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최혜리 기자 (hyeeeeeli@gmail.com)

질병권은 아픈 몸으로도 ‘잘 살 수 있는’ 권리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에 반기를 들다

 

대학에서 이뤄지는 학업평가의 주요한 척도 중 하나는 성실성이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수업을 듣고, 팀 프로젝트와 시험 등에 성실히 참여해 성과를 내야 한다. 문제는, 평가에 있어 늘 비슷한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는 ‘건강한’ 수강생들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성질환을 가진 학생은 이러한 기준에 미치기 어려울 수 있다.

‘아픈 청년’도 이곳에 있다
안희제(26) 씨는 자가면역질환인 *크론병을 앓고 있다. 현재는 *관해기를 유지하고 있으나 무리하면 증상이 심해질 때도 있다. 그는 “매 학기 교수님께 양해를 구하는 메일을 작성했다”며 “병명을 처음 들어본 사람들이 많고, 겉으론 아무렇지 않아 보이니 상태가 나빠져 부득이하게 결석할 때를 대비해 사전에 만성질환자라는 사실을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대학엔 질병휴학제도가 있다. 우리 대학의 경우 일반휴학의 일환으로 제공되며, 안 씨가 다녔던 연세대의 경우 전문의 진단서와 건강센터 확인서 등을 제출한 후 휴학이 가능하다. ‘아프면 쉬고 돌아오라’는 의미로 만들어진 제도지만, 안 씨와 같은 만성질환자의 경우 쉬고 돌아오더라도 아픈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큰 의미가 없다.

아픈 몸으로 건강중심사회에 균열을 내다
건강한 몸을 기준으로 한 사회에선 안 씨처럼 곤란함을 겪는 이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건강은 사회 참여의 전제조건이라는 인식이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강하지 않은 이들도 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전제조건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2016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질병권’ 개념을 도입한 조한진희 활동가다.

건강권과 질병권의 개념은 차이가 있다. 건강권에서 ‘어떻게 하면 개인들이 더 건강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면, 질병권은 ‘아픈 몸으로도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질병권이 건강권에서 한 걸음 나아간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아픈 몸’이라고 통칭하는 이유는 의료적 차원에선 명명하기 힘든 몸까지 포함하기 위함이다. 이를 통해 △만성·희귀질환자 △장애 등급은 받지 않았으나 비슷한 강도의 질병을 앓고 있는 자 △진단명은 없으나 만성통증을 느끼는 자까지 다양한 아픈 몸들이 연결될 수 있다. 조한 씨는 장애인 인권운동과 질병권운동 간의 차이에 대해 묻는 질문에 "‘장애는 질병이 아니다’고 말해온 장애인 인권운동 구호와는 구분되나 장애를 가진 동시에 아픈 사람도 있고, 장애로 인해 이차적인 질병이 발생한 경우도 있으므로 장애인 인권운동을 질병권과 분리해서 생각할 순 없다”고 답했다.

아픈 몸으로도 일할 수 있어야 한다
질병권 개념은 다양한 사회 분야로 확장되는데, 노동도 이 중 하나다. 질병권에 따르면 직장에서 ‘아파도 일할 수 있는 권리’와 ‘아플 때 일을 쉴 수 있을 권리’를 모두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픈 몸은 채용 과정부터 차별받기 쉽다. 2020년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대표로 발의한 차별금지법 개정안의 차별금지 사유엔 ‘병력 및 건강 상태’가 명시되기도 했다. 아직도 병력에 따른 차별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현재 산업안전보건법, 감염병 예방법 등에는 회사가 감염병과 정신질환 등의 질병을 이유로 당사자를 업무에서 배제하거나 취업을 제한할 수 있도록 하는 법적 근거가 존재한다. 업무의 특성을 고려해 채용할 수는 있겠으나 질병의 종류와 증상 등에 따라 업무수행에 지장이 되는 정도가 달라지는데 이를 일괄적으로 제한해 문제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김창엽 교수는 “자본주의 사회에선 건강한 몸을 곧 생산력 있는 몸으로 규정해왔다”며 “병력에 따른 차별은 이러한 편견이 기업의 경제적 동기로서 작동해 개인에게 아파도 일할 권리를 박탈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아플 때 일을 쉴 수 있는 권리를 위해선 상병수당, 유급병가 등 제도적 변화가 전제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상병수당 논의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으로 인해 더욱 활발해졌다. 질병이 언제나,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보편화되며 ‘아프면 쉴 권리’를 보장받고자 하는 요구가 커진 것이다. 보건복지부는 2025년 상병수당 본 제도 도입을 목표로 3년간 시범사업 및 사회적 논의를 할 예정이다.

‘아파도 괜찮은’ 사회로 나아가려면
아픈 몸을 지속해서 관리하기 위해선 많은 의료적 비용이 든다. 2020년 매일경제가 경제 전문가 50인에게 설문한 결과 ‘중산층이 저소득층으로 내려가는 이유’로 가장 많이 꼽은 답변은 ‘실업이나 질병(44%)’이었다. 의료비 및 간병비 등의 부담이 소득계층이 바뀔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게다가 아픈 상태로는 노동시장에서 환영받기 어렵다. 증상이 심해지면 아예 일하기 어려워질 때도 있다. 아프기 때문에 빈곤해지고, 빈곤하기에 치료받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김 교수는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건강보험과 같은 건강보장 제도들”이라며 “의료비용에 따른 경제적 부담을 경감하기 위한 본래 목적으로 운영이 되려면, 소득 정도나 병의 희귀성과 관계없이 아플 때마다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병원 밖 생활 속에서의 지원도 필요하다. 안 씨는 “아픈 몸을 가진 이들이 어려움을 겪는 건 대체로 병원 밖에서의 삶”이라며 어떤 정책이든 질병이나 장애 등이 변수로 포함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질병권은 결코 아픈 몸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유리한 주장이 아니다. 조한 씨는 “사회 전반에서 질병권이 보장되면 사람들이 질병에 대해 갖는 두려움이 줄어들 수 있다”며 “가까운 사람이 아플 때 병원비와 돌봄 등을 책임져야 하는 개인의 부담 또한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로 질병에 대한 사회적 고려가 늘어난 만큼, 새로이 등장한 개념인 ‘질병권’에 대한 논의가 진전될 미래를 기대한다.

*크론병=입에서 항문까지 소화기관 전체에 발생할 수 있는 만성 염증성 장질환.
*관해기=질병 활성이 없는 상태로 어떤 증상도 나타나지 않는 기간. 관해기가 항상 영구적인 것은 아니다. 크론병과 같은 질병은 장기간의 관해기 중에 증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조한진희 씨가 기획한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아픈 몸들의 질병서사로 만들어졌다.ⓒ조한진희 씨 제공.
조한진희 씨가 기획한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아픈 몸들의 질병서사로 만들어졌다.
ⓒ조한진희 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