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진(사회90) 동문

기자명 김용민 기자 (claise@skku.edu)

91년 5월, 전경의 거친 진압에 민주화의 뜻을 다 펼치지 못한 채 우리 가슴 속에 꽃으로 남은 김귀정 열사. 당시 김 열사의 시신이 안치된 명동 백병원에서는 또 하나의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김귀정 열사를 두 번 죽일 수 없다며 눈물로 울부짖던 수많은 학우들은 필사적으로 시신의 강제 부검을 막았다. 그 속에는 현 민주노동당 강북을 지구위원장의 박용진 동문도 있었다.

박 동문의 학창시절은 한 마디로 ‘최루탄 바람 잘 날 없는 나날들’ 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엔 크고 작은 데모 이외에도 6월 항쟁과 전교조 결성이라는 역사적 사건들을 직접 목격했다. “신일고 재학중에 매일 고려대 최루탄 냄새가 학교까지 날아왔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냄새가 저의 사회의식을 일깨웠던 것 같아요”

이런 역동적인 고등학교 시절과 달리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그를 맞은 건 술과 미팅이라는 나태한 생활이었다. 그 와중에 터진 골리앗(건설에 쓰이는 큰 기중기) 투쟁은 박 동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정말 내가 뭐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특히 ‘지상에서 노예처럼 사느니 골리앗 위에서 죽겠다’는 노동자의 절규를 봤을 때는 제가 너무 한심해 보였어요”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사회운동에 몸을 던지게 된다.

특히 94년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했을 당시 이뤄냈던 학생총회는 그에게 최고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학우들이 금잔디에 가득 모여서 각종 사회 현안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을 때 큰 보람을 느꼈어요” 라고 말하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국민승리21(민주노동당 전신) 창당 주역에서 민주노동당 대변인을 거치며 진보 활동의 중심인물로 자리 잡는다.

학생시절 그토록 치열한 삶을 살았던 박 동문은 현재 대학생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데모를 안 하는게 아쉬운 건 아니지만 취업 이외에 누려야 할 점을 너무 배제하는 건 아닌가 생각해요”라며 대학의 취업 양성소화에 대해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고 싶은걸 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저도 오랫동안 진보활동을 했지만 이 일 때문에 힘들었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번도 없어요. 그냥 재밌었을 뿐이죠” 라는 그에게 진보란 어려운 정치적 단어가 아닌 친구로 자리 잡은 듯 했다.

그는 끝에 ‘백척간두 진일보’라는 말로 진보를 정의했다. 위태롭지만 과감하게 한 발을 내딛는 것, 그것이 바로 박 동문의 길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의 과감한 발걸음으로 펼쳐질 진보의 나래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