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자살을 극복하기 위한 자살

-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 후기 작품론

 

서론.

포르투갈 영화들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이후 젊은 영화광들 사이에서도 페드로 코스타, 미구엘 고메쉬 그리고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 등의 언급이 잦아지고 있다. 이들 사이를 연결하는 포르투갈 영화미학의 계보 중심에 바로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가 있다. 이 글은 계보학의 관점에서 올리베이라를 다른 감독과 연결하는 것을 넘어 감독의 여러 작품들을 유영하며 작가 고유의 텍스트를 통찰해본다.

 

본론.

올리베이라가 80년대 이후로 보여준 영화들은 시간만으로 인물들을 도륙하며 나아간다는 점에서 오즈 야스지로의 극단적인 표현을 연상케 한다. 혹은 라스 폰 트리에가 <멜랑꼴리아>(2011)의 결말에 이르러 보여주었던, 자살이 금기라면 사고로 다가오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불굴의 우울을 가정한다. 이것으로 카뮈에게 되물을 수 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버텨나가는 그 인생은 결국 다가올 죽음 앞에 자신을 무방비하게 위치시키는, 기찻길 선로에 굳게 묶여 달려오는 기차를 기다리는 또 다른 유형의 자살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말이다.

살아있다는 것이 곧 자살이라는 파격적인 명제는 개인의 속성이 아닌 개인이 마주할 시간의 속성에 의해 판별된다. 그 시간의 속성이란 아주 사적인 동시에 고유한 것이다. 살아있음이 자살과 별반 다를 것 없음을 설득시키는 지적이고도 때로는 동물적인 방법의 시간 배치는 영화사의 총체적인 시대를 경유한 올리베이라만의 특권적인 방법론이라 평할 수 있다. 논리에서 이탈한 삶에 대한 폄하 그리고 영화에 대한 찬가는 그의 영화 안에서만 일시적으로 성립한다.

올리베이라의 시간 감각은 영화사를 따라 흐른 그의 영화 경력으로 가늠된다. 그의 첫 영화는 1931년에 만들어졌고, 마지막 장편 영화는 2012년에, 그러니까 그의 나이 무려 104세에 완성되었다. 첫 작품인 <두오로 강의 노동자들>(1931)은 지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내>(1929), 요리스 이벤스의 <다리>(1928)와 동류의 도시교향악이며, <아니키 보보>(1942)는 로베르토 로셀리니가 연상되는 네오 리얼리즘 작품이다. 90년대에 이르러 <신곡>(1991)<절망의 날>(1992)에서 보여주는 극영화와 리얼리즘 다큐멘터리의 형식적 혼재는 80년대의 장 뤽 고다르, 혹은 스트로브-위예로부터 파생된 아트하우스 영화의 좌표에 위치한다. 현시점 올리베이라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며 안토니오니의 후기 작품을 연상케 하는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건>2012년에, 그가 무려 102세일 때 연출한 작품이다. 연이어 보자면 그는 영화사의 모든 변혁을 수용하며 걸어왔고, 그 종착점 인근에서 자신의 노화 그리고 죽음의 속성을 필름에 각인되는 시간 안에서 겸허하게 담게 되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올리베이라의 90년대 이후 작품이 유독 매력적인 이유는 영화사의 시간과 조응하는 감독 인생의 시간이 풀려버린 카세트 테이프처럼 늘어지듯 나아가는 이미지로 구현됨에 있는 것이다.

올리베이라는 죽음을 앞 둔 자신의 실존적 위태로움을 영화 안에서 반복적으로 표현했다. 영원을 흠모하는 인간의 본성은 불멸의 운동을 포착하려는 영화의 특성과 결부하여 이상에 이룩한 것만 같은 신기루를 형성한다. 이에 따라 인물들은 스스로가 영화의 질료로써 사용되기 위해 자살을 감행한다. 이것은 자신의 죽음이 불멸의 운동으로 흔적될 것이라는 염원의 소산으로, 일종의 자살을 극복하기 위한 자살이다. 기찻길에 묶여있는 인물들은 기차가 자신의 육체와 부딪히기 이전에 모종의 방법으로 스스로 죽어버림으로써, 자신이 도달한 새로운 세계에 대해 예찬하는 것에 이른다. 필름에 찍힌다는 것은 죽는 것이고 이것이 상영되며 되살아난다는 고다르의 발언, 혹은 흡사한 브레송의 단상으로부터 그 새로운 세계가 곧 영화임을 생각해볼 수 있다.

<불안>(1998)1부를 보면, 삶의 전성기에 위치한 아들이 점점 노쇠하며 초라해질 것을 극심하게 불안해하는 아버지가 나온다. 그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살을 끝없이 권유하고, 끝내 아들을 살해한다. 사실 1부는 2부의 인물들이 보고 있던 연극일 뿐이었다. 그리고 2부의 인물들은 설화로 내려져오는 3부의 이야기를 하며 영화의 계는 한 번 더 이동한다. 3부는 마녀의 저주를 계승해 불사의 존재가 되지만 동굴에 갇혀 평생을 살아가게 될 여인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1부와 3부를 액자 안에 품고 있는 2부에서는 죽은 창녀를 영원의 존재로 남기기 위한 기록 텍스트를 언급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이 이야기들의 교집합은 자살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살, 자신의 생명력을 다른 세계로 이월함으로써 박제된 무언가를 완성해내려 하는 자들의 이야기이다. 역시나 여기서의 무언가란 영화 그 자체임을 부인하기 힘들다. 자연과 시간의 섭리에 대한 저항으로써 자살을 제시하는 것은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건들>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이 영화는 다음과 같은 시구로 시작한다.

 

오 어지러운 별들의 춤이여 그 기하학의 궤적을 쫓노라면 한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고 길 잃은 유랑자가 되니멈춘 시간이여 과거의 영혼들이 천상의 길에서 방황하니 천사여, 암흑 속에서 천국의 문을 열어 주께로 인도하라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건들>은 미동도 없는 시신을 사진으로 포착함과 동시에 그 사진들의 연속체에 환상과도 같은 생명력이 생기는 기이한 사건을 다룬다.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대상에게 상상을 각인하며 불멸의 운동을 부과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영화의 속성에 경도된 주인공은 창틀(프레임) 내부로 넘어가며 편안한 죽음, 자살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올리베이라는 이 작품을 통해 영화란 산 자와 죽은 자가 접촉할 수 있는 매개임을 은유한다. 산 자란 영화 밖 관객이 될 것이며, 죽은 자란 오직 관객의 상상에 의해서만 운동-생명을 부과 받을 수 있는 영화 속 인물들을 말한다. 주인공은 총 세 유형의 사진을 찍어 줄에 매달아 놓는데, 그곳에는 원시적인 노동의 시간, 사망 후 부동의 시간 그리고 죽음과 생존 사이를 미묘하게 걸어가는 종교 행위의 시간이 있다. 영화는 시구 속 빛의 기하학적 궤적과 대응되는 이론 물리학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인간 실존의 문제를 노동과 부동을 연결하는 종교 행위, 영화-찍기 행위로 해결하려 시도한다. 시구에서 천국의 문이 영화로 넘어가는 창(프레임)과 대응하는 것도 맥락이다.

 

80년대 이후 올리베이라에게 영화란 연극의 시공간을 옮긴 것이다. 그러나 여타 거장들이 그러했듯, 올리베이라는 연극을 영화 이미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연극만으로는 결코 구현할 수 없는 시간의 속성을 활용한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도 비슷한 문장을 적은 바 있는데, 이 시간의 속성이라 함은 쇼트의 길이와 같은 형이하학적인 지표가 아니라 자체로 감정을 운반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인 매개에 가깝다. 올리베이라는 자신의 황혼기에 이르러 살갗으로 감각되는 온갖 불안과 망상에 가까운 해답을 영화 속 시간의 변주로 표현해낸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주변의 시간으로부터 이탈된 개인의 시간 감각을 고수하는 것으로 섭리에 저항한다. 자살이라는 극단적 행동이 현시되지 않더라도 외부의 시간으로부터 돌출되고 변주된 시간 감각을 고수하는 인물들은 그것만으로 순응적인 죽음으로부터 벗어난 다른 죽음을 기다릴 수 있게 된다. 올리베이라는 외부의 시간을 일상의 반복 혹은 침묵의 공기가 지독하게 부유하는 늘어지는 공허함으로 채워나가며 섭리에 순응하며 살아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지 말한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이탈된 새로운 감각의 시간, 돌발적인 자살을 제시한다.

데자뷔와 같은 일상의 반복은 앞서 언급한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건들>에서 동냥을 하는 거지의 모습으로부터도 암시된다. <불확실성의 원리>(2002)에서는 현대 도시의 야경 롱쇼트를, 주택 내부의 고전적인 인테리어 그리고 고리타분한 인생관을 가진 인물들과 충돌시킨다. 공명할 수 없는 시간 감각의 균열 하에서, 고전의 영역에서 불타는 잔 다르크의 육체는 거미줄로 뒤덮이고 이제는 적을 불태워버리는 악녀의 형상으로 그녀는 도약하게 된다. 이 영화 속 인물은 집 안의 고리타분한 시간 감각으로부터 저항해 자신만의 시간을 되찾고 나서야 비로소 자살을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시간들의 상호 이탈이라는 주제론은 <나는 집으로 간다>(2001)에서 가장 선명하고 아름답게 구현된다. 주인공은 노배우는 영화 시작과 동시에 부인, 아들 그리고 며느리를 교통사고로 잃게 된다. 그로부터 약 2년이 지난 시점에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가학적인 설정으로 노년의 배우에게 실존의 위기를 부과하면서도 영화는 일상에서 그의 감정적 동요를 일절 차단한다. 그에게 부과된 위기의식의 표출은 오직 그가 작 중 무대에서 연기를 행할 때만 허용된다. 그에게 작품 밖 일상이란 그저 홀로 남겨진 손주를 부양하기 위한, 배우로서의 영예도, 젊은 여배우와의 사랑도 무의미해진 시점에서 행해지는 순응적인 자살의 과정일 뿐이다. 새로 산 구두를 강도에게 빼앗기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으로 연출되는 그의 무력함이 영화 전체의 늘어지는 시간을 대변하기도 한다. 그렇게 흘러가는 자살의 과정에서 영화는 그가 다른 유형의 자살로써 이 과정에서 이탈할 수 있음을 피력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뒤덮은 분장 상태 그대로 무대에서 뛰쳐나와 집으로 가버리는, 배우로서의 삶을 살해하는 돌발 행동이다. 이것으로 그가 억누르던 실존에 대한 위기의식은 작품 외적으로도 허용되며, 고된 시간을 감내하던 분장의 과정이 영화-찍기의 맥락으로 확장되며 새로운 형태의 자살, 비틀린 시간의 탄생을 형상화한다. 그렇게 할아버지가 아닌 배우로서 귀가한 그를 응시하는 소년의 얼굴로 이 영화는 끝나버린다.

<나는 집으로 간다>는 결국 반복적이고 공허한 시간에서 이탈됨의 필요성을 논한다. 노배우가 연극 도중에 이탈하는 것도 새로운 것의 반복이라는 또 다른 규칙과 기성 자신의 규칙이 불일치함으로써 피어나는 균열에 관한다. 영화는 이외에도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동일 구도의 시점쇼트나 카페에서 한 자리만을 고집하는 남자의 작은 일화들을 경유해가며 그러한 일상에서 이탈하는 새로운 자살을 암시한다. 비슷한 예시로 올리베이라의 유작 <게보와 그림자>(2012)를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 어떠한 의지도 없이 소시민적으로 자살의 과정에 순응하는 게보를 주인공으로 두는 영화이다. 여기서 기존의 시간 축으로부터 이탈할 수 있는 아들을 제외한 게보 노부부는 시간의 유폐에 의해 집에서 감금당하듯 시들어가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나는 집으로 간다><게보와 그림자>의 공통점이라면, 전자의 경우는 손주 그리고 후자의 경우는 아들이 반복된 일상으로부터 원초적인 거부감을 감각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올리베이라는 미래 세대의 입장이 아닌 철저하게 자신의 입장으로 시간을 조율하면서 미래 세대에 대한 텍스트를 완성한다.

실존의 위기가 임박한 황혼의 고민은 남겨진 이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찰하는 지침의 텍스트로 승화되어, 감독은 <토킹 픽처>(2003)에서 딸과 부인이라는 미래 세대를 선박과 함께 폭파시켜버리며 자살로부터 구제해내기에 이른다. 배에 탔던 삼인의 노년 여성들이 정치 관념에 결박되어 일평생 잊고 있었던 소중한 가치, 반복되는 관습의 역사로부터도 침해당할 수 없는 순수한 가치, 오직 그것만 구명선으로 위장된 순응적 자살이 아닌 맹염과 함께 소멸할 엠페도클레스적인 해방에 이를 수 있게 된다. 그것이라 하면 딸과 부인으로 대표되는 가족애, 반복되는 역사로부터도 초연하며 또한 불변할 진리이다. 이들의 시간은 지구의 반을 횡단하는 공간의 점멸 와중에도 어떠한 동요 없이 균질적이며 일관되어 보인다. 위태롭게 시들어가는 늙음이 아닌 그 자체로 방부 처리가 된 미시적이고도 자연적인 기류, 그것으로 인간은 유물들로 연결되는 공간의 횡단으로써가 아닌 끝없이 흐르는 시간의 연속에서 스스로의 실존을 정의할 수 있게 된다. 일관되지만 반복되지 않는 것, 죽음 앞의 올리베이라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었다.

 

주석

영화를 다수의 문학과 연극이 정박할 수 있는 초월적인 좌표계로 해독하는 올리베이라의 태도에서 스트로브-위예나 자크 리베트를, 혹은 대화 상황에서의 역학에 탐닉하는 태도에서는 <게르투르드>(1964)로 대표되는 드레이어의 연출론을 떠올리게 된다. 이 글에서는 여러 감독과의 유사성으로 대표되는 올리베이라의 영화 작법 대신 그러한 작법을 통해 형성된 영화 텍스트 속 작가 고유의 아이디어를 서술한다.

내 영화 작품은 처음에는 내 머릿속에서 태어나고, 시나리오 위에서 죽는다; 그리고 내가 사용하는 생생한 모델들과 실재 사물들에 의해서 부활한다. 그리고 다시 이것들은 촬영된 필름 위에서 죽는다. 그러나 편집이라는 어떤 순서 속에 자리잡아 배열되어 스크린 위에서 투사되면 물속의 꽃들처럼 다시 소생한다.” - 로베르 브레송,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동문선), 2003, 28p.

<나의 어린 시절 포르투>(2001)에서 연극에 경도 되었던 감독의 유년기를 살펴볼 수 있다.

한 영화의 리듬은 그보다는 단위 화면 속에 흐르는 시간과 유사하게 생성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영화의 리듬은 편집된 단위 화면들의 길이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고, 단위 화면 속에 흐르는 시간의 긴장감이 정해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편집 작업이 리듬을 정해주지 못한다면 편집이란 그저 표현 양식적인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 시간은 영화 속에서 편집의 힘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편집을 했음에도 흘러가는 것이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봉인된 시간(분도출판사), 2005, 146p.

<토킹 픽처>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지구 반 바퀴를 횡단하는 유람선에 탑승한 여자와 딸의 이야기이다. 선박은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이집트, 터키, 예멘을 경유하며 감독은 이러한 여정을 통해 서구권과 아랍의 역사를 유기적으로 연결해낸다. 이러한 시도는 역사의 대립이 결착에 이르러 발생한 9/11 사건에 대한 감독의 사견을 반영하며, 주인공 모녀는 선상 테러에서 대피하지 못하고 배와 함께 폭파되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칼 드레이어는 미셀 들라에이와의 인터뷰에서 게르투르드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 사랑이 전부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카이에 뒤 시네마20015월호에는 올리베이라가 쓴 <게르투르드> 예찬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드레이어가 황혼기에 유작으로 남긴 <게르투르드>와 같은 곳을 향해 황혼기의 올리베이라 또한 걸어갔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김주환(건설환경 19) 학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