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어느 날 나는 ‘자연스럽다는 말이 새삼스러워졌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친한 언니의 고민을 들으면서.

“뭐든 여유롭게 툭 던지는 사람들이 부러워. 일도 인간관계도 별 탈 없이 유연하게 해내더라고. 근데 나는 그러질 못하거든. 이제 좀 자연스러워지고 싶어.” 고민을 털어놓는 언니의 말에 나는 아무런 위로도, 조언도 못했다. 내가 아는 자연스러움은 사진 찍을 때의 ‘그게 뭐야, 자연스럽게 웃어봐’나 삐죽 나온 잔머리를 굳이 정리하지 않는 일 정도였으니까. 그 의미가 풍부해진 건 작은 한지 공방을 다니면서다.

인사동 골목을 돌아 한적한 샛길로 나가면 ‘ㄷ한지’가 있다. 문을 딸깍 열면 오래 묵은 종이 냄새가 반긴다. ‘ㄷ한지’에는 여러 사람이 모인다. 그들은 자연스러움을 안다. 한지는 한 장 한 장 사람이 손으로 떠서 만든지라 엉성한 맛이 있다. 사람들은 한지의 서툰 종잇장과 섬유에 배어 나온 먼지를 사랑한다. 여기에 다듬어진 한지는 없다. 선반에 앉아 들숨 날숨만을 내쉴 뿐.

그곳에서 나는 자연스러움을 배웠다. 언니의 고민에는 모순이 있다. 우리는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어갈’ 수는 없다. 자연스러워지려 애쓰다 보면 참 역설적이게도 어색한 부자연스러움만 남으니까. 한지공방에서 배운 건 작지만 꽤 본질적인 것이었다. 당신과 나는, 자연스러움을 이미 쥐고 있다. 이에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자연스러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는 있다. 다만 빗물에 뻗친 악성 곱슬처럼, 자연스러움이 그리 달가운 모양새는 아니다. 특히 사람의 마음은 미운 구석이 많아 푹 껴안지 못한다. 이런저런 고민에 우유부단해지고 사랑 앞에서 꽁해지고. 괜한 불안에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 한지의 엉성함을 사랑하듯 아껴주기 쉽지 않다. 자연스러운 사람은 기분 좋은 구석과 미운 구석을 함께 품고 살아가야 함을, 늦게나마 깨달았다. 나는 유독 복잡하고 예민한 인간이라 미운 마음 몇 개는 외면하며 살아왔다. 엉성한 마음까지 품을 여유도, 에너지도 없었기에. 하릴없이 다듬어진 정갈한 마음만 보여준 때가 많고 많다.

내 이름 ‘은강’은 ‘언덕 은(垠)’과 ‘강물 강(江)’ 자를 쓴다. 물 흐르듯 살어라 하신 부모님의 염원이 배어 있다. 누구보다 자연스러운 이름을 지니면서도 자연스러운 사람이진 못했다. 하필 강물 흐르는 곳이 언덕인지라 아슬아슬 급류만 타는 삶인가 보다, 생각했을 정도니까. 미운 마음은 유독 도드라져서 사람을 참 힘들게 한다. 유연하게 흐르다가도 바위에 부딪혀 잠시 날카로워질 때도 있고, 쭉 나아가지 못한 채 우물쭈물 흐를 때도 있다. 나처럼 빈번히 급류를 타는 운명일 때도 있고. 미운 모양은 놀라우리만치 제각각이다. 곱게 흐르지 못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미운 마음이 너무 미우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 답을 또 한 번 ‘ㄷ한지’가 가르쳐 주었다. 한지는 대개 뭉치로 접혀 있다. 돌돌 묶인 상태로 구겨질 걱정까지 접어둔 채. 공방에서 자연스러움을 깨달은 건 곳곳에 깔린 너그러움 때문이었다. 구겨져도 되고 엉성해도 된다는 너그러움. 한지의 엉성함을 사랑하듯 나의 꼬인 마음도 안아주면 그만이다. 마지못해 벌린 두 팔로 무뚝뚝하게 껴안아도 괜찮다. 곧 다시 보기 좋게 흐를 테니 흠뻑 달래주면 그만이다.

자연스러운 사람은 유연하게 살아갈 수 없다. 그럼에도 유연하게 살아가는 ‘듯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삶이 맞춤법 하나 하나 다듬으며 살아갈 만큼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안다. 물 흐르듯 살래, 말하며 우유부단하고 꽁한 마음 품을 준비를 한다. 미운 내 마음까지 사랑할 이는 오로지 나뿐이기에 ‘나에게만큼은’ 너그러워주어야 한다. 다듬는 사람이기보단 내가 만난 엉성한 인물을 푹 껴안는 사람이고 싶다. 글을 읽는 당신도 나도, 자연스럽게 살아갔으면 한다.

 

김은강(미술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