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윤재홍 기자 (youni@skku.edu)

지난 2005년 11월 터진 황우석 교수 사건은 필자에게 있어서 샤라포바와 힝기스가 펼치는 테니스 경기보다 훨씬 더 흥미롭게 느껴졌다. 황우석과 「PD수첩」이, 또 황우석과 노성일이 ‘치고 받는’논쟁들이 사뭇 한 편의 격렬한 테니스 경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황우석 교수가 몇 주 간이나 수많은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과학 저널리즘이 그 비판적 성격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사실 우리가 매일 일간지, 과학잡지 등을 통해 접하고 있는 과학 저널리즘의 역할은 과학적 정보를 알기 쉽게 풀어내는 데만 국한되지 않는다.

과학 저널리즘의 궁극적인 목적은 과학을 사회의 장으로 끌어냄으로써 일반인들이 사회적 맥락 속에서 과학기술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대중의 과학 이해’에 있다. 과학 저널리즘을 통해 사회 구성원들이 과학에 대해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의견을 개진하고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기반을 형성한다. 또한 과학 저널리즘은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과학에 대한 비판의식을 형성하게 한다. 즉, 일반 대중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과학계에 침투해 그 속에 감춰진 비리와 거짓을 캐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PD수첩」팀과 프레시안의 기자들은 쏟아지는 협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취재를 거듭해 결국 황우석 교수의 논문 조작을 사회로 끌어낸 것이 좋은 예이다.

하지만 국내 과학 저널리즘은 비판적 역할을 거의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황우석 교수 사건 당시 각종 과학 저널리즘 매체는 겉핥기식 보도와 진실 외면을 거듭하다 상황에 따라 비판과 두둔 사이를 오락가락 하는 모습을 보였다. 2005년 5월에 있었던 황우석 교수의<사이언스> 논문 발표 이후부터 조사 결과 발표까지의 신문 기사를 분석한 통계에 따르면 연구 자체의 타당성에 중심을 둔 기획기사나 탐사보도는 고작 1%에 불과했다. 결국 과학 저널리즘으로서 과학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선정적인 보도로 사람들의 눈을 끄는 데만 매달린 것이다.

이는 ‘과학은 가치 중립적이다’라는 명제를 떠받들다시피 하는 우리 나라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 동안 우리 중 누구도 감히 ‘과학은 가치 중립적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어떤 대상을 맹신하는 순간, 우리는 그 대상의 이면에 숨어있는 문제점들을 보지 못한다. 과학을 맹신한 사회와 비판적 자세를 망각한 과학 저널리즘이 얽혀 황우석 교수 사건을 빚어냈다고 하면, 이는 지나친 과장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