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최근 선거나 유권자에 관한 보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키워드는 “무당층(無黨層)”이라는 단어이다. 무당층은 자신은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고 밝힌 유권자들을 의미한다. 한국갤럽에서 실시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전체 유권자 중 약 30%가 무당층에 속한다. 현재 거대 양당인 국민의힘, 민주당 각각의 지지자 역시 30%를 웃돈다는 사실은 선거에서 무당층이 무시할 수 없는 비율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20대 응답자의 약 절반이 무당층이라고 밝혔다는 사실이다. 사실 소위 말하는 스윙 보터(Swing Voter)가 증가한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선거 때마다 신념에 따라 다른 정당을 지지할 수 있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무당층이 다수 분포한 2030 세대가 투표 자체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방선거를 예시로 들어보면, 2018년 실시되었던 제7회 지방선거에서 각각 52%, 54.3%가 선거에 참여했던 2030세대의 2022년 제8회 지방선거 투표율은 36%, 38%로 크게 하락했으며 이번 총선에서 20대에 포함될 18, 19세의 투표율도 비슷한 수준에 머물렀다. 즉,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무당층의 증가가 전혀 상관이 없지는 않다는 것이다.

만약 혹자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미국의 전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의 게티스 버그 연설에서 언급되었던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일 것이다. 이러한 민주주의 정신에 따라 오늘날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이 되는 제도 중 하나가 바로 선거이다. 물론 민주주의의 정의에 대해서는 아주 다양한 개념들이 존재하지만, 민주주의가 다수의 의견을 바탕으로 정치를 이끌어 간다는 점에 대해서는 공유된 의견을 가진다. 이렇게 국민(다수)의 의사를 반영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진행된다는 점에서 선거는, 가능한 많은 유권자들의 의견을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투표율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며, 다양하고 충분한 유권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어야 ‘정치적 대표성(Political Representation)’의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대표성에 관한 정치학적 연구는 아주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미국의 정치 이론가인 피트킨(Hanna Pitkin)이 제시한 전통적인 구분이 가장 많이 언급된다. 그는 대표성의 유형을 △형식적 대표성 △기술적 대표성 △상징적 대표성 △실질적 대표성으로 구분한다. 이 중에서 기술적 대표성은 여성 인구 비율 대비 여성 의원 비율, 청년 인구 대비 청년 의원 비율 등을 의미하며, 일차적 대표성의 확보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실질적 대표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물론 정당 지지가 기술적 대표성의 유일한 조건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성별, 나이를 비롯해 학력, 직종 등 다양한 기준이 기술적 대표성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히 거대 양당제 형태의 의회를 구성하며, 정책 결정 과정에서 정당의 힘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무당층의 정당 선호는 누가 기술적으로 대표할 수 있을까? 나아가 이것이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연관된다면 그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는 누가 대표할 수 있을까? 20대의 절반가량이 무당층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보면, 이 문제가 단순히 선거를 넘어 정치의 역할 자체에 대한 뿌리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무당층의 증가로 대표되는 정치적 무관심의 증가는 내년 4월에 실시될 총선을 약 1년 앞둔 이 시점에서 비단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에서 권력의 원천이 되는 유권자들, 즉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김나래(일반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석사과정·2기) 학우
김나래(일반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석사과정·2기) 학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