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경 중국철학 교수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김재경 교수 제공
우리 속담에 “산 입에 거미줄 치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사람이 아무리 살기 어려워도 죽지 않고 그럭저럭 먹고살아가기 마련임을 빗댄 것이다. ‘사람의 입에 거미줄’이라는 조상들의 발상이 참 재밌다. 도시에서 거미줄은 보기 힘들다. 거미줄 하면 사람의 발길이 뜸한 시골의 움막이 떠오른다. 낭만적인 풍경이다. 하지만 영화 속 먼지 쌓인 텅 빈 가옥의 구석진 거미줄은 이야기가 다르다. 을씨년스럽고 음산하다. 그런데도 스스로 거미로 자처하거나 남들이 독거미라 애칭으로 불러주는 걸 보면 거미에겐 묘한 매력이 있나보다. 어쨌든 거미줄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장소에 자리한다. 어릴 적 시골에서 살 때 행여 방구석에 거미줄이 보일라치면 어머니는 몽당빗자루로 돌돌 말아 깨끗이 치워버리곤 했다.
초여름에 접어드니 도심 속 숲인 우리들의 학교에도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간혹 거미줄이 보인다. 창경궁과 창덕궁의 울창한 숲이 눈을 맑게 하는 우리 학교는 명당이라고 알려져 있다. 특히 퇴계인문관 뒤 응봉의 자락을 타고 교수회관과 학술정보관, 600주년기념관, 국제관으로 이어지는 혈맥은 성균관 명륜당에 이르러 그 정기를 뿜어낸다고 한다. 그 명륜당 양쪽에 대성전을 향하여 기다랗게 늘어선 동재와 서재가 있다. 일종의 기숙사다. 조선시대 유생들의 젊은 날 추억이 깃든 유서 깊은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문화재청의 관리감독을 받고 있는 건축물에 불과하다. 사람이 살지 않는다. 다만 단체로 견학 온 학생들의 발걸음이 잠시 머물거나 호기심어린 사람들이 기웃거리는 구경거리에 불과하다. 그곳에 거미가 있다.
나는 거의 날마다 명륜당을 오간다. 천연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된 두 그루의 은행나무 그늘에 취해 때론 발걸음을 멈추기도 한다. 가만 지켜보고 있노라면 4백년 이상의 세월을 지켜온 이 거목들이 말없는 말을 건넨다.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 은행나무들이 처음 심어졌을 때 명륜당과 동·서재를 오갔을 조선의 수재들은 과연 상상이나 했을까? 오늘날 우리가 때로는 경외심을 가지고, 때로는 무심하게 바라보는 이 거대한 은행나무들을. 이 나무들이 간직하고 있을 수많은 사연과 비밀은 이제 오롯이 우리의 몫이 되었다.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 은행나무들은 철따라 옷을 갈아입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지금은 한껏 짙푸르러가고 있지만, 봄에는 연두색 생명의 빛깔로, 가을에는 온통 타오르는 노란 불꽃으로, 겨울에는 당당히 벌거벗은 채 제 자리를 지킨다. 십년 전까지만 해도 유학대학 학생들은 이 은행나무와 하루하루를 함께 했다. 입학 후 졸업할 때까지 이 은행나무들과 고락을 같이 했다. 아침이면 거목이 내뿜는 청량감에 눈을 떴고, 밤이면 거목의 드리워진 가지 아래 몸을 뉘었다. 조선시대 이 땅의 수재들이 그랬듯이 유학대 학생들은 힘들 때면 거목에 기대어 위안을 받았다. 동재와 서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동재와 서재에서 책을 베고 쉴 수 있었기에 그러했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는 청춘의 시심(詩心)을 자극하고, 들려오는 새소리는 자연의 이치로 안내했다. 동재와 서재는 그야말로 도심 속 별장이었다. 인재의 산실이었다. 날마다 뻔질나게 드나드는 문턱에 곰팡이 슬 겨를 없었고, 토방 위 기둥은 반질반질 윤이 났다. 언감생심 거미가 보금자리 삼을 여유가 없었다. 집은 사람이 사는 곳이다. 거미가 살기 시작하면 집이랄 수 없다. 지금의 동재와 서재는 박제화 되었다. 윤기가 없다.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다. 집은 사람이 사는 공간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집이 아니다. 지금의 동재와 서재는 문화재는 될지언정 집이 아니다.
한국과 중국의 유교는 다르다. 당연히 현존하는 유교 건축물에 대한 태도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중국 산동성 곡부에도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의 문을 완전히 개방해 놓았다. 관광, 곧 구경을 위해서다. 대한민국 서울의 성균관에도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 문을 개방하지 않는다. 고유나 분향례, 석전 등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개방한다. 그곳엔 신위(神位)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대성전은 대성전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상실했다. 한국의 대성전은 여전히 본래의 목적대로 기능한다. 하지만 서울 문묘라 칭해지는 성균관의 다른 부속건물들은 사정이 그러하질 못하다. 동재와 서재도 그러하다. 깔끔하게 관리되는 문화재도 좋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야 하는 문화재도 있다. 동재와 서재가 그렇다. 동재와 서재는 단순한 기숙사가 아니다. 동재와 서재는 6백년 전통을 이어온 인재들의 쉼터이다.
전통은 만들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있는 전통조차 지키지 못하는데 국가브랜드를 운운한다는 게 우습다. 6백년 전통의 대학 기숙사라! 설레지 않을 청춘이 있을까? 우리 대학의 모태인 성균관은 개성에 있는 고려 성균관, 682년에 세워진 신라 국학과 372년에 설립된 고구려 태학의 전통을 잇고 있다. 무려 2천년에 가까운 역사와 전통을 잇고 있는 대한민국 최고의 숨결이다. 나는 오늘도 두 그루 명륜당 은행나무들을 무심히 바라본다. 4백 살이 넘은 생명의 대선배 앞에서 후배들이 우리 문화의 한 자락인 이 숨결을 이어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십여 년 전 성균관에 얽힌 불미스런 일들 때문에 단절된 이 전통이 다시 이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