)

한 나라를 뜻하는 ‘국가(國家)’. 근대적 의미의 국가는 주권국가 즉,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군사와 영토, 경제력을 갖춘 독립 국가를 뜻한다. 하지만 근세 이전의 국가는 천자나 제후국과 같은 서열적 개념으로 그 의미가 근대와 다르다. 당시로는 현재의 사회 통념을 뒤집는 혁신적 국가 개념인 셈이다. 이처럼 달라진 국가의 의미는 개념사 연구의 한 범주를 보여주고 있다.

학문의 기본 토대가 되는 개념사 연구
개념사 연구는 단지 서구의 언어를 ‘번역’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우리만의 역사를 찾아내고 개념화하려는 노력이다. 이는 주체적인 역사를 구성할 수 있는 가장 필수적인 연구로서 인문학계의 새로운 트렌드로 각광받고 있다.

서구나 일본 등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충분한 연구가 이뤄져 왔지만 그에 비해 국내 연구는 산발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학계는 이에 대한 자성으로 개념사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현재 통용되는 한국적 인문·사회과학의 개념사 연구는 크게 두 가지 범주로 구분된다. 19세기 이후 수용된 서양 학문의 개념이 이전부터 사용된 개념들과 서로 충돌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 경우와 번역 상에서 새롭게 형성된 경우다. 전자는 국가의 사례에서, 후자는 자연주의, ‘내추럴리즘(naturalism)’에서 알 수 있다. 내추럴리즘은 본래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인간 상태를 그려낸 작품 경향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자연으로 번역했고 일본 문학만의 독특한 경향인 사(私)소설을 만들어냈다. 이 경향이 그대로 자연주의란 이름으로 한국에 유입된 것이다.

위의 사례들처럼 19세기 중엽 이후 한국사회는 서양이나 일본, 중국 등의 개념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돼 기존 개념과 충돌하는 그야말로 혼돈의 상태였다. 이런 점에서 개념사 연구는 △전통의 급속한 해체 △이념 갈등 △분단 등 대한민국의 소용돌이였던 과거의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학문적 특징에 따라 강조하는 부분 달라
개념사 연구는 그 범위가 워낙 넓은 만큼 학문들마다 조금씩 다른 접근법을 적용하고 있다.

국내에서 개념사 연구를 처음으로 본격화시킨 학문영역은 정치학이다. 한국정치사상학회 설립취지문에서 ‘아직 한국의 정치학은 서구 정치학의 소개, 모방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 학문의 근본적인 기초가 되는 개념체계부터 독자성을 확립하지 못한다’고 밝힌 것처럼 그동안 정치학계에는 보이지 않는 문제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많은 학자들은 자칫 민감할 수 있는 정치 사상 개념화 작업에 더욱 몰두하고 있다.

반면 문학에서의 개념사는 보통 어원학에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 성향이 약하다는 것이 학자들의 의견이다. 철학에서는 우리사상연구소가 펴낸 ‘우리말 철학사전’이 대표적인데 역사적 논의에 주력하는 것은 아니지만 철학용어들의 한국적, 현실적 쓰임새를 분석해 그 의미들을 성찰해보는 개념화 작업이다.

이외에도 사회학에서 개념사 연구는 주로 사회사를 전공한 학자들이 근대의 역사적 개념에 대해 탐구한다. 정치의 개념사 연구가 주로 대외적인 통용에 집중했다면 사회학에서는 좀 더 내재적인 차원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용어의 수용과 정착, 나아가 그것이 근대의 한 부분을 어떻게 이루고 있는지를 탐색한다.

학제 간 연구의 중요성과 그 노력
이처럼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연구되는 개념사 연구는 학제간의 연계가 그만큼 중요한 분야이기도 하다. 국문학적 연구가 정치학에서 연구의 기초적인 자료로 쓰일 수 있고, 정치학에서의 성과물이 사회학적 관점에서 검토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지난 2005년부터는 한림과학원을 중심으로 ‘한국 인문 사회과학 기본개념의 역사 철학사전(이하:한국학개념사전)’ 편찬사업이 진행 중이다. 이는 10년간 진행돼 오는 2015년까지 완료할 계획이며, △정치학 △역사학 △철학 △문학 등 다방면에서 학문적 개념의 맥락과 역사를 고찰하고자 한다. 현재 연구를 총괄하고 있는 한림과학원 김용구 원장은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연구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학문적인 과제”라며 그 중요성을 밝혔다.

아직 한창 연구 진행 중인 개념사. 이를 통해 우리 인문학이 학문적 독자성을 확립할 수 있을지, 또한 우리 학문이 세계 학계에 통용될 수 있는 지적 바탕이 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