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섭 경영전문대학원 교수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여태 영서와 일서 15권을 번역 출간한 바 있다. 첫 번역서 작업에서 애 먹었던 용어 중의 하나가 영란(英蘭)은행이었다.  영국 출판사와의 정식 번역 계약 하에 1985년 3월에 첫 번역 출간한 ‘국제경제사’ 역서에 Bank of England를 영란은행이라고 번역했다. 당시 경제사 관련 책에는 영국은행이 아니라 영란은행으로 소개되어 있어, 내심 미심쩍어 하면서도 필자도 그렇게 표현했다. 
스코틀랜드 은행도 있고,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및 북아일랜드 모두를 합쳐 일명 영국이라고 하니 영국은행이라고는 당시 번역하지 않았다.
란(蘭)이 왜 들어가는지 혹 네덜란드(화란)와 무슨 연관이 있나하는 의문도 가졌다. 그러다 1988년 영국에서 공부할 당시 경제사학과의 세미나 주제가 이 은행의 설립역사에 관한 것이라 참석한 바 있다. 질의 시간에 일본과 한국에서 영란은행이라고 번역하는데, 나의 의문과 함께 무슨 이유일까 라고 엉뚱한 질문을 했다.
해답은 그 자리에서는 못찾고 세미나가 끝난 뒤에 찾았다. 그 자리에 있었던 영국인 교수가 내게 보여준 영중(英中)사전은 England를 英格蘭이라고 풀어 적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이걸 한자로 적어 같은 연구실의 중국인에게 읽어 보라고 했더니 잉글랜드와 비슷하게 발음했다.
결국 영란이란 표현은 잉글랜드의 중국어 번역에서 비롯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귀국 후 1992년 개정판을 내면서 영란은행이 아니라 잉글랜드 은행으로 모두 수정했다.
FTA 협정문 번역오류 공개판결. 작년에 정말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다. FTA 비준 동의가 번역오류로 표류하기도 했다. 이런 일이 왜 발생할까? 번역 경시 문화가 그 주요 원인이다. 아무나 번역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소수의 그룹에게 전속화되거나 사유화된 정보나 지식을, 다수의 집단에게 개방하고 공유화시키는 것이 번역의 목적이다. 이 말은 80년대 필자가 읽은 책의 서문에 나오는 글귀로서, 지금도 번역을 하는 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200자 원고지 한 장에 4천 원 정도의 형편없는 번역료. 어디 특강 3시간 정도하면 대체로 200장의 번역료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는데 어느 전문가가 번역을 하려 하겠는가. 그리고 번역물은 연구실적으로 잘 인정해 주지도 않는다. 엄청난 시간을 들여 책 1권 번역한들, 논문 1편 보다도 못한 실적으로 인정받으면 누가 번역을 하겠는가.
한편 대학평가의 국제화 지표에서 영어강의 비율이 중시되고 있는 작금의 시대에 영어로만 강의를 진행하는 학과도 여럿 있다. 이 우수한 학생들이 졸업 후 FTA 협정문 번역 같은 업무라도 맡을 경우 적확하게 할 수 있을까. 전문지식은 물론이고 외국어 뿐만이 아니라 우리말도 잘 알아야지, 영어만 잘한다고 번역을 결코 잘할 수 없다. 외국인과의 대화나 협상에는 영어가 절대적인 글로벌 언어이지만, 자국인을 이해시키고 자국인이 참고해야 할 협정문의 번역본은 올바른 모국어로 작성되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미국이나 EU 뿐 아니라 FTA 협정을 체결한 나라와 무역을 하는 대부분의 기업이나 농수산업종사자 등의 이해관계자가 일일이 협정문을 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국민이 참고할 경우 영문본과 한글본의 협정서 모두를 봐야겠지만, 특히 바쁘기만 한 사업가들이 모두를 비교하면서 참조하기란 힘들어, 한글본을 보는 쪽이 훨씬 많을 것이다. 이에 신중한 번역의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번역본이 정본으로서 법률적 효력을 가질 경우 더더욱 그러하다. 두뇌 속에서 영문 용어의 영어적 해석은 바르게 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두뇌 밖으로 우리말이나 글로써 바르게 풀어 쓰지 못하면, 영문해석의 정확성과 협상과정의 진정성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FTA 체결이 국내 산업과 경제에 미치는 영향 등의 연구, 그리고 대외적 및 대내적 협상전략 구축도 중요하다. 그에 못지않게 체결 후 협정문의 올바른 번역은 그간의 결실을 집대성하여 국민에게 보여주는 결과물인 만큼 그 이상 중요한 작업이다. FTA 협정문의 번역오류는 국민에게 경제적 피해를 초래하므로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 
올바른 번역은 공자의 정명론(正名論)과 직결된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번역의 지대한 역할을 알 수 있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와 가토 슈이치(加藤周一) 공저 ‘번역과 일본의 근대’란 책이 국내에서 12년 전에 번역 출간된 적이 있다. 번역이 얼마나 중요하며 얼마나 철저해야 하는지를 느끼게 해주는 번역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