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수현 편집장 (kshyunssj@skkuw.com)

애도는 종용당하는 순간부터 그 의미를 잃는다.

지난달 29일, 핼러윈을 맞아 이태원을 찾은 사람들 중 157명이 압사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늦은 밤 SNS에서 접한 동영상과 뉴스는 믿기 힘들었다. 5일까지 ‘국가 애도 기간’이 선포됐고, 많은 문화예술 공연이 취소되거나 연기됐다.

잠시 8년 전을 돌아본다. 세월호 사고는 2014년, 필자가 열네 살 때 발생했다. 중학교에 갓 입학한 나에게도 믿기 힘들고 어려울 정도로 슬픈 일이었다. 좋아하던 가수의 앨범 발매가 줄줄이 연기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떤 친구들은 사고가 일어난 것보다는 기대하던 수학여행이 취소된 것을 더 큰 문제로 여겼다. 그럼에도 곧 작은 노란 리본을 가방에 달거나, 리본 그림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리본을 안 다는게 이상해 보이는 수준이었다. 학교에서는 세월호 사고 관련 글짓기를 했다. 우수작으로 뽑히면 전체 방송으로 낭독되었다. 언제부턴가 애도하는 마음보다 혼란스러움이 더 커졌다. 내가 지금 슬퍼하는 것보다 더 슬퍼해야 하나? 나는 다른 친구들처럼 이 일에 대해 긴 글을 짓지는 못하겠는데, 내 마음이 부족한 건가? 분명 처음 나의 애도는 진심이었다. 친구들의 애도도 크기와 모양이 다를 뿐 하나하나 진심이었을 테다. 하지만 그 진심이 정해진 틀을 갖추기 시작한 뒤로는 의미를 잃는 듯했다. 규격에 맞춰지지 않는 마음은 보잘것없어 보였다.

정해진 추모의 방식은 없다. 모든 것을 멈추는 것도 추모의 유일한 방식은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의 방법으로 애도하지 않으면 진심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여의도의 한 백화점에서 크리스마스 기념 라이트닝 쇼를 시범운영하자, SNS에서는 ‘지금 시기에 추모를 하지 않는다니’라는 반응과 ‘음악과 공연도 애도의 한 방식일 수 있다’는 반응이 갈렸다. 한 싱어송라이터는 ‘고민 끝에 공연을 예정대로 진행키로 했다’며 ‘공연이 업인 이들에게는 공연하지 않기뿐 아니라 공연하기도 애도의 방식일 수 있다’는 글을 올렸다. 기쁨을 표하는 방식이 모두 다르듯이,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도 다를 수 있는 것이다. 특정한 방식을 종용당하는 순간부터 원래 가졌던 애도의 마음은 퇴색되기 쉽다.

단일한 방식의 애도를 유도하는 사회 분위기는 오히려 보여주기식 애도를 부른다. 수많은 행사가 취소된 배경에는 진심으로 추모하는 마음도 있을 테지만 사회적 분위기를 의식한 이유도 분명 있을 테다. 사회적 분위기를 신경 쓰는 것이 필요하고 당연한 것은 맞다. 그러나 한 방식으로 흘러가는 애도의 분위기가 바람직한지에 대한 고민은 더 필요하다. 규격에 맞춰진 애도가 어디까지 진심일 수 있는지도 재고해봐야 한다.

각자의 진심을 다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각자의 크기대로 애도하자. 그래도 되고, 또 그래도 돼야한다. 보잘것없는 마음은 없다.

김수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