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 펄 벅

기자명 이은지 기자 (kafkaesk@skku.edu)

‘공수레공수거’. 아무것도 없이 태어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죽어가는 인간이지만 그 곁에는 항상 ‘땅’이 함께 한다. 흙에서 태어나 다시 흙으로 간다는 말이 있듯이 땅은 인간을 늘 곁에서 보듬어주는 존재다. 그러나 현재를 사는 인간들은 이런 대지모(大地母)적인 은혜를 잊은 채 배은망덕한 행동을 일삼고 있다. 마치 다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펄 벅의 소설 <대지>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주인공 ‘왕룽’의 일대기이다. 그가 부엌종 ‘오란’을 아내로 사와 질곡의 인생 세월을 겪어내며 대지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렸다. 여기서 아내인 오란은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내며 왕룽을 밑거름처럼 꾸준히 또 결정적으로 도우며 결국엔 그녀의 지혜와 근면함으로 남편이 대지주가 되는데 큰 기여를 한다.

오란은 특히 일개미처럼 자신을 희생시키면서도 열심히 일하며, 자신에게 구박을 일삼는 남편에게 훔친 보석을 함께 나누는 등 남편에 순종하는 여성의 모습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그녀는 얼굴은 못생겼지만 부잣집에서 어릴 때부터 일을 해왔기 때문에 말을 잘 따르는 모습이며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부지런하며 사치를 모르는 성격이다. 나중에 자신의 노력 덕으로 지주가 된 왕룽이 첩을 데려와도 자신의 아픔을 숨기며 묵묵히 일만 하다 결국 병으로 죽게되는 인생. 작가는 이 여성을 통해 남편의 부당한 결정도 참고 인내해야하는 여성의 아픔과 함께 있는 듯 없는 듯 늘 자연 그 자체였던 아내를 그려낸 것은 아닐까.

희생으로 대표되는 오란의 이미지는 대지에 대한 인간들의 무정한 행동을 대표하는 것 같다. 대지모신이 숭배되던 사회는 여성이 남성의 종속물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가부장제가 들어서면서 대지모신의 권위는 추락하고 남성과 여성 간 대등한 관계도 무너지게 된다. 소설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땅을 지키고자 하는 왕룽과 땅을 팔라고 재촉하는 두 아들 사이의 긴장관계가 나온다. 여기서 왕룽은 “우리는 땅에서 태어나고 땅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라며 대지에 대한 애정을 나타낸다. 물론 왕룽도 일시적으로 땅을 팔고 남쪽으로 이동해 사는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엔 그런 행동을 후회하고 다시 어렵게 본래의 터전인 북쪽 땅으로 되돌아온다.

작가 펄 벅은 흑인 여성으로서 선교사였던 부모님을 따라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직접 생생히 체험한 중국 농촌의 현실과 대지에 대한 농부의 애정을 그려냄으로써 서양의 눈으로 본,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동양의 모습도 같이 찾을 수 있다. 즉, 서양의 편견어린 시각에서 기인하는 오리엔탈리즘이 아닌 동양의 풍경에 애정을 한껏 실어 담담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소설에서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땅을 덮쳐도 결코 땅만은 포기하지 않는 중국인들의 모습을 그려낸 장면은 작가의 동양적 사고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직도 그저 주기만 하는 내리사랑을 베풀어 온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는가. 우리나 서양의 개발 중심, 물질주의적 사고관을 따라가는 동안 1900년대를 살던 작가는 서양의 기계문명이 인간의 마음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통찰하고 대지의 평화스런 모습을 예찬했다. 시대를 넘어서는 작가의 통찰이 토지를 무분별하게 개발하는 우리들에게 소중한 가르침을 선사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