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위의 안개 너머로 맞춘 시선오현지(인과계열 23) 0.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라캉의 글에서 발췌되어 널리 알려진 위 구절은, 기실 원문의 일부에 불과하다. 생략된 부분을 불러와 다시 해석하자면 이렇다.There is no such this as Woman, with capital W indicating the universal.보편을 가리키는 대문자 w로 쓰인 그런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72p.일부만 놓고 보면 언뜻 모호해 보이지만, 전문을 따지자면 의도는 적확하다
차서영(연기예술 20) *희곡은 사무엘 베케트 원작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오증자 역, 2012, 민음사)를 오마주하는 장면을 포함하고 있다. *극 중 밴드 ‘화성이주반대집회’의 노래는 미미시스터즈의 ‘우리 자연사하자’(2018) 이다. 해당 노래를 모티브로 하여 장면이 창작되었다. *희곡은 안드레이 스나이르 마그나손의「시간과 물에 대하여」(노승용 역, 2020, 북하우스)을 인용하고 있다. 현재 이곳 극장에 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극장에서 해수면 상
내가 마녀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꼭 열아홉 살이 되던 해였다. 그 해의 난 스무 살이 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이모가 마녀 조합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난 조금 코웃음 쳤다. 난 바빠요, 이모.누가 몰라? 요새는 애들이 제일 바쁘지. 이모는 내 투정을 아무렇지 않게 묵살하며 덧붙여 말했다. 마녀가 되는 일에 나이제한이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이 아니면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어. 그리고 이모는 내게 주소를 하나 주었다. 나는 건성으로 읽어내렸다. 그 주소는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인터뷰 - 재심 전문 박준영 변호사영화 에는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의 재심을 청구해 무죄판결을 받아내는 이준영 변호사가 등장한다. 이준영 변호사의 실제 모델인 재심 전문 박준영 변호사를 만나 재심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봤다. 재심 받을 권리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모든 사건에서 재심받을 권리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판결 자체에 큰 흠이 있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 재심 받을 권리가 중요하다. 이미 판결이 확정됐다는 이유로 이를 감수한다면 정의에 어긋난다. 또한 당사자 입장에서는 법적 불이익을 강요받게 되는 것이다.재심
28년 동안 2대째 자리 지켜“성대 옆에 오래오래 남고 싶다”휴일 저녁, ‘나누미 떡볶이’는 그릇에 가득 담긴 떡볶이를 나눠 먹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28년째 성대 옆에서 장사하고 있어요.” 떡볶이 그릇이 비워지면서 가게가 한산해지자, 지정인(45) 부사장이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말을 꺼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먹어서 몰랐는데 친구들이 팔아도 될 정도라 하더라고요.” 지금의 나누미 떡볶이는 지 씨의 어머니가 개발했고, 어머니는 지인의 소개를 통해 떡볶이 가게를 열었다. 어머니가 떡볶이를 맛있게 만들어서인지, 지 씨는 어렸을 때부
결혼 권하는 사회“취업했으니 결혼할 일만 남았네.” 명절마다 갓 취업한 조카에게 이처럼 안부 인사를 건네는 친척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결혼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짙다. 전통적인 가족 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연애-결혼-가족-출산’의 단계들은 여전히 일반적인 가족 형성과정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 단계에서 벗어날 경우 우리는 흔히 ‘일반’의 범주를 벗어났다고 생각한다.이러한 시각은 기성세대에서 강한 것으로 보인다. 통계청이 조사한 ‘한국의 사회동향 2015’에 따르면, 1955~1963년생에 해당하는 베이비붐 세대에서 ‘결혼
1바클리가 사라졌다.2중요한 건아론은 말꼬리를 늘였다. 미간을 찌푸리며 턱에 괴었던 손을 팔꿈치 아래로 가져가는 동작은, 어딘가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그의 두터운 이마는 어두침침한 조명을 받아 눈 밑으로 길게 그늘을 드리웠다. 그늘 밑에서 번뜩이는 동공을 보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천하의 짐 모리슨도 대학에서 만든 첫 번째 영화로 D를 받았다는 거야. 가장 큰 꿈은 대개 그런 식으로 종언을 고하지. 터무니 없이 끝나버린다고. 알겠어?아론은 잔을 들이켰다. 여자도 마찬가지고. 그는 덧붙였다. 여
가게에 들어서자 큰집에 놀러 온 조카인 듯 반갑게 맞이해주는 사장 박태임(63)씨. 박 씨는 8년째 곱창 가게를 운영 중이다. 가게 이름이 ‘대가(大家)’인 이유를 물었더니 특별한 의미 없이 아는 분에게 작명을 부탁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름처럼 큰집 같은 포근함과 반가움을 간직한 곳이었다. 박 씨는 원래 인사캠 쪽문, 지금의 ‘운동화 빨래방’이 위치한 곳에서 지인과 함께 분식 가게를 운영했다. 당시 분식 가게 맞은편에는 곱창 가게가 있었다. 그러다 같이 가게를 운영하던 지인과 곱창 가게 주인아저씨가 비슷한 시기에 일을 그만두게
지난 11일 새벽 6시 20분, 서대문구의 한 설렁탕집 앞에서 택배기사 김형민 씨를 만났다. 꽁지머리에 야구모자를 쓴 형민 씨의 귀에는 검은색 블루투스 이어폰이 꽂혀있었다. “담배 펴요?” 형민 씨가 기자에게 처음 던진 질문이었다. “나 담배 진짜 많이 피는데, 아들 녀석이 담배 연기를 싫어해서…” 우리는 난지도를 지나 서울 외곽의 물류센터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김 씨는 00택배의 한 영업소에 속했다. ‘속했다’고 표현했지만 택배기사들은 엄연히 말해 개인사업자다. 택배기사들은 개인소유의 지입차량을 갖고 운수회사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인간이 자연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지배적인 생각이었습니다. △풍수지리 △대지모 △음양오행 등의 사상이 지향하는 바가 그렇듯 환경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이죠. 앞서 중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 도 이러한 사상이 녹아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서양은 어땠을까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자연을 정복하고 개발의 대상으로만 봤을까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대지모 사상은 동양에 한정된 것이라기보다는 인류의 삶에서 가장 근원이 되는 원형(archetype)입니다. 즉, 우리 눈에 보이는 동
홍대 앞의 작은 소극장, 많은 인원은 아니지만 소극장에 딱 알맞을 만큼의 사람들. 무엇을 위해 이곳까지 찾아온 것일까, 궁금하던 찰나 묵직하고 청량한 목소리가 육성으로 울려 퍼진다.“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 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중략….” -봄소식(春信), 유치환바로 작가들의 봄맞이 편지 낭독회가 열리는 곳이었다. 봄의 저녁이 무르익어가는 3월의 마지막 날, 유자효 시인의 시 낭독과 함께 본격적인 봄나들이가 시작됐다.사실 이 모임이 특별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 읍에서 한 이 십 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시루 같다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남춘천행 기차를 타고 2시간가량 달리다 보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김유정 역’. 경춘선 개통 당시 ‘신남역’이라는 명칭이었던 이 역은 마을 전체가 작품의 배경인 실레마을을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가꾸기 위해 2004년부터 ‘김유정 역’
연구년도 거의 막바지에 이른 2005년 1월 하순, 나는 3박4일의 일정으로 길지 않은 여행을 떠났다. 서산으로 기울어가는 석양같은 연구년의 끝자락을 붙잡고 그 허망함을 달래기 위해, 그리고 대학 합격의 기쁨을 대만에서 만끽하고자 방문한 조카를 환영하기 위함이었다.일정의 핵심은 대만 동부에서 중부로, 즉 험난하기로 악명높은 중부횡관공로를 횡단하는 일이었다. 우선 첫 행선지로 잡은 곳은 화련(花蓮)이었다. 대만 동부의 화련은 대만의 5대 국제항의 하나이자 태로각국가공원(太魯閣國家公園)으로 잘 알려진 관광지역이다.태로각(太魯閣)은 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