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수빈 기자 (newbien@skkuw.com)

 

 

지금은 단 한 그루의 야자나무도 남아있지 않은 이스터 섬을 겨냥해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문명의 붕괴』에서 던진 질문이다. 여기에는 왜 인간이 자연을 무분별하게 개발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담겨있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염두에 둔다면 당연히 마지막 나무를 남겨둘 텐데 말이다.

이스터 섬 원주민들의 찬란했던 문명은 ‘마지막 야자나무’를 베면서 파국으로 끝났다. 그러나 지금 시대의 환경 개발은 태평양의 어느 작은 섬뿐만 아니라 온 지구를 대상으로 하는 개발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사유를 바탕으로 지금까지의 환경 개발을 정당화했을까. 개발의 배경으로 간주하는 큰 축은 서구사를 꿰뚫는 인간 중심주의와 합리적 사유이다. 옛사람들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인간이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가정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모든 동물을 인간을 위해 만들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고 말했고, 이후 고전 사상가들도 이런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기독교적 세계관도 신이 인간에게 다른 창조물보다 우위에 있음을 보여줬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적 사유와 기독교적 세계관을 잘 버무린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 중심적인 사유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모든 존재에게는 저마다의 계급이 있고 이성이 있는 인간은 다른 피조물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인간이 이성이 없는 다른 피조물을 지배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 야자수가 마지막 나무가 아니길

현대 시대에 들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유는 경제 논리다. 경제학이 막 발흥하기 시작한 18세기 서구에서는 인류의 미래를 낙관하는 태도가 널리 퍼져있었다. 또 다수의 서구인이 더 많은 부를 생산하는 것이 곧 사회가 나아지는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고전 경제학자들은 생산 요소들과 이들의 상호작용을 연구해왔고, 그중에서도 스미스의 수요와 공급 법칙은 이후 경제학에 큰 영향을 끼쳐왔다. 그러나 이를 포함한 다수의 경제학 이론은 △광물질 △물 △생물 △토양 등 모든 지구의 자원은 매매와 개발의 대상인 상품으로만 여겼다. 게다가 공기 등 특정 자원들은 무한정 공급되는 ‘상품’으로 가정했다. 따라서 고전 경제학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행동을 ‘당장 자신에게 이윤이 얼마나 많이 남는지를 따지는 것’으로 간주했다. 여기에는 자원이 고갈될지 모를 먼 미래가 고려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유를 그대로 따라가면, 처음에 나왔던 질문 “마지막 나무를 베는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며 나무를 벴을까”에 대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터 섬 사람들은 마지막 나무가 마지막 나무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질문을 제기한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그들이 나무를 베는 순간 이런 낙관적인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딘가에 다른 나무가 있을 거야.”

과학의 발전은 환경을 무분별하게 개발하는 데 일조했지만, 한편으로는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데 도움을 줬다. 특히 측정 도구의 발달이 인간이 자연에 미쳐온 변화를 확인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자연과의 공존을 추구하는 환경주의가 본격적으로 제소리를 내게 된 것은 1960년대부터이다. 이때 환경주의 흐름의 확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히는 사람이 미국의 해양생물학자 레이첼 카슨이다. 1962년에 카슨이 낸 『침묵의 봄』은 농약 사용에 경각심을 일깨우는 책이었고, 즉각적으로 책 내용에 대한 긍정적·부정적 반향을 일으켰다.

이제 환경주의는 대다수가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널리 퍼졌다. 인간과 자연이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은 자명한 진리로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후세를 염두에 두지 않는 개발이 계속되고 있다. 몇몇 기업들은 개발 규제를 풀기 위해 로비를 하거나, 환경주의자들 개인에게 위협을 가하는 등 반환경주의적 활동에 비용을 들여왔다. 그 모든 활동 중에서 가장 효과가 좋은 것은 환경주의자들과 규제 기관들의 과학적 근거를 반증하려는 운동이다. 그들은 몇몇 과학자들을 후원한다. 이들의 주장 중 유명한 것이 “지구 온난화는 인간이 일으킨 잘못이 아니다”는 말이다. 이들의 주장은 BBC 다큐멘터리 <위대한 지구 온난화 사기극(원제 the great global warming swindle)>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과거에 스페인 ‘개척자’들이 이스터 섬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마주한 것은 수많은 거상이 우뚝 선 황량한 섬이었다. 사람들이 반환경주의적 논리를 따라 앞으로도 자연을 이용 자본으로만 여긴다면, 마찬가지로 먼 훗날 외계인들이 마주칠 지구도 문명의 껍데기만 남은 황량한 행성이 아닐까.