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엄보람 기자 (maneky20@skkuw.com)

여자에게 묻는다. 초등학생 시절 가장 두려워했던 존재는 누구였나. 선생님? 부모님? 혹시, 동성의 선배나 급우는 아니었는지. 자, 그럼 다음 질문.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가 불과 일주일 새 당신의 세계를 천국으로도, 지옥으로도 바꿔 놓았던 경험이 있는가. 또는, 여자 상사가 교묘히 당신보다 남자 동기에게 너그럽게 군다고 느끼지 않나. 격렬하게, 혹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일 셈이라면 이 마지막 질문에도 솔직히 답해보기 바란다. 바로 당신이 그 가해자였던 적은 맹세코 한 번도 없었던가.
‘개념 있는’ 여자인 나의 안에서 인정하기 힘든 추한 감정이 꿈틀거리는가? ‘사랑스런’ 내 머릿속에 잔혹한 상상이 스칠 때마다 치를 떠는가? 『여자의 적은 여자다』는 일찌감치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여자는 부분적으로만 천사인 ‘동물’에 불과하다고. 심지어 그 나머지 부분은 얼마든지 악마가 될 수 있다고.
전제를 만족스럽게 가다듬은 후. 책은 여자가 유독 여자에게 더 적대적이라는 논리를 펼쳐간다. 이를테면 “육체적 싸움은 지나치게 빨리 끝나버리기 때문에 소녀들이 (보복에 있어)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라던가, “여자들은 친구가 자신보다 어떤 면에서든 우월한 것으로 드러나면 당혹스러워한다”거나, 심지어 “엄마와 딸조차 서로의 성적 성숙을 질투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등등. 스포트라이트는 △십대 소녀 △직장 여성 △모녀 관계 △자매 사이 △동화와 문학작품 속 여자로 차근차근 옮아가며 충격적인 사례와 논리적인 해명을 비춘다.   
난 아닌데, 라며 순진하게 눈을 깜박일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길. 이미 실명까지 밝힌 세계 각국의 ‘그녀’들이 당신 대신 고해성사를 감행했다. 소문을 도구 삼아 베스트프렌드를 사회적으로 서서히 죽여 봤노라고. 언니의 성취를 축하했지만 한동안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졌노라고. 비슷한 서열의 여자를 확실히 짓밟아 준 후에 그녀의 복종이 너무나도 달콤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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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여자가 그리 착하지만은 않은 존재라고 치자. 하지만 10장(章)에 걸쳐 독자를 기함하게 만드는 ‘여자에 대한 여자의 잔인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본문 중에는 싸움을 대하는 소년과 소녀의 태도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가 등장한다. 소년들은 “싸움의 가장 멋진 측면은 다른 아이에게 내가 원하는 짓을 강요할 수 있다는 점”이라며 공격성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반면 소녀들은 “싸움은 나빠”, 또는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상처를 입으면 자책감이 들 거야”라는 식으로 묘하게 질문을 회피한다. 즉, 남자에 비해 여자는 공격성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려 노력하고, 자기 안의 그것을 의식적으로 말소한다.
단합을 해도 모자랄 판에 그녀들이 서로를 물어뜯게 된 데는 이처럼 서글픈 이유가 있었다. 사회가 여자의 공격성을 남자에 비해 죄악시하고, 온순한 여자에게 친히 상을 내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명하고 따스한 여자라는 칭찬일수도, 더 잘난 남자나 그에게서 얻을 2세일수도 있다. 이 모두가 진정한 의미의 가치라고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피를 튀기며 경쟁한다. 이제는 서로가 서로의 적일뿐이다. 이 와중에도 그녀들은 열심히 꾸미고 최면을 건다. 자신은 질투라곤 모르며,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행복해질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말이다. 가장 훌륭하게 공격성을 숨긴 여자가 가장 달콤한 보상을 얻기 때문이다. 책은 “인간 남자들은 서로 눈부시게 연대하는 것을 배웠고, 인간 여자들은 남자의 보호에 의존하는 것을 배웠다”는 나탈리 앤지어의 관점을 인용하며, 결국 가부장제에 자신을 가둔 것은 여자들이라고 역설한다.
이쯤 되면 독자는 슬그머니 화가 치민다. 여자를 위한 책, 너마저 여자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 실제로 책의 저자는 “나의 연구가 여성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칠까 두려웠다”고 고백한다. 『여자의 적은 여자다』는 그들이 어디까지 악랄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서가 아니다. 다만 서로를 이상화하지도, 고로 악마화하지도 말라는 쌉쌀한 죽비소리일 뿐이다.
여자들이여, 자신을, 여자를 믿고 꽁꽁 묶어둔 야성의 앞섶을 풀어헤쳐라. 솔직담백한 잔혹성은 죄가 아니지만, 잘못된 억제는 점점 당신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어갈 것이다. 독설로 일관했던 이 책조차 끝끝내는 이렇게 당부하고 있지 않은가. “악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선의 인내를 믿으라. 그 선이 우리 안에 있으며 우리를 생생하게 지켜나가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